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계동성당 자유게시판 : 붓가는대로 마우스 가는대로 적어보세요

병원 24시

인쇄

장동린 [dlchang] 쪽지 캡슐

2006-01-20 ㅣ No.4707

 

매주 일요일 밤에 방영되는 KBS TV프로그램 중에 ‘병원24시’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종합병원에서 시행하는 특이한 시술내용과함께


환자 및 의사들에 연출되지않은 자연스러운 일상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에 방송되었기 때문에 자주


보지는 못하였으나 아마 가을철 방송시간이 개편되었는지 지난 주에는


그리 늦지 않은 밤 11시에 방영되었다.


‘간이식 시술’에 대한 내용이었다.




평범한 삶을 살아온 영상속의 아버지는 간경화 환자이며 수혜자는


17곱살 아들이었고, 간이식을 위하여 함께 입원하고 있었다.


PD가 아들에게 수술을 앞둔 심정을 물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신체 중 일부를 아버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도리가 아니냐고 되묻는 열일곱 소년의 단호한 언조가 대견스러웠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자연스럽게 답변하였음에도 그가 남달라 보였던 것은


혼탁하게 변하고 있는 세파 속에서 몰지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과 비교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는 게 바빠서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에 소월 하였던 그의 아버지는


우리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시민적 삶을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수술 전 날 그의 병실에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아들이 찾아왔다.


몸 성한 아들이 환자인 아버지를 만나러 온 것이다


만약에 수술이 잘 못 되었을 경우, 아버지와 함께하는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모를 불안감을 감추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던 그가 병실 빈 침대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항상 베푸는 일에 만 익숙해 있던 아버지는 이제 아들의


소중한 간의 일부를 자신의 몸에 이식시켜야 생명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 방법이외는 달리 손을 써 볼 방도를 찾을 수 없는 현실에 접한


자신에 대하여 몹시 화가 나 있었고,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그의 눈은


초점을 잃어가고 있는 듯 보였다. 그의 곁에서 잠을 청하던 아들이 몸을 돌려 눕자


비로소 그의 눈에서 그동안 참아왔던 굵은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려 그의


낮은 베겟닛을 적시고 있었다.




가끔 성직자의 성스러운 모습에 버금갈 정도로 의사들이 존경스럽게


보일 때가 있다.  이러한 장기이식 시술은 환자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이라기보다 새로운 인생을 탄생시키는 일로 여겨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의료분쟁으로 밥그릇 싸움을 하며 투쟁을 벌였던 의사들의 부정적인


모습이 그들의 진정한 실체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석한


두뇌로 과중한 업무 속에 연마한 어려운 의술의 가치를 금전으로 보상


받고자했던 욕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하게 주장할 수 있었던


그들의 권리였으리라.....


환자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그들 역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좋은


환경을 베풀어 주었던 자신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할 책임에 수반되는 경제력이 필요했을 터이니까...


10시간이 넘는 사투에 가까운 수술이 끝났다.


수술을 끝낸 그들은  전신 마취가 풀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서로를 걱정하고 있었다. 일상의 삶이 힘겨운 투쟁으로 여겨졌던 생에


한 가운데에서 가족들과 가졌던 시간이 짧았던 만큼 그들로부터 멀어


졌던 아버지였으나 오히려 그들이 있어 그가 존재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찾아내고 있었다. 며칠 후 아버지보다 회복이 빠른 아들이


침대에 실려 그를 찾았다. 아들은 아버지를 향하여 밝게 웃었고


아버지는 병실에 누워 창 밖 침대에 누운 아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올렸던 손이 내려와 다시 힘겹게 들어 올리는 포물선에 가까운 모양


은 ‘v‘ 자를 그리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어느 봄날의 또렷한 기억들이 되살아 났다.


간암 2차 수술이 재발하셨던 나의 아버님께서는 병원에서 더 이상


입원이 허락되지 않아 퇴원을 하시어 집에서 시한부 삶을 기다리고


계셨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일을 자연의 이치로 이해하며


감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내 나이 열일곱 살 때의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되지 않아 몰핀 이외는 변변한 진통제가


없어 암세포 공격에 의한 고통을 환자의 의지로 이겨내야 했던 시절이었다.


결혼 날짜를 받아 놓았던 누이의 결혼식이 있었던 사흘 후에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떠나셨다. 누이 결혼식 날 나는 간병을 위해 혼자 아버지의 곁을 지켰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날이 내게 얼마나 소중했던 시간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그 당시의 나는 어린 자식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야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철부지였을 뿐만 아니라, 임종을 앞둔 아버지에게 조차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마음 소심한 아이었다. 고통을 인내하시던


아버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무것도 없어 난감했던 기억이 새롭다.


만약 그때에 지금처럼 의술이 발달하여 아버지의 아들인 형이나 내가 아버님께


간이식 시술의 수혜자가 될 수 있었다면,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내 곁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나의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계셨다면 나는 “세상과의 싸움에서 마지막에는 결국


나 혼자 일수밖에 없다”는 사춘기때 가졌던 어두운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있어


마음의 평화를 일찍 찾았을 것이다.


 

 

수술이 있은 한 달 후, 자신의 간을 60%나 잘라낸 아들은 목발에


몸을 의지한 채, 병실 앞에서 아버지와 면회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는


그를 부축하고있는 여자친구가 함께 있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깊은 병색에서 벗어나 빠른 회복을 보이고 있었다.


절망의 상황에서 살을 째는 아픔과 고통을 사랑으로  승화시킨 희열은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세상 속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족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차별성


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발의 아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옆에서 부축하고 있었던 크로즈업 된

 

그의 여자친구를 바라보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인연이 맺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질기고 끈끈한 관계는 오천년을 이어온 우리들의

 

역사 속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대대로 이어질 것이다.




48 1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