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단 한 사람의 관객

인쇄

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08-30 ㅣ No.5291

 

 

북적대던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늦여름 유원지에서의 일입니다.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서커스단 광대들도 짐을 꾸려 떠난 뒤 텅 빈 유원지에 한 소년이 나타났습니다.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던 소년은 서커스 천막으로 다가가 청소중인 경비원에게 돈을 내밀었습니다.

"이게 뭐냐?"

경비원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습니다.

"입장료예요."

소년이 또박또박 대답했습니다.

경비원이 서커스는 막을 내렸다고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했지만 소년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글쎄 이제 안 한다니까. 이미 끝났단다."

"안돼요, 아저씨. 저는 서커스를 보려고 시내에서 여기까지 걸어왔단 말예요."

시내에서부터 걸었다니 한 시간이 넘게 걸렸을 거리지만, 그렇다고 단 한 사람을 위해 이미 흩어진 광대들을 불러모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경비원이 입을 열었습니다.

"좋아, 들어가거라. 하지만 입장료는 안 받는다. 이건 정식영업이 아니니까."

"우와, 신난다!"

소년을 귀빈석에 앉힌 경비원이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

막이 오르자 오렌지빛 조명을 받으며 광대가 등장했습니다. 걷고 뛰며 숨이 차게 찾아온 서커스. 혼신을 다한 연기, 우스꽝스런 몸짓과 표정....

소년은 끝까지 손뼉을 치며 까르르 웃고 좋아했습니다.

광대는 소년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가만 모자 속에서 나비가 날아오르고, 풍선을 타고 공중으로 둥실 떠오르기도 하고.. 황홀경에 빠진 소년의 빰이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쇼가 끝나고 광대가 마지막 인사를 하는 순간, 박수 소리가 천막을 열어제쳤습니다.

피서 인파가 빠져나간 유원지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남았던 기자들이 한 소년의 웃음 소리를 쫓아 천막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솜씨입니다. 당신이 서커스 책임자인가요?"

"예? 아니에요. 저는.. 여기 경비원입니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기자들에게 경비원은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한때는 광대였지만 중병에 걸린 아내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고정 수입이 있는 경비원을 택했다고, 그리고 한 소년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무대에 서게 됐다고....

"모처럼 무대에 섰는데 이 아이보다 제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하하."

다음날 신문에는 치열한 장인정신이 빛나는 한 늙은 광대의 얼굴이 실렸습니다. 그것은 단 한 사람의 관객을 위해 혼신의 연기를 보여준 진정한 광대의 모습이었습니다.

 



37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