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계동성당 게시판

네오까떼꾸메나도 (우리 세례의 풍요로움을 되찾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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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호 [kgh0727] 쪽지 캡슐

2007-05-01 ㅣ No.7502

NEO-CATECUMENATO(우리 세례의 풍요로움을 되찾는 길)

 anipatern01_a.gif 네오까떼꾸메나도 공동체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어 회개의 길을 살 게 하셨으며, 그 길을 통하여 우리는 세례이후의 까떼꾸메 나도 속에서 우리 믿음의 끝없는 풍요로움을 되찾고 있습니다. 이 까떼꾸메나도 동 안 조금씩, 한 단계씩, 한 걸음씩 우리는 영원한 거듭남의 물 속으로 내려가고 있으며, 그래서 교회가 예전에 우리에게 베풀었던 세례는, 세례에 의한 우리의 애착에 의해, 구원의 성사와 전 인류를 위한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네오까떼꾸메나도를 통해 그리스도 인의 시작을 알리는 길이 본당 한 가운데에 열리게 되고, (성인을 위한 복음화 사목)을 발전시킴으로서 오늘날 습관적으로 그리스도 인의 삶을 살아가는 수 많은 우리 형제들에게 믿음을 가져다주며, 세속적인 이 세상 속으로 빠져든 많은 사람들에게 삽자가 차원의 사랑과 완전한 일치 속에서 성숙한 단계의 사랑 위에 믿음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기회를 줍니다.

 anipatern01_a.gif 어떻게 생겨났는가?

  이 길은 1962년 마드리드의 팔로 메라스 아틀라스 빈민촌의 슬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KIKO ARGUELLO와 몇몇 형제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스도 인의 삶을 살고자, 그 불행 가운데서 우리 사회의 죄악의 결과를 짊어진 사람들의 삶을 진실로 나누고자 그곳을 찾아갔으며, 그 속에서 같이 살아가던 바로 그 가난한 사람들의 요청으로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그들에게 선포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약하게 태어났고, 문화나 교육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다듬어지게 되었으며, 점차 까떼케 시적 체제로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도 이를 수 있는 강한 KERYGMA는 새로운 현실, 즉 KOINONIA의 탄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는 기쁨에 차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너무나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 기도의 공동체가 생겨나는 것, 그리고 주님이 자신들을 기억해 주셨음을 찬미하는 죄악에 억눌린 이 형제들의 반향으로서 전례가 살아가는 것을 경이롭게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삼년이라는 세월 속에, 우리는 우리 눈앞에서 믿음을 잉태하는 참된 길로서, 조금씩 조금씩 교회를 약동하게 하고, 모든 사람을 경탄케 하는 차원의 사랑, 즉 원수를 위한 사랑, 십자가 차원의 사랑을 발전 시켜가는 까떼꾸메나도를 보았습니다.

  anipatern01_a_1.gif 어떻게 퍼져 나갔는가?

  작은 공동체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이런 사랑은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삶을 사는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부르는 표지입니다. 결과적으로 자모라의 "St.Prontis교회"와 마드리드의 :Christ the King교회의 본당 신부님들이 스스로 지켜 보셨던 까떼케 시의 체험을 그 본당에 심도록 우리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이런 본당의 주의환경이 빈민가와 판이하게 다른 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놀랍게도 두달 간의 까떼케시 중 케리그 마의 선포 이후에 회개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공동체의 탄생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마드리드 교구의 대주교님이셨던 CASIMIRO MORCILLO경께서 이런 현실에 접촉하시고, 열성적으로 지원해 주셨으며, 이 체험을 시작하기 원하는 본당에 그분 스스로 우리를 파견하여 본당 신부님을 중심으로 그 일을 하도록 재촉하셨습니다.

  그 후 1968년에 로마에 올 수 있도록 초대되어, 로마의 대리자이신 DELL ACQUA추기경님께 마드리드 대교구장님의 서한을 전했으며, :the Canadian Maryts교회" 본당에서 이 길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1공동체에서 선출된 까떼키스트 들의 설교를 통하여 전 교구로, 수 많은 다른 나라로, 가톨릭구가들을 포함한 전 대륙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anipatern01_a_2.gif ITINERANT 까떼키스트

  수 많은 교구 본당 신부님들의 몰려드는 요청은 "ITINERANT 까떼키스트" 라는 은사를 낳게 했습니다. 그들은 일정기간동안 자신 공동체를 떠나서 네오까떼꾸메나도를 원하는 교구에 그 체험을 전하러 자신들을 내 맡깁니다. 자신들의 나라에서 복음화의 체험을 한후, 많은 ITINERANT 까떼키스트 팀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특별히 1972년 이후, 주교님들과 본당 신부님드르이 수 많은 요청을 받아 원하는 나라들에 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주님을 찬미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놀라운 체험들 중의 하나는,하느님께서 세상 여러 곳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도록 하시고 단지 케리그마를 선포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믿음을 잉태 케하는 공동체의 길을 떠오르게 하셨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길을 통하여 본당의 중심이 성사적 사목 활동에서 복음화 사목으로 움직여 가도록 허락하신 일입니다.

  anipatern01_a_3.gif 멀리 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구체적인 길

  네오까떼꾸메나도의 길은 주교님과의 친교아래에서 기존의 본당구조 속에 있는, 나이와 사회적지위와, 외모, 문화가 제각기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진 각각의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생겨난 모임도 아니고,가톨릭협의회도 아니며, 영성활동이나 본당 내의 엘트 집단도 아닙니다.

  차라리 그것은 초대교회의 체험과 유사하면서 또한 이미 세례받은 사람들이라는 전제하에 채택된, 여러 단계로 나누어진 네오까떼꾸메나도에 의해, 세례의 본질적 주요성을 살기 원하는, 그리스도인 삶을 온전히 되찾아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하겠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공동체들은 본당의 중심에(전교하는 교회의 표지와 성사 - 주교시노드)로서 존재하는 사명을 지니게 되었으며, 믿음의 발전이라는 척도하에 외인들을 회개로 부르는 표지, 즉 십자가 차원의 사랑과 일치를 드러냄으로써 멀리 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구체적인 길을 열 게 됩니다.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남들을 위한 이 사랑을 통해 세상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 게 될 것이다. (요한13,34-35) (그들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이 내 안에 게시고, 내가 당신 안에 있듯이 저들 모두 우리 안에 하나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이 세상은 나를 보내신 분이 바로 당신이심을 알 게 될 것입니다.(요한17,21)

  anipatern01_a_4.gif 공의 회를 본당 내에 도입

  제2차 바티칸 공의 회의 빛 속에서, 우리는 네오까떼꾸메나도 공동체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눈에 보이는 몸인 작은 공동체들의 모습으로 이 세상 속에 교회를 새로 세우는 구체적인 길이라 여깁니다. 그들은 자신을 추켜세우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파괴하지 않고 모든 것을 존중하는 것이 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쇄신된 교회의 열매로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또한 그들이 그 어머니로부터 태어났음을 이야기합니다.

 anipatern01_a_5.gif 은사와 소임맡은 자들

  체험이 자라나는 곳에서는, 자기역 활은 각자 지니고 있는 각 지체와도 같은 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구성되어, 그 속에서 믿음을 꽃피우게 하는 자국교회의 구조가, 그 몸을 성숙하게 하는 은사를 이끌어내고, 또한 교회를 꾸준히 자라나게 만드시는 하느님의 뜻(에페소4,11 ,고린토전13)에 따라 남을 섬기고 도우며, 과연 커다란 쇄신을 가능하게 하는 소임맡은 자들을 요구하고 잇음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예언자, 부제, 목자, 의사로서의, 그리스도, 곧 아버지께 충실하시고, 그분의 교회와 하나가 되어 고통받는 모든 이들의 시련에 동참하고자 하는 온전한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는 은사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은사들은 모든 공동체 안에서, 즉 사제, 책임자들(후에 부제직을 맡도록 요청), ITINERANT와 자국 까떼키스트들 안에서, 동정녀와 과부, 결혼한 부부들에게서 드러납니다.

  anipatern01_a_6.gif 네오까떼꾸메나도의 과정

  이 길의 정신

  믿음의 시작인 이 네오까떼꾸메나도 안에서 요구되는 첫째 목적은 공동체의 구성입니다. 첫단계에서 줄 곧 말씀에 대해 각 개인이 애착을 지녀야 하기 때문에 차후에 아주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나서 조금씩 우리 스스로의 약점들이 우리들의 도움을 얻고자 합니다. 남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의 불가능성, 즉 우리를 파괴하는 남의 잘못은 우리에게 커다란 의문을 안겨줍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자신 곧 우리를 보장해 주는 것을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지만 우리의 비극은 우리가 죽고 싶어하지 않은다는 것입니다. 남이 나와 다를 때 그를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감을 뜻하며, 죽음을 극복해야 함을 뜻합니다.

  히브리 서에서 성 바올로는 사람은 평생동안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악과 악마의 노예로 사로잡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고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하려 오셨습니다(히브리 2,14)

  만일 사랑하는 것이 남을 위해 우리자신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우리자신이 죽는 것이며 - 우리 모두는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악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우리 안에서 죽음이 극복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뚜렷해 집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우리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했다는 표지가 되겠습니까?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 십자가 차원의 사랑,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는 것처럼)(이런 사랑에 의해 세상은 너희가 내 재자임을 알 게 되리라) 이런 목적 때문에 위로부터 거듭나고, 성령을 통해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요한1서 3,-14)

  anipatern01_a_7.gif 어디에서 이런 공동체들이 태어나는가?

  무상으로 받은 사랑을 나눔으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만드는 이런 공동체들은 어디서 태어날까요?(구원의 성사)인 자국교회의 모습을 드러내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인 각 본당에서, 유사교회를 만들지 않고, 어떤 것도 파괴하지 않으며, 오늘날의 그리고 교회가 가고 있는 전환기의 교회의 실체를 차차로 떠 맡으며 태어납니다.

anipatern01_a_8.gif 본당의 사명

  오늘날 전통적 가톨릭 신자의 대부분은 그들의 믿음과 생활이 동떨어져 있음에서 드러나듯이 아주 미숙한 단계의 믿음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일상의 체험  속에서 현실화되어야만 하는 심각한 회개의 과정에 대한 철저한 필요성에 따라, 공동체의 구체적인 빼대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성찬에 인도되어 살아가는 기간동안 사람들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는 하늘나라 곧 평화의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려면, 주의에 믿음의 표지를 주는 것이 필요한데 그 표지가 살아 계시고 믿을 수 있는 그리스도를 만드는,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리스도가 자신을 사랑하셔서 그의 고통에서, 죽음에서, 소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자 함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사람들 -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 게 될 것이다).(아버지,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당신 안에 있듯이, 그러면 이 세상 -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도 나를 보내신 분이 당신 이심을 믿게 될 것입니다).

  anipatern01_a.gif 본당을 회개에로 부르는 믿음의 표지

  이런 공동체 안에 살아있는 사랑과 일치는 본당전체를 회개에로 부르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 공동체가 이루어져 있는 곳에서 본당은 긍정적으로 혁명화되었습니다. 그들 둘레에서 발생하는 수 많은 의문들은 교회에서 멀리 있던 사람들을 본당 내의 같은 공동체에 들어오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기존구조를 파괴하지 않고 새로운 본당구조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모든 형제들로 하여금 오늘날에는 믿음을 깊이 있게 하지 않으면 그리고 초대교회에로의 복귀입니다. 십자가 차원의 사랑과 완전한 일치의 표지 안에 사는 공동체는 주의환경에 누룩과 빛과 소금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보라!" 저 사람들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라는 외침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고, 또한 사람들을 회개에로 부릅니다.

anipatern01_a_1.gif 어떻게 길이 열리는가?

  어떤 본당 신부님이 자신의 본당에서 이 네오까떼꾸메나도의 길을 시작하기 원하면 이미 네오까떼꾸메나도 공동체가 있는 본당의 신부님과 접촉합니다. 먼저 이 길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 자신이 그 중심이 된다는 것에 동의하면, 이제 까떼키스트들을 보내주도록 요청합니다. 그들은 네오까떼꾸메나도의 시작에 착수하고, 본당 신부님과 밀접하게 일치되도록 안내합니다. 까떼키스트들은 또한 사목적 소개를 통하서 모든 사제들에게 세례 이후의 까떼꾸메나도를 통해 본당 내에 복음화 사목 활동을 시작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본당 내의 다양한 모임들을 만납니다. 마침내 그들은 주일미사 중네 전 신자에게 초대의 말을 전합니다. 까떼키스트팀의 구성은 말씀선포의 합교회성과 정통성을 보장하는 사제와 부부, 혹은 젊은 신자이며,복음화를 위한 작은 공동체들을 세우는 일을 합니다.

 anibook_blue.gif 첫째단계, KERYGMA

  첫째단계는 케리그마 즉, "구원의 선포로써" 직접적이고 실존적인 대화에 의해 전개되며, 사람들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정신(CHRISTIANITY)이 지닌 강한 영향력을 강조합니다.                                                  

  까떼케시는 전 까떼꾸메나도를 지탱해 줄 다음의 세 다리 위에 기초를 둡니다.

book.jpg말씀 - 전례 - 공동체

 anibook_blue_1.gif 전  까떼꾸메나도

  우선 공동체가 이루어지게 되면 둘째단계인 전 까떼꾸메나도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KENOSIS의 기간으로서, 모든 형제들은 제각기 불완전하며 또한 죄인인 다른 사람들과 합께 걸어가면서 자신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어주는 구체적인 공동체의 새로움 안에서 모두는 자기자신을 뉘우치게 만드는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이 작업 안에서 공동체는 그 실체를 비추어주고 도와주는 말씀을 필요로 하며, 물, 양, 신부와 같이 적절한 주제 위에서 매주 한 번씩 성서적 언어로 들어가는 하느님의 말씀의 전례를 거행합니다. 주일미사 성찬의 전례는 토요일 저녁마다 거행됩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공동체는 주일을 하루 택해 피정을 같이 지내면서 각자 말씀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나누는 기회를 갖고, 직장에서, 가정에서,성생활에서, 사회적 관계나 혹은 돈에 대한 관심등의 자신의 삶에서 그 말씀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약 2년 후에, 공동체의 첫 탄생을 지켜 보았던 그 까떼키스트들이 돌아와서 3일간의 피정 속에서 공동체가 첫걸음을 하도록 준비하는 되 이것은 본격적인 까떼꾸메나도로 넘어가기 위한 첫 찰 고입니다. 이 찰고에 서는 주교님의 주제하에, 세례성사의 첫 부분이 사람들 앞에서 놓여지게 되고, 사람들은 (아멘)을 대답하며 성사를 통해 주어졌던 은총들이 자라나고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비로서 까떼꾸메나도의 문이 그들에게 열립니다.

   anibook_blue.gif  둘째단계, 세례 후 까떼꾸메나도

  까데꾸메나도는 두 기간으로 구성됩니다. 첫째기간 중에 공동체는 말씀과 성찬의 형제적 친교 속에서 인내하며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도록 네오까떼꾸메나도의 사람들을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깨어 기다리는 동안 조금씩,조금씩, 그러나 별다른 노력없이 모든 우상-돈, 경력, 애정들로부터 자신을 벗겨지게 됩니다.

  또 일년 쯤 후에 까떼키스트들이 돌아와서 까떼꾸메나도 속으로 최종적으로 들어가게 되는 찰 고를 준비하는 되, 만일 첫 찰 고가 문을 여는 것에 비겨진다면, 둘째 찰고는 문을 닫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까떼키스트에 의해 시편의 소개와 더불어 깊은 메일 매일의 개인기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후 TRADITIO와 REDDITIO SYMBOLI를 통해 그들은 예전에 교회가 베풀었던 세례가 이제 그들의 직장에서, 가정에서, 무엇보다도 이웃들에게 둘씩 짝지어 복음을 선포하러 방문하면서, 그리고 본당 내의 까떼케시 활동 속에서, 그리고 평신도 사도 직으로서의 본당일을 맡음으로서, 어떻게 그들을 파견하고 그 믿음을 증거하게 하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길"에서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공동체의 일원들은 자신의 믿음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책임을 맡게 됩니다. 그래서 세 가지의 모임이 생겨나게 되는데, 하나는 자녀들의 참여와 더불어 가정에서 열리고,다른 모임은 공동체 안에서 열리며, 나머지는 본당 공동체 모두의 모임으로서, "부활 성야"와 같이 대축일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중심이며 가장 커다란 기쁨은 새벽별이 솟을 때까지 계속되는 위대한 부활성 야를 거행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후 깊고 놀라운 기도로써, 우리가(아빠 아버지)라고 외치도록 배운 "주의 기도에 대한 연구와 재발견을 통해 세례가 어떻게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가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anibook_blue_1.gif 셋째단계, 선출과 세례서약의 갱신

  세례이후 까떼꾸메나도의 기간은 네오까떼꾸메나도의 사람들을 자신을 작은 사람이 되게 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버리도록 하는 단순함에로 이끌어 갑니다. 이것은 그들이 - 항상 까떼키스트의 안내와 본당 신부님과의 밀접한 일치 속에서 - 이런 버림에 의해 찬양과 감사의 영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합니다. 그들은 그 때에야 비로소 이 길의 마지막 단계인 선출과 세례서약의 갱신을 시작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그러으로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삶에 있어서 세 가지의 기본단계인 겸손(전 까떼꾸메나도)과 단순함(세례 후 까떼꾸메나도), 그리고 찬양(선출과 세례서약 갱신) 을 다 거쳐가게 됩니다.

   나자렛의 성 가정

  anibook_blue_2.gif  네오까떼꾸메나도 공동체의 IMAGE

  (니고데모는 예수께,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요한3,4) 이 문장은 교회의 모태 속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우리 어머니시오 동정녀이신 그분께 되돌아 감으로써, 세례를 통해 우리가 받아들인 씨앗을 교회가 싹 틔우고 자라나게 한다는 네오까떼꾸메나도  공동체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잉태와 성장의 시간을 네오까떼꾸메나도라고 부릅니다.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 인의 모상이 신 마리아는 "메시아가 당신에게서 태어날 것입니다. 라는 기쁨에 찬 복음의 선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인 후 성령이 그분의 그늘로 마리아를 감싸고,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 예수의 잉태가 시작됩니다.

그분은 베틀레헴에서 태어날 그날까지 조금씩 자라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성모 영보, 잉태, 탄생과 그리고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명에 착수할 나이가 될 때까지 어린아이가 자라나던 나자렛의 작은 공동체 속의 숨겨진 삶,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거쳐가기를  원하는 과정들로써,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교회가 새시대와 만나고 현대의 세상을 섬기도록 쇄신될 수 있다는 것을 납득하게 됩니다.

  '생명을 주시는 영' 이신 하느님에 의해 새로운 피조물의 맏이로 선포되신 그리스도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자신들 위에 깃들인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분 때문에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AGAPE와 KOINONIA속에서 이 세상에 가까이 오는 구원사업을 하십니다.

  네오까떼꾸메나도는 교회의 모태 속에서의 잉태기간이라고 그 자신을 소개합니다. 마리아처럼 구세주의 선포에 대해 자신의 '아멘'을 대답하는 이 사람들 안에서 말씀은 성령의 활동에 의해 새 피조물로 태어나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그 자녀들을 잉태하고, 낳고, 성 바오로의 말씀처럼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길러주시는 어머니로서 소개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공동체는 그리스도에게 하느님이 맡기신 사명, 즉 야훼의 종의 사명을 다할 때까지 자라날 시간을 주는 것이 제 할 일임을 알고 있는 나자렛의 성가정처럼 겸손과 단순함과 찬양을 살고 있습니다.

 

http://www.luke.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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