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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랑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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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범 [ddong] 쪽지 캡슐

2001-01-15 ㅣ No.4167

-2-

 

 

1999년 겨울의 끝무렵

 

한창 채팅이란것에 맛을 들였더랬다

마침,어느 채팅 사이트에서 각자 방을 만들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방을 만들어놓고

새로운 사람과 얘기 하는것을 즐기고 있었다

 

이젠,처음 들어오는 사람도 내 방의 이름을 많이 보았다고 말할 즈음에,항상 들어오는

일명 "방식구"들이 제안을 했다

단체 번개를 하자나?

 

언제 한번 그들을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것 같아,그러마고 했다

그렇다고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언제 그것이 가능해질지 모르는 일이니..

한편으론 조금 기대도 됐다

그들은 어떻게 생겼고,실제로 보면,어떻게 말을 할까?

 

마침,내 생일이 겨울이란것을 우연히 알게된 식구 하나가,그 날 다같이 보자고 하는 바람에

얼결에 그날 번개가 잡혔다

채팅을 오래,많이 한 사람들이 잘 하는 말 종 하나가,번개를 믿지말라는 것이었다

채팅할때와는 달리 어떤 사람이 나타날지 모른다나?

어떤 사람이던 상관없었다

단지,그동안 거의 매일 얘기를 나누고,이런저런 속얘기까지 털어놓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들인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약속한 신촌으로 나갔다

 

이미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도 있던터라,만나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생각보다 쉽게 서로를 알아봤고,그 덕에 사람을 찾느라 시간을 까먹는 일은 없었다

 

번개를 믿지 말라더니,다들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생긴것을 봐도,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모습들이고,말투나 행동거지가 다들 좋아보여

내심 기분이 좋아 있던 차였다

 

"생각보다 어려보여요"

 

자주 듣던 말이었지만,그 사람들에게 들으니,느낌이 또 달랐다

 

"넌 생각보다 늙어보여"

 

내게 어려보인다고 한 녀석에게 돌려준 말에 다들 웃어버렸다

그 녀석은 정말 자기나이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갑자기 전화기가 울었다

 

올지 못올지 모른다고해서 기대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 지금 오는 길이라고

어딘지 모르겠으니 위치를 설명해 달라고 했다

찾기 쉽게 백화점 앞에 있으라고 하고 내가 나가려고 일어서자,나더러 어려보인다던

그 녀석이 일어나서 찾으러 나갔다

 

그 녀석이 나간 동안에,남아있는 사람들 예닐곱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채팅할땐 어떻더니,실제로 보니 어떻다는 둥,주로 채팅창에서 한 얘기들이 주를 이루고

각자 다니는 학교나 직장에 관한 질문들을 해댔다

 

"어,춥다"

 

데리러 나갔던 녀석이 들어왔다

뒤에는 하얀 얼굴에 까만코트를 입은 곱상한 남자애가 보였다

확실히 어려보였다 그러고보니 나이가 열아홉이 된다고 했던가?

 

추워서인지 하얀 얼굴에 볼까지 발그레 한것이 정말 어려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 애가 조그만 상자를 내밀었다

 

"생일이라길래.. 선물이예요"

 

생각지 못한 것에 당황해서일까

 

얼굴이 붉어지는것이 느껴졌다

하지만,그애가 아니라도 선물은 받았었는데,아마 히터때문에 조금 더워져서인것 같았다

 

그애가 마지막 올 사람이었으니,이젠 다 모인 셈이었다

늦게사 온 그애에게 찻값을 씌우자고 합의를 보고는 우르르 빠져나갔다

이젠 술을 마셔야만 한다고 박박 우기던 한 오빠의 제안이었다

 

신촌에서는 술집을 갈 수가 없었다

때마침 단속이 강화된 탓도 있었지만,그보다는 때가 때인만큼 자리가 없어서였다

홍대쪽으로 자리를 옮겨서 술을 마시기로 했다

 

홍대쪽에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고 있다가,두어명이 더 나타났다

못올거라고 해서 기대도 안하던 사람들이었다

늦게 왔으니,술값은 알아서들 내라고 떠맡기듯 말하고,시끄럽게 웃고 떠들며 마셔댔다

 

자꾸 눈에 거슬렸다

 

까만코트를 입은 그 하얀 애가 왠지 눈에 거슬렸다

자꾸만 신경이 갔다

왜일까 내가 아는 누군가를 닮은듯도 하고,신경이 쓰여서 술도 별로 마시질 않았다

 

새벽 2시가 넘어가고,노래방을 가자는 쪽으로 합의가 됐다

 

몇몇은 이제 집에 가봐야 겠다며 돌아가려 했지만,다른 사람들이 하나같이 붙잡고

오늘은 절대 집에 갈 수 없다고 끌고 갔다

 

"아이,아짐마!! 많이 줘야된다니까여어~"

 

술을 마셔야만 된다고 우기던 오빠는 말투가 원래 그런듯 했다

우릴 포함해서 노래방 주인아저씨도 웃어버렸다

 

룸은 굉장히 컸다

 

난 그나마 친한 남자애 어깨에 기대서 눈을 붙였다

도저히 힘이 없었다

술을 많이 마신것은 아닌데,많이 지친듯 했다 많이 돌아다녀서 일까

 

눈을 뜨니,한 10분쯤 졸았던 모양이었다

다들 이제 내가 노래할 차례라고 책을 떠넘기는 것이었다

마지못해 책장을 넘기는데,애들이 춤을 춰보라며 그 하얀애를 떠밀었다

무슨 일인가,했더니,그 애가 춤을 배웠다던가,백댄서였다던가,뭐 그런 말들을 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잘못 걸렸지..’

 

노래 한 곡을 골라 예약을 시켜놓고 보니,그애는 진짜로 춤을 추고 있었다

참 대단하단 생각을 했다 왠만해선 처음 본 사람들 앞에서 저러긴 힘들텐데..

 

순간,그애와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랐다 무슨 잘못이라도 들킨듯이 순간 가슴이 얼어붙는줄 알았다

착각일까? 어쩌다가 눈길이 스친거겠지..

 

착각이 아니었다

그애와 몇번인가 눈이 마주쳤다

그 앳된 표정에 비해 굉장히 강한 눈빛이었다 순간 당황스러울만큼

 

노래방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4시를 지나가고 있었고,다들 제정신이 아닌듯 했다

취한 사람,피곤한 사람,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도 하나같이 기분은 좋은듯 보여 다행이었다

 

쉴곳이 필요했다

다들 어딘가에 편히 앉거나,누워,쉬고 싶었다

 

여관을 잡자니,시간이 시간인만큼 돈이 아깝고,겜방을 가자니,다들 만나 있는데 특별히

할것도 없는데다,피곤해서 그건 원치도 않았다

아침,걷다가 멈춘 길에 비디오방이란 불빛이 보였다

 

큰 방을 달라고 해서 다들 들어가서 널브러지다시피 했다

 

영화도 일부러 긴것으로 골랐다

당장 잠오는 사람들은 자기로 하고,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영화를 봤다

난 자꾸 감기는 눈때문에 영화를 볼래야 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잤던걸까

정말 긴 영화였던듯,꽤 잔것 같은데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었다

하품을 하면서 몸을 움직여보니,잠결에 옆사람에게 기대있었던 모양이다

그애였다

하얀.. 그애..

 

"미안해,무거웠지?"

 

나오는 하품을 참지 못해,약간 이상한 발음으로 말했다

말하고도 우스워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가볍던데.."

 

여자 꽤나 울렸겠다,싶었다

눈웃음 쳐가며,가볍던데.. 그러면 맘 약한 여자애들 꽤나 흔들렸겠지

 

다들 자나,했는데 영화를 보던 사람이 둘 있었다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못잔다나,뭐라나,그러면서 영화만 보고 있었단다

 

그애는 내가 기대서 잠든 동안 자다가,내가 움직여서 깼다며,이런저런 얘기들을 물었다

학교가 어디냐,과는 재밌냐,왜 애인은 없냐,참 궁금한것도 많았다

나도 그애에게 고3이라 집에서 걱정 많이 하시겠다,학교는 재밌냐,하고 싶은 전공이 있냐,

그저,빤한 질문들을 했다

 

영화가 끝났다

정말 길고도 길었다

2시간 반은 했던 모양이다 벌써 6시가 넘어서 7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자는 사람들도 있고,비디오방 주인아저씨도 9시까진 자도 된다길래 깬 사람들끼리

이런저런 얘기들을 했다

집에가서 푹 쉬고 싶다는 얘기들을 할 때,다들 깨어났다

 

"다음에 만날 땐,좀 대책있게 놀자구요"

 

내 말에 또 다들 웃어버렸지만,그래도 다들 그러자고,재밌긴 한데 너무 힘들다고

그러면서 차도로 나갔다

 

난 택시를 타고 가겠다고 중간에 헤어져서 먼저 동네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방에 깔아둔 이불에 쓰러져버렸다

그리고는,정말 시체처럼 잠에 빠지기 시작했다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갑자기 떠올랐다

그애는,왜 자꾸,날 신경쓰이게 쳐다보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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