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배티 성지 순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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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태 성지의 입구에 들어서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이 있고 그 옆으로 14처가 세워진 오솔길이 보인다.
14처는 모두 연자방아 맷돌에 새겨져있다.
14처가 끝나는곳에 나무 밑둥을 잘라 만든 야외성당이 있고 그 산기슭에 성모마리아상이 서 있다.
이곳 산골짜기에 천주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한국천주교회사>를 보면 신유박해때 순교한 충남 결성현 덕머리 출신인 원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진천의 질마로라는 곳으로 피신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유박해 이후 순교한 남인 양반들의 가족과 몰락한 양반들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박해가 그치자 신자들이 다시 모여 새 복음의 터전을 일궜으리라 여겨진다.
기록을 보면 이 시기에 공소로 설정된 교우촌은 배티, 용진골, 새울, 그 중에서 배티공소는 1890년 이래 교리신학교가 개설된 중심지였다.
그 후 생활터전을 마련한 신자들이 하나 둘씩 떠남으로써 현재 신자들은 별로 많지않다.
무엇보다도 최양업 신부의 고귀한 업적이 일구어진 터전이고
기도서 <천주성교공과>를 번역하고 순교자의 기록을 정리한 것도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최양업 신부가 활동하던 시기는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등 세 차례에 걸쳐 큰 박해를 겪은 뒤라 신자들의 교리지식은 거의 백지에 가까웠다. 성직자와 전교회장 등 지도자급 인물들이 모두 순교한 뒤였기에 신앙생활 또한 온전치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신앙의 자유도 없었고 드러내 놓고 집회를 갖기도 어려운 상황에 종교행사 또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치러야했던 때였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최양업 신부는 짧은 시간에 많은 신자들에게 기본 교리를 알수있게 가사체로 만들었다.
최양엽 신부의<천주가사>는 모두 19편으로 되어있고 이 천주가사를 곡조에 맞추어 노래한 것은 1900년대 부터이고 성가에 본격적으로 도입된것은 1920년경이었다.
천주가사가 서구적 그리스도 사상을 우리나라 사람의 전통사상과 의식구조에 토착화한 작품으로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국문학사에도 크게 이바지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곳 배티에서 이런 업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귀한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