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소망은 나아갈 힘을 주지만 욕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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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07-04 ㅣ No.5062

 

 

소망은 나아갈 힘을 주지만

욕망은 삶을 지치게 한다

 

소망과 욕망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소망은 자비심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욕망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분명 다르다.

가끔 우리는 욕망을 숭고한 소망이나 이상으로 착각

하곤 한다. 어떤 사람은 좀더 평화로워지기 위해서

종종 욕망을 소망으로 둔갑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분명 다르다.

자비심과 사랑에 근원을 둔 소망은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지만, 욕망은 결국 삶을 지치게 한다.

싯다르타는 6년간의 금욕 수행 동안 많은 고난을

겪었다. 싯다르타의 소망은 깨달음을 얻은 자유인이

되어 주위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려주기

위해 그 고통이 무엇인지,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 어

떤 느낌인지 몸소 체험하고자 했다.

흔들리지 않는 소망은 그에게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었다. 이렇게 남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다는 소망을 우리는 보리심이라고 부른다.

혹은 사랑, 깨달음이라고 하기도 한다.

싯다르타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수행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보리심 속에서 싹튼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왜 하고 있는가?

욕망인가? 소망인가?

그 일을 하면서 당신의 보리심은 힘을 발휘하고 있는가?

흔히 우리는 일을 돈벌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행복해지려면 많은 돈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돈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 유일한 요소인가?

그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자긴의 마음을 잘 들여

다봐야 한다.

돈을 벌고자 하는 진정한 동기가 무엇인가?

잘 살펴보면 돈은 행ㅂ고이 아닌 다른 것들, 즉 고통

과 슬픔, 절망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런데도 당신은 왜 돈을 벌고자 하는 것인가?

자신의 의도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동기를 발견할 수

있다. 지금까지 당신은 한번도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기회를 갖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권력, 명예, 성욕, 부에 대한 욕망이 사회봉사

같은 공익적인 소망으로 둔갑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

많은 경우 책임감을 진정한 소망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내면 깊숙이 자리한 욕망을 찬찬히

들여다보라. 만약 당신 자신이 고통받고 있고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고통을 주고 있다면 당신의 욕망은 어떤 것

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많은 기업가들은 흔히 자신의 사업이 잘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일터를 갖게 될 것이고 환경도 보호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근거를 찾아서도

안 된다. 결국 욕망의 1차 피해자는 자신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근원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서는 깊이 들여다보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 동기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우리는 고통에 이르기도

하고 행복에 이르기도 한다.

긍정적인 동기는 당신을 건강과 행복으로 인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부정적인 동기는 당신뿐 아니라 당신 가족, 사회

에 많은 고통을 준다.

 

욕망이 지나치면 탐욕이 된다.

탐욕은 정신적인 것이며 그 근원은 무지와 몰이해다.

어떤 것을 가지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더 고통스러워지는 경우가 많다.

행복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권력이나 명예, 부의 모습으로는

오지 못한다.

붓다는 이를 <뼈다귀 쫓는 개>에 비유했다.

개한테는 살점이 하나 없는 뼈다귀를 던져줘도 열심히

쫓아가서 씹는다. 개는 뼈다귀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지만 여전히 뼈다귀에 매달린 채 절대 놓지 않는다.

욕망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이와 비슷하다.

욕망은 절대로 만족을 주지 않지만 우리는 언제나 욕망

을 쫓는다. 붓다는 또 횃불을 들고 바람 부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횃불에 손가락을 데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감각적인 욕망이 이와 같다.

감각적인 욕망은 행복을 가져오기는 커녕 당신은 태워

파괴할 것이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에 고통스러워하던 사람 눈에

마침 어떤 집이 보였다.

비어있는 집안엔 물이 한 병 있었다.

물을 맑아 보였지만 약간 붉은빛이 감돌았다.

갈증이 심했던 그는 망설임없이 물병을 들었다.

드런데 어디선가 "안 돼! 그 물에는 독이 들어있어!"

라는 경고의 말이 들렸다.

하지만 갈증을 참을 수 없었던 그는 그 물을 마시고는

죽어 버렸다.

 

그가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경고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물 대신 갈증을 달래줄 수 있는 대상은 무궁무진하다.

가끔씩 우리의 지성은 어떤 욕망의 대상을 취하면 위험

하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우리는 나중에 올 고통을 알면서도 순간의 욕망

을 참지 못한다. 붓다는 또 욕망을 <푸주간에서 한 조각

의 고기를 훔친 새>에 비유하기도 했다.

 

새 한마리가 푸줏간에서 고기 한 덩어리를 훔쳤다.

그 새는 고기덩어리를 입에 물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하지만 더 큰 새가 다가온다.

 

아마 작은 새가 고기를 내주지 않는다면 큰 새는 작은

새를 죽일 것이다.

이렇게 욕망의 대상을 좇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감각적인 욕망이나 쾌락을 통해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욕망의 저변에 무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무엇이 위험한지 어떤 고통을 가져올지 정확하게

안다면 이런 욕망을 금새 사그라질 것이다.

마치 사람들이 에이즈에 걸리면 죽는다는 것을 명확

히 알고 조심하는 것과 같다.

이해는 바른 행동의 근간이며, 무지는 그릇된 행동의

주범이다.

 

 

나는 늘 행복한 중이었다.

오래 전 내가 사미승이었을 때도 지금처럼 행복했다.

그때 나는 비구승이 되면 행복하리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사미승으로도 행복했느니까 말이다.

또한 파리 근교의 작은 목장에 몸담고 수행할 때도

행복했다. 사람은 많고 방은 비좁았지만 그래도 행복

했다.

플럼빌리지 같은 곳이 없어서 불행한 적은 없었다.

이미 그곳에는 행복의 모든 조건이 다 존재하고 있었

기 때문이다.

우리는 걷기 명상과 숨쉬기 명상을 할 수 있었고

주변엔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들꽃, 진리의 길을

함께 가는 형제자매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 작은 농장에서 평화와 기쁨이 나날이

커지고 내면이 충실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풍요로운 마음은 우리가 수행을 잘하면서

보리심을 돌보고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욕망에 결코 불들리지 않았다.

중으로서의 나의 소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가 된다거나, 유명한 불교학 교수가 된다거나,

큰 절의 주지가 되는 것은 내 소망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중으로서 나의 일은 무엇인가?

나는 보리심에 충실했다.

고통을 바꾸어 깊은 이해와 대자유, 진정한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의 소망은 나에게도 행복을 가져올 수 있고, 남에

게도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었다.

당신이 큰절의 주지라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을 것

이다. 당신이 서너 개의 학위를 가지고 있다면 역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 잠시다.

그것으로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도 행복을 키워

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수행을 통해 마음속에 깊은 이해와

자유와 사랑을 일궈놓았다면 사람들은 앞다퉈 당신을

찾을 것이다.

수행이 없다면 당신 안에 있는 보리심은 꽃피지 않는다.

당신 안에 보리심을 찾아라.

보리심은 당신의 삶이 욕망과 소망 중 어느 쪽에 가까

운지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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