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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 [pentagon] 쪽지 캡슐

2000-01-18 ㅣ No.454

할아버지의 유품..

벚꽃이 지던 그날,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나는 하얀 봉투를 발견하곤 왈칵 눈물을 쏟았다.

 

부모님이 이혼하는 바람에 나와 내 동생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했다.

 

할아버지가 국수를 뽑아 생계를 유지했지만 생활이 어려워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는 돈도 벌 수 있는 산업체 야간학교를 택했다.

 

학교에 입학하여 첫 월급을 타던 날,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 봉투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할머니는 대견하시다며 연신 눈물을 찍어 내셨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천 원짜리 육십 장을 천천히 세어본 뒤, 귀가 접힌 돈과 앞뒤가 뒤집힌 돈을 차례차례 귀를 펴고 맞춰서 툭툭 다독이셨다.

 

그 동작이 어찌나 느리던지 할아버지 앞에서 한 달 용돈을 기다리던 나는 답답하기만 했다.

 

할머니는 애가 고생하면서 번 돈이니 마음대로 쓰라고 하셨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할머니를 호되게 야단치고 달랑 천 원짜리 세 장을 내미셨다.

 

나는 속으로 ’내 돈인데...’하며 뾰로통해졌다.

 

월급봉투를 서랍에 집어넣는 할아버지가 너무 야속해서 그날 밤 나는 그대로 회사 기숙사로 돌아와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매번 할아버지 앞에서 삼 천원을 타기 위해 기다린 지루함이 먼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책상 서랍 한쪽에서 가지런히 귀가 맞추어진 지폐 몇 장이 든 돈봉투와 스물일곱 장의 월급봉투, 그리고 내 이름으로 된 저금통장을 발견한 것이었다.

 

한번도 ’수고했다’는 말씀이 없었던 할아버지셨지만 월급봉투 한 장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깨끗이 보관한 것으로 보아 나를 얼마나 대견하게 생각하셨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 이름 석 자가 또렷이 박힌 월급봉투를 안고 나는 한참이나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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