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양동성당 게시판

평화와 참 좋으신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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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일 [kimballado] 쪽지 캡슐

2003-04-10 ㅣ No.3033

+ 평화와 참 좋으신 하느님

 

<박노해 라는 시인의 긴박한 글을 올립니다. >

 

.................................

 

박노해 가스발입니다.

미리 상의도 못 드리고 이곳 요르단 암만으로 떠나온 걸 용서해 주십시오.

갑작스런 결정이었기에 고해성사도 못하고 왔습니다.

이곳의 主日인 금요일, 후세인 모스크에서 가난한 아랍형제들과 함께

간절한 평화의 기도를 올리며 저의 죄를 눈물로 告解하였습니다.

멀리서나마 제 고해성사를 받아주시겠지요?

 

오늘 새벽 2시 반경, 신성국 노엘 신부님을 바그다드로 떠나보냈습니다.

박기범이라는 동화작가와 하연이라는 서강대 여학생과 함께 떠났습니다.

떠나기 전에 저는 신부님과 따로 자리를 갖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신부님은 담담하게 눈물을 글썽이며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외롭고 떨리는 마음이었겠습니까.

마지막 말이 될지도 모르는 한 사제의 통절한 고백을

저는 그저 들어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사제의 통절한 고백

 

신부님은 이곳 요르단에도 아무 연고 하나 없이 오직 박 시인이

있다고 해서, 박 시인과 함께 이라크로 가면 될 거라며

달려왔다고 했습니다.

하필 그 때 저는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바그다드행 비자가 도저히 나오지 않아서 UN 이라크 담당관과

이라크 내의 유력한 분들께 연결을 시도하며

도움을 청하는 한편, 이라크 전쟁 이후에 몰아닥칠

한반도 전쟁 위기에 함께 대처할

평화 운동가들과 단체들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은 일단 암만의 한국 반전평화팀

숙소에 합류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르단 이라크 대사관으로부터 신부님을 포함해서

여섯 사람에 대한 비자가 극적으로 발급됐습니다.

휴먼실즈(인간방패) 비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라크 당국이 외국인 인간방패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든다는 식의 해석이 있으나,

지금은 좋은 방향으로 생각했으면 합니다.

 

 

5박 6일의 이스라엘 일정을 마치고 암만으로 돌아오자마자

저는 곧바로 반전평화팀 숙소로 찾아가 신부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신부님과 저는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현재의 전황과 국경의 위험한 정세를 들어 오늘 당장

무조건 바그다드로 가는 것을 간곡히 만류했습니다.

오늘 오후 암만으로 돌아오는 국경 부근에서 휴먼실즈 차량

두 대 중 한 대가 미군의 공격을 받았고,

이라크 공군기지가 근처에 있어 위험이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조만간 바그다드 시가전이 벌어지고

생화학 무기전이 시작될 경우,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일체의 통신이 두절되고

물도 식량도 없는

바그다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바그다드 시내에 있는 휴먼실즈들도

이라크 경찰의 철저한 감시통제 구역 안에 있고

하루에 한번 또는 2~3일에 한 번

그들이 보여주는 폭격피해 현장만을 견학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시가전이 시작될 경우 퇴로도 확보하지 못하고

어느 쪽에 어떻게 이용당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곳에 온 지 12일째인 저는 암만과 시리아 이스라엘 바그다드에

이르는 기본적인 네트워크를 갖추고

나름대로 다양한 정보와 자문을 구하며 활동하고 있기에,

제 이라크행 비자가 나오면 저와 함께 가는 것이

조금은 더 안전하고 내실 있는 평화 활동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행동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그러나 신부님의 가슴은 뜨거웠고 결심은 단호했습니다.

이미 자신을 평화의 제단에 봉헌하기로 결단한 자의 비장한 마음이었습니다.

"나는 부당한 전쟁으로 죽어가는 이라크인들 속에

무조건 함께 있고 싶습니다.

한국정부가 어쩔 수 없이 이 전쟁을 지지하고

파병까지 결정한 것은 이해하지만,

사제로서의 제 양심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 아버님은 베트남 전 때 미군의 통역장교로 4년을 복무했습니다.

그 빛나고 멋있던 아버지는 전쟁 4년을 치르고 돌아오자

40년간 전쟁 후유증을 앓으며 파괴되어 갔습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지, 이웃 모두에게

전쟁의 상처를 뿌렸습니다.

승자건 패자건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참혹하게 파괴하는 지를

저는 겪어 봤습니다."

 

 

"한국 천주교는 지금 위기입니다.

우리 사제들을 위해 제 한 몸을 바쳐 기도하고 싶습니다.

사제들이 물질의 안락과 평화를 누리면

무엇으로 이런 전쟁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보장되고 나름의 영향력을 가진 사제가

왜 청빈, 정직, 나눔을 실천하지 못할까요?

 

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지 못할까요?

’행동이 없고 삶이 없는 신앙’ 은 이미 죽은 신앙이고,

고통의 현장을 외면하는 사제는 더 이상 사제일 수 없습니다."

 

이런 신부님의 마음을 알면서도 저는 오늘 밤 출발을 간곡히 말렸습니다.

 

저는 신부님께 처음으로 제가 죽음 앞에 세워졌던 순간들과

이라크로 떠나온 ’마음의 길’을 고백하며

뜨거운 가슴의 성찰을 말씀드렸고,

신부님도 깊은 공감으로 다시 생각을 시작했습니다.

 

전시 상황 속의 인간

 

그러나 전시 상황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생명이 걸린 중대한 결정조차 깊은 논의와 숙고를 거치기 어렵고,

시간과 조건과 분위기에 쫓겨서 급격한 감정의 파고를 타게 됩니다.

그것이 전쟁 속의 인간입니다.

일단 오늘 밤 바그다드로 가겠다는 사람과 애써 말리는 사람들,

출발인원의 변동이 잦아지면서,

반전평화팀은 초긴장 상태였습니다.

 

저는 이라크로 떠나는 분들의 순수한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그러나 목숨을 소중히 바치자고 거듭 만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막 바그다드에서 빠져 나온 IPT(이라크 평화팀) 소속의

한상진씨가 도착했습니다.

그의 미소 없는 얼굴과 마른 몸에서는 전쟁의 긴장과

공포가 훅 끼쳐 왔습니다.

 

한상진씨 는 미국인 팀원들과 두 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오다가

미군의 공격으로 뒤차가 폭파되어 동료를 잃고,

앞차에 탄 자신들도 겨우 총격을 모면한 채

운 좋게 살아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한상진씨 역시 이라크의 긴박하고 위험한 전쟁현장과,

국경에서 바그다드로 가는 길이 바그다드 시내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말하며 함께 만류했습니다.

 

"일단 전쟁이 터져 버리고 나면 반전이 별로 소용없다.

오늘 이라크에서 나왔지만 지금 막상 가서 할게 없다.

 

이제부터 필요한 것은 긴급구호다.

함께 준비한 뒤 일주일 후쯤 시리아 국경을 통해 바그다드로 출발하자.

너무 위험한 곳을 아무 준비 없이 떠나는 것을 나는 말리고 싶다"며

나직이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이 논의를 해 온 반전평화팀은

"모두가 이미 아는 내용이고 더 이상 재고해야 할 새로운 정보가 없다"며

출발준비를 서둘렀고, 결국 신부님과 두 젊은이는 바그다드행을

결심했습니다.

 

저는 신부님께 바그다드 시내 WAHDA St.에 있는

Fr. Yousip씨의 이라크 내 위상과 활동상을 알려드리고,

전화번호를 적어 드렸습니다.

 

어둠 속에 촛불 하나가 되어

 

신부님은 엊그제 주일 날 혼자 미사를 드렸다며,

오늘 저와 함께 미사를 드리고 갈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대신 미사주를 함께 나눠 마시고자 제안했습니다.

죽음의 전쟁터로 떠나는 한 사제가 낯선 아랍 땅에서

홀로 미사를 드리는 모습을 떠올리니

그만 눈이 젖어왔습니다.

 

신부님은 가련한 미군들의 영혼에도

축성하고 영성체를 나누려 한다며,

영성체 떡과 포도주를 배낭에 챙겨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제복과 미사복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내보이는 권위의 상징인 사제복과 미사복 한 벌 챙길 틈도 없이

떠나온 우리 신부님.

저는 사제복은 못 챙겨도 영성체를 모셔온 그 마음이

만져져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신부님은 검정 쉐타에다가 흰 천을 잘라 직접 바느질한 옷을

사제복으로 입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마지막으로 제게 교황님께 올리는 편지를

서울로 보내달라며 편지를 손에 꼭 쥐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조성학 신부님, 박기호 신부님, 청주교구 사제단 신부님들,

주교님, 추기경님, 정의구현 사제단 신부님들과 간사들,

사랑하는 신자분들을 목메어 부르며 축성해 주셨습니다.

 

어느덧 새벽 2시 반, 차에 물병과 식료품을 싣고

한국의 두 순결한 젊은이와 신부님을 태운 차는

폭격과 총격이 쏟아지는

바그다드 국경으로 떠나갔습니다.

 

저와 최창모 교수님과 몇 분들은 제발 국경이 막혀 다시 돌아오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렸습니다.

 

이 몹쓸 전쟁은 언제나 끝이 날까.

마지막으로 포옹하며 나누던 신부님의 떨리는 음성이 아직 생생합니다.

 

"나눔만이 평화를 가져오지요.

나누지 않을 때 전쟁은 다시 일어납니다.

 

평화의 제단에 저를 대신 바치니 박 시인,

제 몫까지 나눔 문화 운동을 해 주세요."

 

그렇게 그는 촛불 하나가 되어 전쟁의 어둠 속으로 떠나갔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2003. 4. 2. 새벽

요르단 암만에서 박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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