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계동성당 게시판

도종환님의 '밤'

인쇄

비오리 [lpius] 쪽지 캡슐

2000-06-21 ㅣ No.1018

                  밤

 

 

                                    -- 도종환

 

 

 

나의 이 그리움 당신이 가져가소서.

 

나의 이 외로움 당신이 가져가소서.

 

그러나 이 아픔 차마 못 드려 강물에 버렸더니

 

밤마다 해일이 되어 내게로 다시 옵니다.

 

 

 

 

***

며칠 전 바다를 보러 갔었습니다.

산과 건물 사이로 숨박꼭질 하듯 조금씩 머리칼만 보이던 바다가

이제 술래를 하겠다며 제 눈 앞에 수줍은 푸름으로 나섰을 때

전 바다에게 술래를 넘겨야 하는 것도 잊은 채 바다의 푸름에 미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함께 간 이들과 저녁을 먹고 모닥불 곁에 앉아

각자의 맘 속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들을 장작 삼아 하나씩 소리 없이 꺼내 놓았지요.

어떤 이는 바란 만큼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을 아쉬워하며 다시 맘을 가다듬구요,

또 어떤 이는 떠나간 사랑에 어둠 뒤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구요.

또 어떤 이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희망에 한숨을 짓기도 했습니다.

입을 통해 소리내어 한 이야기들이 아니었지만 모닥불로 던져진 우리의 이야기는

어두운 해변가에서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지요.

 

그 밤에 그렇게 탄 이야기들...

아침에 해변가로 다시 가보니 까맣게 재가 된 채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없고

남은 것은 작은 불씨 몇 조각 뿐이었습니다.

이제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무겁게 자리하고 있던 이야기들이

다 떠나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바다를 떠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저는 다 꺼내놓고 태워버렸다고 생각했던 가슴 속의 무거움들이

다시 가슴 한켠에서 우물처럼 고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시에서처럼 우리가 바닷가에 버리고 왔던 이야기들이

해일처럼 다시 제게로 온 거지요.

 

모든 걸 놓을 수 있었고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던 바다...

다시 일상에 돌아와 생각하니

’아.. 그래서 사람들이 바다를 찾아가는구나.’ 싶었습니다.

결국은 아무것도 놓고 오지 못한 셈이 되었지만

그 밤, 그 바닷가에서 가슴의 무거움을 잠시나마 꺼내어 모닥불에 던질 수 있었던 것으로도

회색빛 일상으로 돌아온 저에겐 큰 위안이 되었던 거지요.

 

언제고 다시 해일처럼 밀려들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 꺼내어 놓을 수 있을 공간과 여유를 가진 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이 여름...월계동 가족님들께도 그런 공간과 여유가 늘 함께 했음 좋겠네요.

 

 

 

 

아침하늘 ^^



5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