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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3일(8월22일) 오피다의 복자 베르나르도 ♬시편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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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8-25 ㅣ No.1334

 

축일:8월23일(8월22일)

오피다의 복자 베르나르도, O.F.M. Cap.

Beato Bernardo da Offida

BLESSED BERNARD OF OFFIDA

CAPUCHIN LAY BROTHER

Offida, 7 novembre 1604 - Offida, 22 agosto 1694


 

마르카의 아삐냐노에서 어느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일곱살 때부터 양지기로 일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수도자가 되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카푸친회의 평수사가 되었다.

 

그는 여러 수도원의 잡일을 맡아 하면서 문전걸식을 시작하였다.

그의 이런 행동이 처음에는 인정되지 못하여 관구장에게 질책을 받기도 했으나,

일생동안 이런 일을 통하여 높은 성덕의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주민들이 개과천선하였던 것이다.

 

 

한번은 어느 가련한 부인이 죽어가는 아이를 베르나도에게로 내보이며 살려살라고 애원하였다.

그는 그 아이를 팔에 안았는데, 그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 부인은 이제 아들을 살려내라고 생떼를 쓰기 시작하였다.

 

성인은 그 아이를 안고 그곳의 성 펠릭스 성당으로 가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

"선하신 성 펠릭스여, 이제는 당신이 저를 도와줄 시간입니다."

그후 그 아이는 소생하였다.

 

이 기적으로 주민들이 큰 혼잡을 빚었다고 한다.

그는 90세의 일기로 선종했는데, 수도원 문지기로 일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기록적인 장수
90세의 고령으로 선종한 오피다(Offida)의 베르나르도 형제는 카푸친회의 성인복자들 중 가장 장수한 형제요 가장 오랫도록 카푸친 수도생활을 해 온 복자이다. 사실 복자 베르나르도의 긴 삶은 1604년 11월 7일에 태어나 1694년 8월 22일에 별세하기까지 거의 모든 17세기에 걸친 것이었다. 그 생애의 마지막 68년간의 기간을 그는 카푸친회의 평형제로 살았다.
 

 

경건한 목동
1626년 2월 14일, 만 22살의 나이로 복자 베르나르도는 카푸친 수련복을 입고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했다. 그때까지 그는 ‘도미니코 페로니’라는 자신의 세속이름으로 불려왔다. 도미니코는 태어난 날 1604년 11월 14일에 세례를 받았는데, 그가 자라난 마을은 중앙 이탈리아, 아드리아 해의 해안지방인 마르케(Marche) 주의 ‘오피다(Offida)’와 ‘아스콜리-피체노(Ascoli-Piceno)’ 소도시들 사이에 위치한 빌라 아피냐노(Villa Appignano)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도미니코는 아버지 요셉 페로니(Peroni)가 운영하는 농장에서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도미니코의 어머니 메니카(Menica)는 성실하게 일하는 주부였다. 당시 대다수의 비슷한 신분의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학교수업을 전혀 받지 못했고, 만 7살이었을 때부터 집안의 양떼를 목초지로 이끌며 돌보아야만 했다. 도미니코는 아홉 자녀 중 세 번째였고, 농사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기에 모두가 손을 모아 도와주어야 했다. 만 16살이 되면서 그는 쟁기와 괭이를 이용해 바위투성이의 땅을 갈기 시작했다. 또, 쟁기질 하는 황소들을 길들이는 일을 배우기도 했다. 비록 도미니코는 몸만 튼튼했을 뿐만 아니라, 성모신심 행위에 있어서도 지극히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목동으로서 늘 빵과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고, 조그만 성모상본도 가지고 다니곤 했다. 그는 성화를 바위 위에 올려놓고, 양들이 풀을 뜯어먹는 동안에 그 상본 앞에서 기도를 바치곤 했다. 


    
오래 간직한 꿈이 이루어지다
그러나 젊은 도미니코는 또한 주변의 성당들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는데, 그 성당들 중 1614년에 설립된 카푸친회의 성당은 곧바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당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카푸친들과 접하게 되었고, 또한 그곳에서 내심 그는 카푸친회에 입회할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을 떠나는 것에 대한 부모의 반대를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는 몇 년 동안이나 그 꿈을 비밀로 했다가 마침내 1626년에 아버지께 그것을 여쭐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버지는 기꺼이 동의를 했고, 도미니코 페로니는 곧장 코리날도 형제회에서 수련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얼마 후에 그는 카메리노에 위치한 새로운 수련원으로 이동했고, 1627년 그곳에서 그는 ‘라마(Lama)의 베르나르도 형제’라는 이름으로 서약을 했다. ‘라마’란 베르나르도 형제가 자라났던 곳의 범칭이긴 했지만, 그는 ‘오피다의 베르나르도 형제’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이었다. ‘오피다’란 베르나르도 형제의 고향에 가까운 고읍들 중의 한 대읍의 지명(地名)이었다.

베르나르도 형제의 42년간의 숨은 생활
서약한 다음 베르나르도 형제는 페르모(Fermo)로 이동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새롭게 서약한 평형제들의 양성을 담당하는 평형제인 모레스코(Moresco)의 막시모 형제의 지도를 받았고, 평형제로서의 자신의 수도양성 및 전문 양성을 계속해 나갔다. 막시모 형제는 좋은 요리사이기 보다는 좋은 영성지도자였다고들 한다. 요리하는 데에 있어서는 베르나르도 형제가 곧 자신의 스승을 능가했다. 베르나르도 형제가 처음 맡은 임무는 요양실에 있는 형제들을 위해서 요리하는 일이었다. 그는 페르모에서 한 20년 정도를 보냈고, 또 아스코리-피체노 형제회에서 비슷한 기간을 보냈다. 1669년, 그는 오피다의 형제회로 이동되었는데 그곳에서 인생의 말년을 보냈다. 그가 요리사, 간호사, 원예사, 동냥자, 그리고 문지기로서 일했다는 사실 외에 우리는 43년간에 걸친 그의 수도생활의 초반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는 그 일에 마음을 다하여 힘을 씀과 동시에, 가족과 함께 살아온, 평신도로서 이미 습득했던 그 덕행들을 드러냈다. 그 덕행들 중에는 검소와 겸허와 부지런함과 체력과 민첩성과 끈기가 포함된다.


 

참된 관상가
또한 베르나르도 형제는 형제회의 안에서 일상의 일에 매진하면서, 혹은 성당에서 성체감실을 바라보거나 형제회 근처의 숲속에 손수 지은 윗가지 우두막집에서 쉬면서도 깊은 관상기도의 생활을 길러온 사람이었다. 그는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언제든지 그 우두막집으로 물러나 그곳의 호젓함과 고독을 이용하여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노력하곤 했다. 초인종에 응답할 때나 형제회의 방문객들을 맞이할 때도 그는 하느님과 그분의 복되신 어머니와의 대화를 유지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묵주를 더듬곤 했다. 기도할 때 그는 자주 시간 감각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에 식사시간일 때면 다른 형제들이 자주 그를 찾아 나서야 했다. 심지어 겉으로 드러난 그의 모습마저도 자신이 마음기도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잘 암시하곤 했다. 그의 눈길은 성체감실이나 어떤 성화에 고정되어 있었고, 혹시 말이라도 할 때에는, 굉장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그는 때때로 십자가의 모양으로 팔을 벌린 채 기도에 몰두한 모습을 보였고, 어떤 목격자들은 그가 기도 할 때 땅바닥에서 들려 올려진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활동 안으로 넘쳐흘러 들어가는 관상
예전에 성 프란치스코가 그랬던 것처럼, 베르나르도 형제도 성당을 깊게 공경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그러하도록 가르쳤다. "이곳은 하느님의 집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는 그들에게 그 의무를 상기시키곤 했다. 또한 그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듦으로 분심이 많이 생기는 성당 뒤쪽보다는, 중앙 제대에 계신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를 사람들에게 권유하곤 했다. 베르나르도 형제는 참으로 관상적인 카푸친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관상은 활동 안으로 넘쳐흘러 들어갔으며, 신앙심 깊은 그의 하느님 사랑은 실천적인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모든 이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고, 진정하고 완전한 행복이란 하느님과 함께 하늘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곤 했다. 우울한 사람들에게 그는 "천국낙원! 천국낙원! 우리의 참된 희망은 하늘에 있습니다."라는 격언을 하곤 했다. 식품을 동냥하러 시골을 두루 다니면서도 그는 가난한 농촌 사람들과 그들의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려 시간을 내곤 했다. 주요 인구 밀집 지역에 집중되는 교회의 정식적인 사목활동에 비해 그런 사람들은 자주 소홀히 다뤄졌기 때문이었다. 베르나르도 형제는 긴 강론이나 학식적인 강론들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는, 짧고 간단한 구절들을 이용해, 신앙의 진리를 간단명료하게 요약하거나, 또는 당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필요가 있는 누군가에게 그 뜻을 정확한 말로 표현해줌으로써 복음을 전파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이 비도덕적인 생활양식으로 잘 알려진 한 젊은 남자를 베르나르도 형제에게 데리고 갔을 때, 그는 그 사람을 한쪽으로 끌고 가서 십자고상을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그에게 회개할 것을 권유했다. “자! 나의 아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네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으셨는지 좀 보게! 그런데도 자네는 지옥살이를 겪고 싶은 게로구나!” 특히 베르나라도 형제의 노년시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영적인 충고를 들으려고 그를 찾아오거나 그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문맹이었기에 읽을 줄 몰랐던 그는 그 편지들을 읽어주고 자신의 답장을 대필해 주는 형제회 내의 사제들에게 의존했다. 그 지방의 주교들조차도 그의 조언을 들으려고 찾아왔고, 또 그들은 다른 모든 설교자들을 합친 것보다 베르나르도 형제가 더 많은 그들 교구의 영혼들을 회개시켰다고 주장하곤 했다.


 

카푸친회의 '로빈 후드'
여타 사람들에 대한 베르나르도 형제의 구체적인 사랑은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너그러움으로도 표현되었다. 오피다에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정원에서 채소를 기를 것을 수호자에게 허락받았다. 그러나 그 밭에서 빵과 고기를 재배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음식을 훔치기 위해 형제들의 식품저장실을 침입했으나, 이런 그의 노력은 많은 동료형제들의 비난만을 살 뿐이었다. 그는 그런 비판을 참을성 있게 듣고는 아예 무시하곤 했다. 베르나르도 형제의 동냥의 결과는 가난 사람들을 위해 음식들이 후하게 공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형제들 또한 배부르게 하곤 했다.  


 

부서진 관계들과 부서진 몸들의 치유자
베르나르도 형제가 죽은 뒤에, 지역주민들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빈번히 들린 적도 있었다. “오! 베르나르도 형제님은 어디에 있는 거예요? 그분이라면 금방 평화를 되찾았을 텐데,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네요!” 그것은 베르나르도 형제가 참으로 위대한 분쟁 조정자였기 때문이다. 어떤 불화나 다툼이 벌어졌을 경우, 가끔 그는 중재부탁을 기다리지 못하고, 평화를 다지기 위해 분쟁자들 사이로 자발적으로 나서곤 했다. '루도비코 카를로니(Carloni)'라는 사람은 어떤 이웃사람을 죽임으로써 복수하려고 작정했다. 하지만 그가 베르나르도 형제를 만났을 때에, 그 나이든 베르나르도 형제가 루도비코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루도비코야, 왜 그렇게 악랄한 생각들을 품고 있느냐? 자네를 속 썩이는 것이 무엇이냐?"라며 베르나르도 형제가 묻더니, 이어서 "우리 모두는 우리 이웃에 대한 이러한 원한을 극복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베르나로도 형제는 계획된 그 복수를 하지 않도록 그에게 충고했다. 그 노인의 말에 감동을 받은 루도비코는 곧바로 이웃 사람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베르나르도 형제는 부서진 관계를 낫게 하는 사람인 것뿐만 아니라 부서진 육체를 낫게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복자였던 칸탈리체의 펠릭스의 재단 위 등잔에서 기름을 꺼내 가지고 사람들의 몸에 그것을 바르곤 했는데, 그에 따른 어떠한 치유들이든지 자기 자신의 기도 덕택이 아닌, 복자 펠릭스 기도의 덕택으로 돌리곤 했다. 수많은 여느 카푸친 평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베르나르도 형제도 '복된 구걸자'에 대한 깊은 신심을 품었고, 카푸친회에서 첫 번째로 시복시성이 된 '펠릭스 형제'의 생활을 자신의 생활모범으로 삼았다. 그러나 병자들에 대한 베르나르도 형제의 사랑은 다만 기적적인 회복을 위한 기도로써만 드러나지 않았고, 또한 요양실에서 병든 동료형제들을 다정스럽게 간호하며 집에서 앓고 있는 평신도들을 병문함으로써도 잘 드러났다. 베르나르도 형제가 파견되어 있었던 어느 형제회에서 앓고 있던 형제는 자기 자신을 복 받은 사람으로 여긴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그것은 베르나르도 형제가 자신들의 어머니들보다도 그들을 더 잘 돌봤기 때문이었다. 나이 들어 노쇠해졌을 때에도 여전히 베르나르도 형제는 병자들을 돌보기 위해 요양실을 절뚝거리며 다니곤 했다. 그는 예쁜 꽃이나 향초 잔가지들로 장식된 쟁반위에 특별히 요리된 음식을 담아 환자들에게 차려주었고, 필요시, 직접 숟가락으로 그들에게 음식을 떠먹여주곤 했다. 어떤 형제가 중병에 들거나 임종을 하기라도 하는 경우엔, 그는 다른 모든 의무를 면제 받고 그 병든 형제를 24시간 동안 꾸준히 간호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수호자에게 청하곤 했다. 그러다가 피곤하면, 그는 등받이와 팔걸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 머리를 벽에 기댄 채 잠시 동안 수면을 취하곤 했다. 이럴 경우에 있어서도, 그는 자신의 기도생활을 전혀 소홀히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자신과 그가 돌보고 있던 환자들이 미사 집전 소리를 듣고 성체를 조배할 수 있기 위하여, 형제회 수호자를 시켜서 병실과 성당제단 사이의 벽에 조그만 창문을 만들도록 했다.


 

"천국낙원! 천국낙원! 우리의 참된 희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베르나르도 형제 자신의 마지막 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오래전부터 시달려온, '성안토니열(염증성·괴저성 피부 증상의 총칭)' 혹은 화끈거리는 피부질환인 '일회성 단독(丹毒)'이라고 칭하는 급성 피부 전염병과 또한 경미한 마비성 질환이 빠르게 악화되었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그 병상 둘레에 모여 들었고, 임종병상에 누운 그는 그 문병객들에게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킬 것과 그들의 자녀를 신앙인으로 키우며, 또 그들 자신들의 생활을 바로잡는 것에 지체되지 않도록 격려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런 일이 더욱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또 그는 동료 카푸친들에게 회칙을 충실히 지키며 서로서로 오순도순 잘 살아 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라고 권유했다. 1694년 8월 22일 아침, 오피다의 베르나르도 형제는 수호자에게 이 세상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뒤 편안히 선종했다. 1795년, 그는 비오 6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그의 시신은 오피다에 위치한 카푸친 형제회에 부속된 복자 베르나르도 성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다운 가정생활을 육성시키고, 고유한 종교적 의무를 다하면서 모든 이에게 선을 베풀라는 복자 베르나르도의 임종 권고는 그의 불문율 유언일 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와 사명의 훌륭한 요약이 되기도 한다. 


 

"나는 우리 모두가 천국낙원에서 만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머무르십시오! 하느님을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죄를 파하십시오! 착한 생활을 영위하십시오!" - 오피다의 복자 베르나르도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San Felice da Cantalice  

St.Felix of Cantalice

Cantalice, Rieti, 1515 ? Roma, 18 maggio 1587

단순성과 기쁨.카푸친회.

축일:5월18일,게시판1166번,1770번

 

 

 

카푸친 작은 형제회(ofmcap)의 뿌리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가장 닮아 "제2의 그리스도" 라고 불리우는

아씨시의 작고 가난한 성 프란치스코에게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철저하게 따랐으며

그의 형제적 사랑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물에게까지 이르는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1209년에 성 프란치스코는"작은 형제회" 또는

"더욱 작은 형제들"이라 불리 우는 수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이"작은 형제회"안의 개혁 운동으로 시작 되었는데

1528년 7월 3일 교황 클레멘스7세의 대칙서’Religionis Zelus’에 이어,

1619년 교황 바오로3세에 의해  "작은 형제회" 세 개의 가지-

OFM(작은형제회),OFMConv(꼰벤뚜알작은형제회),

OFMCap(카푸친작은형제회)-중의 하나로 인가되었습니다.

 

카푸친 형제들은

관상기도,고행,엄격한 가난,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였으며

복음에 대한 열렬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형제들은 단순한 전례 성서에 기반을 둔 설교,가난하고 소박한 생활 양식때문에

보통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푸친이라는 이름도

긴 세모꼴 두건(capuce)이 달린 갈색 수도복을 입었던 형제들에게

대중들이 붙여준 카푸치니(capucini)라는 별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 676번.1403번

*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축일:9월17일,게시판 644번,1369번

* 작은 형제회 홈 www.ofm.or.kr

* 카푸친작은형제회 홈 www.capuchin.or.kr

 

*카푸친작은형제회 성인들 Capuchin Franciscans: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축일:5월21일(19일),게시판1773번.1891번)
단순성과 기쁨.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1587년.축일:5월18일.게시판1770번.1166번)
만디츠의 성 레오폴드 사제(축일:5월12일,게시판1759번,1890번)
라코니의 성 이냐시오 수도자(축일:5월11일.게시판1757번)
신앙을 수호하다 순교한 식마린겐의 성 피델리스 사제(축일:4월24일.게시판1727번,1119번)
빠르잠의 성 곤라도 수도자(축일:4월21일.게시판1722번)
성 요셉 레오네사(축일:2월4일.게시판1601번)
꼬를레오네의 성베르나르도 수도자(축일:1월12일(19일),게시판1564번)
아크리의 복자 안젤로(축일:10월30일.게시판1444번)
성 세라피노(축일:10월12일.게시판1417번,691번)
캄포로쏘의 성 프란치스코 마리아(축일:9월20일(25일)게시판1384번)
오상의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축일:9월23일.게시판1379번)
복자 오피다의 베르나르도(축일:8월26일(23일)게시판1334번)
복자 아가탄젤로와 카시아노 동료순교자(축일:8월7일.게시판1305번)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사제 학자(축일:7월21일.게시판1283번)

니코시아의 성펠릭스 수도자(축일:6월2일.게시판179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시편8편

 

1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2 어린이, 젖먹이들이 노래합니다.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습니다.

3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5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6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7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9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Beato Bernardo da Offida
22 agosto 
Offida, 7 novembre 1604 - Offida, 22 agosto 1694

Al secolo Domenico Peroni, nacque il 7 novembre 1604 a Villa d'Appignano nei dintorni di Offida in provincia di Ascoli Piceno. Terzo di otto figli, trascorse la sua infanzia in aperta campagna facendo il pastorello e dedicandosi alla cura dei buoi e alla coltivazione dei campi. La vita austera dei cappuccini fu per lui un forte richiamo e, dopo qualche anno, chiese ai suoi familiari e ai frati di poter entrare nel noviziato. Non trovò nessun ostacolo e a ventidue anni indossò l'abito Cappuccino. Dopo la professione fu inviato a Fermo dove rimase una ventina di anni e, nel 1650, dopo essere passato per vari conventi, approdò definitivamente a Offida dove rimase per tutta la vita. La vita di Bernardo fu semplice e nascosta nell'umiltà dei servizi ordinari di un fratello laico cappuccino: fu cuoco, infermiere, questuante, ortolano, portinaio. Innamorato dell'Eucaristia, aveva un rispetto profondo verso i sacerdoti. Muore all'età di 90 anni il 22 agosto 1694. È il più longevo tra i santi e beati cappuccini. Fu beatificato da papa Pio VI il 25 maggio 1795. (Avvenire)

Martirologio Romano: A Offida nelle Marche, beato Bernardo (Domenico) Peroni, religioso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insigne per semplicità di cuore, innocenza di vita e mirabile carità verso i poveri.

Domenico Peroni nacque a Villa d'Appignano nei dintorni di Offida, terzo di otto figli, trascorre la sua infanzia in aperta campagna facendo il pastorello, all'età di 15 anni si dedica alla cura dei buoi e mette mano all'aratro. La vita austera dei cappuccini era per lui un forte richiamo e dopo qualche anno chiese ai suoi familiari e ai frati di poter entrare nel noviziato. Non trovò nessun ostacolo e all'età di 22 anni indossava l'abito Cappuccino, dopo la professione fu inviato a Fermo dove rimase una ventina di anni, nel 1650 dopo essere passato per vari conventi approdò definitivamente a Offida dove rimase per tutta la vita.
Una vita semplice, nascosta nell'umiltà dei servizi ordinari di un fratello laico cappuccino: cuoco, infermiere, questuante, ortolano, portinaio.
Innamorato dell'Eucaristia, aveva un rispetto profondo verso i sacerdoti.
Muore all'età di 90 anni il 22 agosto 1694. E' il più longevo tra i santi e beati cappuccini.
Fu beatificato da papa Pio VI il 25 maggio 1795.
La data di culto per la Chiesa universale è il 22 agosto, mentre viene ricordato il 23 agosto dai Frati Minori Cappuccini e ad Offida.


Autore: Carmelo Randello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2001-10-11

 
 



 

BLESSED BERNARD OF OFFIDA
CAPUCHIN LAY BROTHER
We are told that Bernard was born of devout parents who trained their children to have a great reverence of God.

Bernard entered the Capuchin Order at Corinaldo in 1626, when he was twenty two. For seven years, he worked in the kitchen under Br Maximus who was himself a better spiritual director than he was a cook. Bernard became a lay brother in the way that was to lead him to sanctity.

Bernard's faith in his calling and in religious life deepened over the years. He knew from experience that "the just man lives by faith". It was this same faith that taught Bernard to prize Catholicity and to respond to the demands of each day in true Capuchin style. Bernard loved to immerse himself in the Sacred Scriptures and other spiritual readings. Our Lord in the Blessed Eucharist was the source of his spiritual devotion, indeed, he often found it impossible to stifle the cries of joy he sang out when in the presence of Jesus. He spent many hours in adoration before the Blessed Sacrament, and on numerous occasions, friars witnessed Bernard raised from the ground with his face shining like the sun.

Bernard's faith was rewarded with spiritual favours not only for himself but for many others as well. Many Capuchin theologians came to Bernard seeking solutions to difficult questions.

Bernard is also credited with the raising of four children from the dead and once, when all the roads were snow bound, food was sent to the friary due to his fervent prayers.

The Cross also was a reality in the daily life of Blessed Bernard. His fasting was almost continual. He also scourged himself frequently and at the age of seventy two, Bernard received the Stigmata. For the remaining twenty years of his earthly life, he stood like a giant before the world with the Holy Seals of Christ's sufferings, witnessing to the indescribable love of God for erring humanity.

Blessed Bernard died in 1694, a model of Faith, Hope and Love. He was beatified by Pope Pius VI and his feast is celebrated on the 1st Sept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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