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동성당 게시판

연중제3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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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국 [yk1004] 쪽지 캡슐

1999-01-24 ㅣ No.113

1999년 1월 24일 연중 제3주일 강론

 

제1독서: 이사야 8, 23b - 9, 3.

제2독서: 1 고린토 1, 10 - 13. 17.

복음: 마태오 4, 12 - 23.

 

   교형, 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겨울 들어서 계속되는 것이긴 하지만 따뜻한 겨울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원래 이번 겨울을 추울 거라고 기상대에서 예보했었는데, 그것이 틀리고 있기 때문에 손해를 보고 있는 곳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일단 우리들 가정부터도 이번 겨울이 추울 거라고 해서 부랴부랴 김장을 서둘렀는데 지금쯤 김치들이 장독에서 다 쉬어 있겠지요? 앞으로 적어도 두 달은 그걸 먹어야 할텐데, 쉰 김치 어떻게 처리하지요? 그리고 겨울용품을 많이 만들어 놓았던 겨울용품 업체들은 물건이 팔리지 않아 손해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안에서 뿐 아니라 나라 밖에서도 원유를 파는 산유국들이 석유가 많이 팔릴 것을 예상했었는데 팔리지 않아 아주 곤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새 경제학자와 기상학자의 말은 믿을게 못된다'는 말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어렵게 사는 분들을 위해서는, 또 석유를 귀한 외화를 들여서 사다 써야 하는 어려운 우리 나라 형편을 위해서는 이 춥지 않은 겨울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전 번 강론 때 예수님의 공생활은 주님의 세례 사건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 복음은 예수님께 세례를 준 세례자 요한이 자신이 세례를 베푼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아로, '하느님의 아들'로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그것과 관련지어서 '예수님은 공생활의 활동을 어디서 시작하셨을까?'라는 의문을 갖는다면 오늘 복음이 그 해답을 줍니다. 또 '공생활을 시작한 예수님이 무엇을 처음 가르치셨을까?'라는 의문을 갖는다면 다음 주 복음이 그 대답을 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주일 복음들을 전주와 다음 주의 복음과 연관지어서 묵상해 나간다면 우리 신앙의 연조가 길어질수록 우리 믿음의 성숙도 깊어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의문인 예수님은 '어디서 활동을 시작하셨느냐?'에 대한 해답은 너무나 뻔합니다. 갈릴래아 그곳입니다. 갈릴래아라는 이름의 땅 대부분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즈불론과 납달리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의 후손들 영토였습니다. 그곳은 마치 우리 나라 역사 안에서 평안도나 함경도와 같은 위치에 있는 땅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함경도와 평안도 땅이 우리 나라가 국외진출이 활발했다면 전초기지로서 괜찮은 대우를 받았겠지만, 많은 침략을 받은 우리 나라의 역사에 있어서는 버림받은 땅으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나라의 죄인들을 유배 보내는 곳으로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듯이 갈릴래아 땅도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북쪽 변방의 땅이었고, 외국 침략의 통로가 되는 곳이었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밖으로의 진출이 활발했다면 그곳이 번창하는 땅이 되었을 수 있었겠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약소국으로서의 역사가 대부분이었고, 또 다른 민족과 피를 섞이는 것을 꺼리고 접촉하기를 싫어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폐쇄성 때문에 그곳은 이스라엘 안에서도 버림받은 땅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제 1 독서는 이 천대받는 땅에 메시아의 빛이 비추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그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이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방의 땅 갈릴래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에언의 성취 이상의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금방 깨달았을 것입니다. 귀양살이하기 적당한 땅 갈릴래아, 하느님의 복음선포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는 것, 소외된 땅과 소외된 사람이 하느님께 더 이상 소외되지 않으며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을, 하느님의 돌보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버려진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활동을 시작했던 예수님은 당신의 첫 제자들을 바로 그 버림받은 땅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그 중에서 힘없는 계층의 사람인 어부 중에서 뽑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버림받은 사람만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는가? 물론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라는 예수님의 처음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이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다는 선언 그것입니다. 어느 사람에게는 죽는 것 보다 어려운 것이 '회개'일 수 있지만, 단지 마음만 바꾸기만 하면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은총의 소식,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제2독서는 이미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 구원받은 사람들이 어떠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가르침을 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 고린토 교회는 파당싸움 때문에 시끄러웠던 모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이 파당을 지어서 싸움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갈라져서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로 고린토 신자들을 질책합니다. 그들이 믿어야 할 것은 바오로도 아니고 베드로도 아니고 아폴로도 아니고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바로 소외된 사람들을, 소외된 땅을 끌어안는 분이라는 점인 것이고 그래서 소외라는 것을 철폐하려고 하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데, 오히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따돌리고 소외시키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하는 것을 우리는 오늘 복음과 연관시켜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선 지난 주에 주임 신부님께서 하신 우리 본당의 재정보고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올해는 우리 본당의 오랜 숙원이었던 성전 보수공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경제도 어려운 때에 이 어려운 공사를 하게 되어서 올해 모든 신자분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려움은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끝나는 법이지만 그 어려움 때문에 마음이 갈라져서 상처를 남기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있는 형제 자매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엊그제 살레시오 피정회관에서 피정을 하던 우리 본당 중고등부 학생들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다른 본당 학생들과 연합해서 피정을 하는데도 마치 한 본당에서 온 친구들처럼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흐믓했는지 모릅니다. 그곳에서 피정을 지도하시는 신부님, 수사님들, 수녀님들도 서로들 너무 잘 어울리니까 어느 본당에서 온 학생들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학생들을 가르치고 기르신 분들이니 그 이상의 것도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더 나아가 위기를 통하여 우리 본당 교우들끼리의 끈끈한 정을 키울 수 있는 기회로 가꾸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 한 가지 오늘 복음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지는 아마 몰랐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기잡는 그물과 배를 버려 두면서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주저없이 따르는 그들의 모습은 굉장하다고, 훌륭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물을 버려 두었던 그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정성을 기꺼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형제 자매와의 화목을 위해서, 하느님의 집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기꺼이 봉헌줄 아는 사람들은 진정 아름다운 사람들이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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