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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루도비코의 중국식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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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식 [219.251.99.*]

2007-03-27 ㅣ No.5198

누수 또는 루수는 루도비코 성인의 중국식 한자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베네딕토를 분도 프란치스코를 방지거 하는 식으로 부르던 루도비코 성인이 바로 루수입니다. 축일이 2월이라면 2월 6일의 성인 중에 루도비코 성인이 아래와 같이 나와 있습니다. 참고하시시 바랍니다.


루도비코 이바라키(Louis Ibaraki)

축일 2월 6일 

신분 순교자 

활동연도 1585-1597년 

같은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성 루도비쿠스 이바라키(Ludovicus Ibaraki, 또는 루도비코)는 성 레오 카라수마루(Leo Karasumaru)와 성 바오로 이바라키(Paulus Ibaraki)의 조카이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의 복사로서 활동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만일 위의 성인이 아니라면 혹시 조선시대에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던 아래의 성인이 질문하신 분의 주보성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본당 사무실에서  교적을 열람해 보시면 관련된 축일이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축일을 기준으로 추적해 나가는 것이 빠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볼리외 베르나르도(Beaulieu Bernard)

축일 9월 20일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40-1866년 

같은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코,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버나드, 베르나르두스 

 

성 베르나르 루이 볼리외(Bernard Louis Beaulieu) 신부의 세례명은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또는 베르나르도)이고, 한국명은 서몰례(徐沒禮)이다. 그는 1840년 10월 8일 프랑스 보르도(Bordeaux) 교구의 랑공(Langon)에서 베르나르와 마리 데지레(Marie Desiree)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은 결혼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모친은 아들을 낳자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그는 여섯 살 되던 해에 공민학교에 들어갔고, 일곱 살부터 복사를 하였으며, 아홉 살이 되던 1849년 10월에 고향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에 그는 중국 사천(四川)에서 전교한 경험이 있는 한 선교사 신부로부터 중국의 사정을 듣고는 동양 전교에 대한 열망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57년에 보르도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에 모친을 여읜 후 전교를 향한 그의 마음은 더욱 열렬해졌다. 그러나 그는 교회법상의 연령 미달로 사제 서품을 받지 못하였으며, 보르도 교구의 교구장인 대주교는 누구든지 교구를 떠나지 않도록 종용하고 있다가 뜻밖으로 그에게 전교를 위한 출국의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곧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1864년 5월 21일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6월 15일에 조선의 전교 신부로 임명되었다. 1864년 7월 15일에 프랑스 파리(Paris)를 출발한 볼리외 신부는 도리(Dorie, 金) 신부,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위앵(Huin, 閔) 신부와 함께 1865년 5월 27일 조선의 내포 지방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미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조전 교우들의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그는 경기도 광주 지방에 있는 뫼논리(현 경기도 성남시 운중동의 山畓里)라는 교우촌에서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는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장제철이라는 교우 집에서 조선말을 열심히 공부했다. “이토록 잘 전교할 수 있는 지방에 오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라고 행복하게 말했으며, 고해성사를 들을 정도로 한국말에도 능숙해졌다. 이때 배교자인 이선이가 뫼논리에 볼리외 신부가 살고 있다고 실토하였기 때문에 그는 장제철의 집을 떠나 광주 산답리 이 요셉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베르뇌 주교가 볼리외 신부의 조선말 실력과 열심함을 감안하여 충청도 지방으로 그의 임지를 정해 주려고 하던 참에, 그는 임지에 가보기도 전에 처음에 기거했던 집 주인 장제철과 이선이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마침내 1866년 2월 27일에 도리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 다음날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바로 연행된 후 곧바로 심문을 받았다. 이리하여 볼리외 신부는 마침내 베르뇌 주교와 도리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 신부 등 동료들과 함께 새남터의 형장에서 희광이의 세 번째의 칼을 맞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이때가 1866년 3월 7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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