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검정성당 자유 게시판

[옮긴글]맞아죽을 각오를 한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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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 [cornhead] 쪽지 캡슐

1999-06-09 ㅣ No.519

* 한국에 살고 있는 일본인 이케하라의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한국인 비판"이라는 책에 대해 재미 정신과 의사 이중오 교수가 쓴 글을 굿뉴스 자유게시판에 최성우 세자요한

신부님께서 옮겨 놓았는데 저희 세검정 본당 식구들과 함께 읽고 싶어 다시 퍼왔습니다....

 내용이 다소 길지만 끝까지 한 번 읽어보세요.  김태환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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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출판된 이케하라 마모루의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한국인 비판”은 지금까지 30만부가 팔려나가 올 들어 최대 판매부수를 기록한 베스트셀러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책의 출판을 통해 거액의 인세를 챙긴 데다 신문·방송을 통한 각종 인터뷰에 불려나갈 만큼 이름을 얻었다. 저자는 맞아죽기를 각오했으나 맞아죽기는커녕 우리 사회의 저명인사로 떠올랐던 것이다. 국무총리까지 이 책을 권장도서로 소개하기까지 이르렀다. 과연 이 책은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다음 글은 우리 사회의 ‘이케하라 신드롬’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글의 필자는 “이 책이 우리나라의 역사관과 정체성을 훼손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다”며 그같은 음모에 생각없이 말려든 지도자와, 부화뇌동하여 엽전의식의 열패감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일반인들 모두를 질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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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오 뉴욕주립대 의과대학 교수

 

내가 이케하라씨의 글을 처음 읽은 것은 한국으로 향하던 대한항공 기내에서였다. 그때 모월간지(“월간조선” 98년 10월호였던 것으로 기억된다)에 실린 그의 글이 내 눈을 붙잡았다. 아마도 도발적이고 선정적인 제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제목이 튀는 것들치고 변변한 글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 내가 그동안의 삶 속에서 확인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니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미 식상하리만큼 숱하게 지적되어온 한국의 약점들에 대한 반복되는 지적 이상은 아니었다.

 

 

 

다만 드물게 일본인으로서 그럴 수 있는 그의 용기만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나는 그의 이름은 물론 기사의 내용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이곳에 사는 나의 오랜 지우가 국내 일간지에 난 기사를 오려 보내 주었다. 그것은 한 책의 저자에 대한 거의 전면에 가까운 인터뷰 기사였는데 그 주인공의 얼굴도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이 바로 얼마 전에 읽은 그 글의 필자임을 확인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에 그가 한 권의 책을 쓰리라고 짐작할 수 없었고 더구나 그런 정도의 내용의 책이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흥미를 갖고 기사를 읽어 보았다. 그것을 통해 내가 알게 된 사실은 맞아죽기를 각오하고 그 책을 쓴 저자가 맞아죽기는커녕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는 유명인사로 부상했다는 것과, 일국의 총리가 나서서 공무원들에게 그 책을 단체로 구입해 읽게 했다는 웃지 못할 사실이었다. 그 책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느끼라는 것인가. 도대체 우리는 상식도 없는 국민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강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 책에서 비롯된 일련의 상황을 나는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우선 내 머리 속을 거리끼게 만들었던 것은 총리의 발언이었다. 비록 건성으로 읽기는 했지만 비행기 안에서 내가 읽은 그 책의 일부 내용은 아무리 우호적으로 봐주려 해도 문제가 있었다. 악의적인 그 무엇이 느껴졌는데 그런 책을 총리가 우리 국민들에게 많이 읽도록 권장했다는 사실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즉각 책을 주문했고, 책이 도착하자마자 만사 제쳐놓고 곧바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책 한권을 다 읽고 나는 숙제를 푼 것이 아니라 더 오리무중이 되어버렸다. 총리 발언의 진의에 대해서도 그렇고, 저자 이케하라씨의 ‘혼네’(本音·일본말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마음이라는 뜻, 편집자 주)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비행기 안에서는 일부를 너무 가볍게 읽었고, 내 사무실에서는 책 전부를 너무 심각하게 읽어 중도(中道)적 입장을 놓쳐버린 까닭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 반성도 해보았다. 어쨌든 행간과 여백까지 훑는 지나치게 심각한 책읽기가 나를 더 오리무중의 안개 속으로 빠뜨려 놓았는지는 모르겠다.

 

 

 

“저자와 싸우려는 게 아니다”

 

 

 

정신과 의사인 내가 어쩌면 격에 맞지 않는 이런 류의 글을 굳이 쓰려는 것은 이제 수수께끼가 되어버린 이 숙제를 여러 사람의 도움을 얻어 풀어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코 내 개인의 숙제만은 아닐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먼저 오리무중의 진원지인 이케하라씨의 책에서 시작해 보겠다. 이케하라씨에 대한 나의 판단부터 쓰자면 그는 자신의 모든 여건을 최대한 유리하게 활용하는 대단히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의 책 군데군데에서 그는 한국 사람을 머리좋다고 비아냥 반, 칭찬 반으로 치겨세우고 있는데 이케하라씨야말로 진짜 머리좋은 사람이다.

 

 

 

계산에 능한 것이 일본 사람이라지만 미묘한 여러 상황을 계산해 내고 그 상황에 적합한 언어들을 찾아 내는 그의 능력에는 확실히 범상치 않은 데가 있다. 그는 정직함의 효과를 계산하는 데 능통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 계산서에 요구되는 만큼의 정직을 가감없이 연기할 줄 알 만큼 영리한 사람이다.

 

그의 경력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그는 일본 사립 명문 와세다대 정치과를 졸업했고 일본의 일간지 스포츠 담당기자를 지냈다고 한다. 그후 어느 중의원의 비서를 지냈으며 그 자신도 중의원에 출마했다 내리 세번이나 낙선한 경험이 있다. 그후 어떤 이유로 한국에 줄을 대기 시작했고 지금은 일본과 한국을 안방에서 건넌방 가듯 드나들며 로비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올해 63세인 그는 일본인 처와 헤어져 살고 있으며 처와 자식은 일본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나 그 외의 형제들이나 어머니에 대한 얘기는 없다. 지금 혼자 살고 있는지 어떤지는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 한 인간의 언행은 어떤 형태로든 성장사의 맥락 안에서 좀더 투명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의 성장사에 대한 자료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정신세계를 분석하는 데 한계가 있겠으나 그가 정치에 입문했던 경력이 있으며 현재 로비스트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로비스트들은 일을 막후에서 추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대체로 ‘무엇이 진실인가’에 있지 않고 ‘무엇을 진실로 만들 것인가’에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덕규범들보다 정치술수로 무장한다. 만일 그들이 도덕이나 법 그리고 양심을 들고 나온다면 그것은 전략의 큰 그림 안에서 선택된 방편일 가능성이 많다.

 

 

 

권력층을 만나고 언론플레이로 여론을 환기시키거나 엉뚱하게 외곽을 때려 상대편 진영을 교란하기도 한다. 그들은 뒤에서 일을 추진하는 만큼, 연관된 인간들의 비리를 잘 알 뿐만 아니라 사태의 진실도 꿰뚫어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진실의 힘은 믿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이용할 뿐이다.

 

 

 

그들의 행위를 윤리적인 잣대로 재고 비난한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순진한 짓이다. 이제 로비는 경제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 장르로 자리잡았고, 미국의 경우 그것은 당당한 공식 직함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이케하라씨에게 도덕적이기를 요구하거나 윤리적 양심에 따라 행위해 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언행이 한국 전체에 연관되면서 심각하게 왜곡된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까지 로비스트의 특권으로 면책시켜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인터뷰 기사에서 마치 도전할 놈은 나오라는 식으로 “내 책에 대해 저놈의 쪽바리 ×× 하면서 논리적으로 대항하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며 자신의 논리에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저놈의 쪽바리 ××”라는 식의 감정을 앞세워 논리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니 무엇보다 이 책을 쓴 이케하라씨의 ‘논리’라는 말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이제 여러 증거를 대겠거니와 좌충우돌하는 그의 논지들은 짧은 글 안에서조차 논리적 일관성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논리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마 ‘일본식’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한데, 그렇다면 그 말은 다음과 같이 더 정직하게 표현해야 오해가 없을 것이다.

 

“내 책에 대해 ‘저놈의 쪽바리 새끼’하면서 일본식으로 대항하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한국의 아이들 중 형제끼리의 싸움에 칼을 내던지면서 ‘싸우려면 칼로 싸우라’는 부모 밑에 자라나는 아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한국에서 한국식으로 키워지는 아이들 중 일본에서 일본식으로 자라난 아이와 일본식으로 싸우고 싶어 하는 경우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문화상대주의’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대체로 그의 책에서 열거되는 선동적 구절들은 이런 식으로 영리하게 계산된, 그러나 실제로는 헛도는 뜻없는 말들로 채워져 있다.

 

 

 

나는 미국에서 31년째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이케하라씨!”하고 정중하게 부르고 시작하는 품위있는 싸움의 방식도 이제 제법 몸에 익힌 사람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 보듯 풍차와 싸워 이기는 것은 승리가 아니다. 싸움에서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상대를 눌러 이기는 법이 아니라 상대가 싸울 만한 존재냐 아니냐를 가리는 법이다. 나는 먼저 이 글을 싸우려고 쓰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려 한다.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앞에서도 밝혔듯 혼란스러워진 내 머리 속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다.

 

 

 

이 책을 공무원들에게 단체로 구입해 읽도록 권한 총리의 발언, 책 말미에 소개된 어느 장성의 편지, 책 뒤의 선전에 열거된 이런저런 이름들을 가진 명사들의 추천서 그리고 앞다퉈 이케하라씨 인터뷰를 내보내는 언론사들의 처사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렇게 말하면 내가 일본에 특별한 한을 품은 반일(反日) 인물쯤으로 지레짐작할 지 모르지만,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은 나는 한국인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편견 외에 일본에 대해 어떤 다른 감정도, 특별한 체험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연과학자로서 환갑을 갓 넘긴 나는 모든 현상을 가능하면 가치중립적으로 바라보도록 훈련받아 왔고 제자들도 그렇게 훈련시키고 있다.

 

 

 

“이케하라씨의 한국 사랑은 위선”

 

 

 

이케하라씨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은 무법천지이고 한국인은 염치가 없다. 질서는 개판이고 나라 꼴은 엉망이다.”

 

이 말이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숱한 사례를 들어 긍정할 수도 있지만 또 얼마든지 반대 사례를 들어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따질 수 있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말하느냐는 것에 관련된 ‘발언의 적합성’이다. 이런 류의 포괄적 명제들은 다음 세가지 경우에 적합성을 가질 수 있다.

 

 

 

첫째,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에 대해 이 말을 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그런 식의 지적을 했던 수많은 선각자들을 갖고 있다. 표현이야 조금씩 다르지만 내 짧은 역사지식을 동원해 근 1백년의 사례들만 들어본다 하더라도 정약용·안창호·신채호·이광수·함석헌 등이 그랬다.

 

 

 

특히 60년대 이후 많은 학자·교수·언론인들이 우리 한국인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 노력해왔다(김광일· 김상일· 김용옥· 김용운· 김재석· 김지하· 박정진· 백상창· 서희건· 윤사순· 윤태림· 이규태· 이부영· 이시형· 이어령· 이을호· 조두영· 최길성· 최민홍· 최봉영· 최종호· 최준식· 최재석· 천기언· 천이두· 한기언· 홍일식 등 너무나 많은 우리의 소장 학자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그들이 우리의 결점을 분석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조국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이케하라씨도 책 여러 군데에서 자신도 한국에 대한 사랑에서 그러노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그의 발언은 적합성을 갖는다. 이것이 적합성의 두번째 경우다. 즉, 외국 사람이 한국에 대한 애정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케하라씨는 한국을 사랑하는가? 그것은 그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사랑’은 키보드가 찍어내는 문자도 아니고, 입술이 만들어 내는 바람소리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대상에게 자신을 총체적으로 연관시키는 행위다.

 

 

 

이런 맥락에서 이케하라씨의 한국에 대한 사랑은 위선 이상이 아니다. 숱한 증거들 중 당장 떠오르는 한두개만 들어보자. 이케하라씨는 김치를 지독히 싫어한다고 했고, 마늘 냄새를 역겨워 한다고 했으며, 육개장을 먹어야 했을 때는 숨이 막히도록 고통스러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자신은 26년째 한국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한국말이 서투르고 한국 음식에 적응하지 못했노라고 말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보면 한사람의 발언의 진실을 점검하는 기준으로 채택할 수 있는 것은 당사자의 발언이 아니라 그 발언이 담보하는 행위들의 일관성이다.

 

 

 

가령 동물보호협회에서 “야생 동물을 보호하자”는 연설을 한 연사가 집에 들어가서는 불고기를 즐긴다면 그의 행위에는 일관성이 없다. 여기서 진실은 연설 자체의 논리적 일관성이 아니라 그가 보여주는 행위의 일관성에 의해 판정되어야 한다. 이케하라씨가 한국을 사랑하면서 마늘을 내켜하지 않을 수 있고, 한국을 그리워하면서 김치가 거슬릴 수 있다. 그러나 혐오할 수는 없다.

 

 

 

심리적으로 사랑이나 증오의 감정은 조준사격처럼 특정한 것에 대해 선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미적 감정이나 단순한 호기심과 달리 그것은 다른 감정, 상황의 다발들과 그물처럼 복잡하게 얽히면서 발현하게 된다. 이를테면 단 것을 싫어하는 남자가 한 여인을 진정 사랑하게 되면 그 여인이 좋아하는 초콜릿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을 사랑한다는 이케하라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국 말도 제대로 못하고 한국 음식도 못먹는 내가 26년 동안이나 한국 땅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그런 가슴 설레는 미래로 나아가는 데 조그만 버팀돌이나마 되고 싶기 때문이다.’(“맞아죽을 각오…”의 200쪽)

 

 

 

이 한 문장 안에서도 앞의 말과 뒤의 말은 모순된다. 개항기에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한국의 고유음식을 사심 없이 즐겼다. 그들은 정녕 한국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오직 키에르케고르를 읽기 위해 덴마크어를 배웠고, 러시아를 사랑했던 마르크스는 50이 넘어서도 러시아어를 익혔으며 러스킨을 존경했던 프로스트는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영어를 숙달해냈다. 한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문화, 즉 언어와 식생활에조차 적응하지 못하고(혹은 적응하려 하지 않고) 겉도는 이케하라씨. 그가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이 가슴 설레는 미래로 나아가는 데 조그만 버팀돌이나마 되고 싶다고 한다. 어느 삼척동자가 믿겠는가.

 

 

 

영리한 이케하라씨는 26년 동안 한국에 살았지만 한국 음식을 먹지 못할 뿐 아니라 싫어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정직함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태도로써 증명되는 것은 오히려 그가 전혀 정직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결국 한국을 사랑한다는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면 그의 발언은 적합성을 상실한다.

 

 

 

"누구 눈에는 똥만 보인다”

 

 

 

적합성의 세번째 경우는 그 외국인이 자기 동포들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전쟁의 당사자국 국민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늘 그런 식으로 말한다. 이것에 대해 시비를 걸 수는 없다. 만일 이케하라씨가 일본인들을 상대로 해서 그런 책을 썼더라면 매우 섭섭하기야 하겠지만 내가 이렇게 글을 쓰면서 반박할 이유는 없다. 어떤 사람이 형편없더라고 집안에서 흉보는 것까지 그 집에 가서 따지는 것은 사리에 적합하지 않은 일인 까닭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형태변환(Gestalt switch)을 설명할 때 흔히 이용되는 그림이 있다. 그림의 윤곽선을 기준으로, 바깥으로 형태를 구성하면 두 사람이 마주 보는 그림이 되고 윤곽선 안으로 형태를 구성하면 부드러운 곡선의 도자기 주전자가 되는 그림이다. 사람이 형태(Figure)로 인식될 때 도자기는 지대(Ground)로 물러서고, 도자기가 형태로 인식될 때에는 사람이 지대로 후퇴한다. 이 형태변환이 주는 교훈은 단순하면서도 심원하다. 이것은 결국 동일한 대상을 두고도 사람이 어떤 시각·심리·의식·정서를 지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음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형태변환은 대개 정신의 능력에 비례해서 유연하게 수행된다. 균형감각을 갖춘 우수한 지능일수록 쉽게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반면, 낮은 지능의 소유자일수록 힘들어 한다. 정신과적 도움이 필요한 경우란 변환이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자주 일어나거나 변환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두가지 경우다(조울증·편집증).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케하라씨는 정신과의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도대체 형태전환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한국인에 대해 오직 부정적으로 드리워진 음영의 모습만을 보도록 고정된 시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리한 사람이 도대체 왜 이 분야에서는 먹통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심리세계가 매우 복잡한 굴곡과 층위를 지닌 콤플렉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복잡하게 논의할 여유가 없으니 간단한 논리로 상식선에서 접근해 보기로 하자.

 

 

 

그의 책에는 콤플렉스를 은폐하기 위해 자기 존재에 대해 과장된 아이덴티티를 번지르르하게 내거는 사례와 표현들이 곳곳에 보인다. 가령 장·차관이 자신의 친구이고, 내로라 하는 백화점 사장이 자신에게 뭔가를 호소하기도 하며, 육개장을 어느 시장과 함께 먹었으며,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배우가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자고 했으며, 경찰서장이 자기 친구이고, 법망에 재수 없이 걸린 사람들 중에는 자신에게 호소하여 빼달라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이며, 기업의 회장들조차 골프 부킹이 안되면 자신에게 부탁한다는 등…. 또 자신은 1년에 1천번이나 술을 마셨던 적이 있는 사람이며, 골프는 1년에 1백50일 넘게, 즉 하루 걸러 하루씩 치는 사람이라는 등 마치 행랑채에서 졸부로 신분이 수직상승한 사람이 수다스럽게 늘어놓고 있음직한 그의 얘기들을 듣노라면 그의 콤플렉스가 만만한 두께의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인격이 덜 성숙한 열등의식의 소유자들이 항용 보여주는 이러한 아이덴티티 부풀리기가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게 직접 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그도 어디선가 지적했듯 그것이 상대를 사정없이 깎아내리는 ‘칼’로 쓰인다면 그건 곤란한 일이다.

 

 

 

맞아죽기를 각오했다면서 왜 그렇게 비겁한가

 

 

 

이케하라씨가 쓴 책이 남길 파장은 생각보다 클 것으로 예측된다. 총리가 추천했고 또 매스컴이 덩달아 장단을 맞춰줬으니 말이다. 행간을 읽지 못하는 독자들은 이케하라씨가 그려 놓은 그림이 한국인과 한국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레 믿어버린 나머지 자기비하, 자기모멸감에 빠져들거나 아니면 자신만은 동류가 아니라며 동일화를 거부하려 들 지도 모른다.

 

 

 

나는 미국에서 31년째 살고 있다. 특히 정신과 의사로서 나는 이 나라의 그늘진 단면들, 그 속에서 생겨나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치부들을 너무도 많이 보게 되는 일과들로 그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내가 그것들을 글로 쓸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이 미국이라는 다원화된 거대한 사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진실들을 왜곡시키지 않으리라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라는 무법천지이고 국민은 염치가 없다”는 저 무책임한 발언이 단지 머리말에 적은 몇마디 안전장치로 다 무마될 수 있을까. 도서관에서 이 밤도 책과 싸우고 있는 청소년·대학생·학자들은 오직 입시와 영달만을 위해서일 뿐이고, 힘든 조건 속에서도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형광등 아래서 일하는 저 수많은 노동자들의 노동은 염치없는 무질서와 가족이기주의의 표현일 뿐인가.

 

 

 

책의 어디선가 이케하라씨는 서울의 어느 가라오케에서는 한국인을 출입금지시키는 곳이 있다고 소개하고, 마이크를 한번 잡으면 안놓는 한국인이니 주인이 오죽했으면 그러겠느냐고 장단을 맞추어 준다. 정말 이 땅이 마이크를 한번 잡으면 안놓는 동족들을 돈벌이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출입금지시키는 장사꾼들만 사는 나라라면, 그리고 일본에 줄대기 위해 형님 소리를 연방 해대면서 아첨을 떠는 거간꾼들만 있는 나라라면, 재수 옴 붙어 경찰에 걸렸을 때 오죽 호소할 곳이 없어 일본인 ‘빽’을 이용해 모면하려는 얼치기들만 사는 나라라면, 부킹의 우선권은 일본인 브로커에게만 특전적으로 주는 골프장 관리자들만 사는 나라라면 그런 브로커에게 손바닥 비비며 부킹을 부탁하는 기업인들만 사는 나라라면 이케하라씨의 말은 백번 옳다.

 

 

 

그러나 사람은 아는 만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됨됨이 만큼 볼 수 있게 마련이다. 개 눈에 똥만 보이는 것은 개가 바로 개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 나라가 한 일본인 브로커에게 빌붙어 떡고물이나 얻어먹으려는 그런 양아치들만 사는 나라이던가.

 

 

 

나는 이곳 교민들의 경우에 비한다면 한국 나들이가 잦은 편에 속한다.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야말로 조국의 다이내믹한 변신이었다. 빌딩·아파트·백화점이 솟고 고가도로가 생기는 등 산업의 외형뿐 아니라 서비스나 질서의식도 이전에 비하면 눈에 띄게 달라져가고 있었다.

 

특히 88올림픽을 전후한 한국의 변화상은 내가 한민족의 후예라는 것이 자랑스러울 만큼 눈부신 것이었다. 그런데 이케하라씨는 어찌 그리 똥만 보는 비상한 재주를 가졌던가.

 

 

 

프로이트에 따르면 감각은 식별과정에서 잠재의식의 간섭을 받는다. 흔히 ‘실수’라고 부르는 일상의 경험은 그 결과로 생겨나게 된다. 가령 싫어하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자주 잊어버린다든가, 그것을 적은 수첩을 잃어버린다든가, 심지어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전혀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실수의 다양한 사례들을 심리상태에 의해 간섭받은 인식행위의 결과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이 옳다면 다시 한번 이케하라씨의 정신세계는 그의 말과는 달리 이 나라에 대한 원한과 증오에 가득 차 있다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이케하라씨는 책의 마지막 두세 페이지를 ‘그래도 한국의 미래가 밝은 이유’라는 장으로 마무리짓고 있었다. 그 앞에서 한국과 일본의 차이는 1백년이고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것이라는 지극히 절망적인 선언을 해놓은 뒤라 아마 뭔가 한마디쯤 해두어야 한다는 강박을 느껴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미래가 밝은 이유 세가지, 즉 머리가 좋다, 정이 많다, 뭐든 빨리 해치운다 등은 앞에서는 잔꾀요, 숨겨진 이기심이요,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나라가 이 꼴이고 국민이 이 모양이 된 원인들로 사정없이 몰아붙였던 요인들이었다. 이제와서 난데없이 이것들 때문에 또 나라의 앞날이 밝다니…. 이건 또 무슨 말장난인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도 내가 다시 한번 답답함을 느꼈던 것은 그가 여기서조차 똥만 보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는 끝까지 저자로서 보여주어야 할 최소한의 정직성조차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맞아죽기를 각오했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비겁한가.

 

 

 

“맞아죽지 않는 한 그는 떠나지 않을 것”

 

 

 

똥으로 가득 찬 이 나라에 대한 탄식을 잔뜩 늘어놓고서는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나 될 지는 모르지만 당분간은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다. 사실은 나 자신도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음식도 안맞고, 말도 익숙하지 않고, 더욱이 속에서 천불이 올라오는 일이 펑펑 터지는 나라를 왜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마음만 먹으면 오늘 당장이라도 보따리를 쌀 수 있다…. 그런데도 가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나도 궁금하다.’

 

 

 

이제 정신과 의사인 내가 그에게 그 자신도 궁금하다는 그 이유를 들려주겠다. 물론 그러기 위한 내 여건은 좋은 게 아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나에게는 그의 성장사에 대한 자료도 없고, 더욱이 그를 임상에서 만난 적도 없다. 그러나 내 임상경험을 동원해 억지로 유추해 보면 그의 멘탈리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그림이 그려진다. 신문기자 출신이요, 의원 비서 출신이면서 권력지향적이었던 그가 의원직까지 넘보다 내리 세번이나 낙선한 뒤 어떤 이유로 한국 땅을 밟았다.

 

 

 

처음에는 반일감정이 두려워 언행을 조심하고 숨죽여 지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반일감정이 종이호랑이만도 못한 허구였다. 없는 데서는 왜놈, 쪽바리, 어쩌구 저쩌구하며 목에 핏대를 세우지만 면전에서는 형님이라고 치켜세워 준다. 일본에 줄을 대서 어떻게 해 보려는 사회 지도층이나 권력층이 다투어 꽃을 보낸다. 무서워 보이던 것이 알고 보니 아주 만만한 것이었다.

 

 

 

옳거니. 이제 부친이 죽기 전에 한국에 가 보고 싶다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얼마나 좋으냐. 보라. 한낱 패잔병에 불과한 나를 이 한국인들은 무슨 저명인사처럼 환대해 주고 있지 않느냐. 여기를 두고 무엇 때문에 나를 세번이나 미역국 먹인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냐. 한국민들은 똑똑한 척하지만 어리석다. 고집이 센 것 같아도 정이 많다.

 

 

 

강단이 있는 것 같아 보이나 사실은 고분고분하고 지식은 많지만 지혜가 없고 머리는 좋으나 잔꾀에 불과한 이 종족, 그 중에서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일본에 줄을 대서 떡고물이나 얻어먹을까 하고 내 집 문전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왜 내가 이런 지상낙원을 버리고 떠날 수 있겠는가. 내가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그의 26년은 그런 식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이제 그는 “때려죽일 놈은 나오라”고 방약무도하게 외칠 수 있는 간 큰 일본인 로비스트로 떠오른 것이다. 결국 그의 용기, 애정이 아니라 그의 권력지향적 야심, 실리를 정확히 계산하는 영리함, 이것이 그를 26년이나 한국에 붙잡아놓은 단서일 것이다. 예측컨대 맞아죽지 않는 한 그는 앞으로도 한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개도둑 수법’의 이케하라식 글쓰기

 

 

 

그 앞에서 형님이라고 부르며 굽실거리는 한국인의 행렬은 그치지 않을 것이고 총리조차 이 책의 선전에 앞장서 주는 마당이니 힘깨나 쓰는 권력층은 자신을 위해 더 튼튼한 바람막이가 되어 줄 것이다. 회장·사장 등 내로라 하는 재력가들이 줄을 대보려고 늘어선 줄도 당분간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을 건넌방 드나들듯 하는 로비스트로 남아 있는 동안은 ‘하늘의 별따기’라는 주말의 골프 부킹을 손바닥 뒤집기처럼 해낼 수 있는 특권은 계속될 것이고, 허울만 좋고 힘없는 명사들에게 그 떡고물을 나눠 줄 빽에서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재수 옴 붙어 경찰에 걸려든 조무래기들을 빼주는 힘에도 금 갈 일이 당분간 없을 것이다. 왜 내 발로 이 천국을 떠난다는 말인가.

 

 

 

이케하라씨, 맞는가? 그러나 나는 당신이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의 문제는 그러한 이중성이다. 알고 있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알고 있다고 하는, 갑(甲)을 말하면서 을(乙)을 말하고 을을 말하면서 갑을 말하는 그 이중성.

 

 

 

개도둑들이 흔히 쓰는 방법은 뼈다귀를 한개 던져주어 열심히 개가 그것을 빨고 있는 동안 뒤에서 올가미를 던져 끌고가는 것이다. 종잡을 수 없는 논리 속에서도 이케하라씨가 비교적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앞에서 뼈다귀 던져주고 뒤에서 올가미 던지는 식’의 그의 글쓰기다. 책 어디쯤에 보면 한글의 우수성을 슬쩍 언급하다 느닷없이 어느 백화점 앞에서의 택시잡기,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나라 전체의 무질서에 대한 논의로 넘어간다. 논리적으로 한글의 우수성과 총체적 질서 부재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둘 사이에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뼈다귀와 올가미의 논리적 관계밖에 없다. 내 판단으로 그의 글쓰기를 지탱하고 있는 틀은 이것뿐이다.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 사례 몇가지를 더 살펴보자. 그는 한국에 온 초창기에 5억엔을 어느 한국인에게 맡겼다가 사기당한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소개하는 그의 글쓰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때 내가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했는지 모른다. 돈을 잃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나의 부주의가 멀쩡한 사람을 사기꾼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5억엔의 돈이 아까워 땅을 치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땅을 치는 사람에게서 감동받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어디선가는 또 존경받는 이 나라의 일류 배우가 자기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려는 것을 말리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만일 이 한국의 명사가 ‘쪽발이’인 자기에게 형님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면 한국인들이 얼마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겠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가상한 마음씀인가.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자존심의 상처까지 살뜰히 살펴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또 이케하라씨는 전셋집밖에 가진 것이 없는 자기가 기사 딸린 자가용을 쓸 수밖에 없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만일 전철이나 버스를 탔다고 했을 때 내가 일본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같이 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쾌하게 생각할까. 몰라서 망정이지 안다면 모두 내려버리려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내가 버스나 전철을 안타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이 모든 세심한 배려들은 얼핏 읽으면 눈물이 솟을 만큼 감동적이다. 적어도 이런 말들은 타인을, 혹은 우리 국민정서를 우리 자신보다 더 깊이 고려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느낌 속에 가라앉아 있다가는 뼈다귀 빨다 올가미 받는 개 꼴이 되고 만다.

 

 

 

보라. 그 감동의 마음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희한한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너희가 의리가 있다니 무슨 말라 비틀어진 의리냐. 너희가 유난히 고향을 사랑하고 인정이 많은 듯 보이는 것은 위험이 닥쳤을 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기 위해 비빌 언덕을 미리 준비해 두기 위해서가 아니냐. 너희 가정교육이 어디 사람 기르는 교육이냐, 망나니 기르는 교육이지. 이 나라 정부가 정부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느냐. 세계화, 국제화를 외치기 전에 공주병이나 과대망상에서부터 깨어나라. 너희가 일본을 특별히 미워하는 것은 잘 사는 게 배 아파서 그런 게 아니냐.

 

 

 

이런 이케하라씨의 말들이 먹혀들어가 총리가 나서고 매스컴이 법석을 떨며 명사들이 설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케하라식 글쓰기에 현혹되어 그 뼈다귀 맛에 홀려서 올가미를 잠시 잊어서인가. 우리는 뼈다귀를 뼈다귀로 보아야 하고 뒤로 던져지는 올가미를 조심해야 한다. 그의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이런 패턴으로 시종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가 정말 5억엔을 사기해간 사람이 자기 때문에 사기꾼이 되었다고 가슴 치는 게 사실이라면, 기사 딸린 자가용을 타는 게 오로지 일본인이 같이 타고 있다는 이유로 불쾌감을 느낄 시민들을 위해서라는 게 진실이라면, 한국의 자존심인 어느 유명 배우더러 자신에게 형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한 것이 진정 한국민들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면 어떻게 이제 와서 26년의 세월 동안 이 땅에 살았노라고 전 한국민들을 상대로 자랑스럽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정말 그가 한국 ‘딴따라’의 자존심이 아니라 진정한 우리 겨레의 자존심을 생각한다면 어째서 독립선언서 서명자에게 세번이나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그토록 자랑스럽게 털어놓음으로써 말만의 자존심이 아닌 속살 깊은 곳에 있는 우리의 자존심을 그렇게 뭉개놓아야 하는가. 또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오히려 이 나라는 무법천지고 국민들은 염치 없고 질서는 개판이라고 떠들고 다니며 텔레비전이나 신문의 인터뷰에서는 논리적으로 싸울 놈은 나오라고 큰소리칠 수 있을까. 이 일련의 행동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이렇게라도 해야 정말 맞아죽을 것 같아서? 그래서 속죄할 수 있을 것 같아서인가.  

 

 

 

“부산에 가고 싶다”는 아버지 유언

 

 

 

아무튼 이케하라씨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가족관계 특히 부모와의 관계, 그 중에서도 현실에 존재하는 검열과 규율의 슈퍼에고라고 말할 수 있는 부친과의 관계는 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학파에 따라서는 환자 혹은 피분석자와 그 아버지의 관계를 지나치리만큼 세밀하게 연구해 들어가기도 한다.

 

 

 

책에 따르면 이케하라씨의 부친은 일제시대에 부산상고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자식 형제가 다투면 칼 두자루를 들고 와서 차라리 싸우려거든 칼로 싸우라고 할 만큼 엄격하고 확실한 사람이었다. 죽을 때 재산도 자선단체에 몽땅 기부하고 자식들한테는 물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 부친이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스포츠 기자로 열심히 뛰고 있는 자식에게 “내가 조만간에 죽을 터이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이케하라씨는 이 아버지의 소원에 따라 좋은 직장을 때려치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석달 후에 건강하던 부친이 갑자기 60세의 나이로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유언처럼 남긴 말이 “부산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후 이케하라씨는 어느 중의원 비서로 들어갔고 또 나중에는 자신이 스스로 중의원에 출마했다가 세번이나 고배를 마시는 등의 인생유전 끝에 한국으로 오게 된다.

 

 

 

“그 무렵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남긴 말씀과 함께. 그래서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이 무작정 한국에 와서 부산으로 갔다. 아버지가 졸업한 부산상고 교정에도 가보았다. 거기에 아버지의 흔적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때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무언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일 이런 진술들이 정직한 것이라면 이케하라씨의 의식은 그의 부친의 아이덴티티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의 부친은 죽기 전에 부산에 가보고 싶어했다. 왜 그랬을까. 피상적으로만 생각하면 그저 젊은 날의 향수 때문이고, 그것을 풀기 위해 그랬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할 것 같다. 그러나 임종의 장소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단순한 회고의 정서를 넘어서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그의 부친은 왜 자신의 고향도, 조국도 아닌 옛 식민지 부산에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는가.

 

 

 

한 인간이 특정한 장소에 집착하는 이유는 두가지 뿐이다. 하나는 거기서 즐기던 특권을 재현하려 하거나, 다른 하나는 맺힌 한을 푼다거나 하는 것이다. 양자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은 전자에서는 시간의 중점이 과거에 있다면 후자에서는 현재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케하라씨의 부친은 어느 쪽이었을까. 그가 풀어야 할 한이 있던가.

 

 

 

즐기던 특권을 재현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그가 돌아가려 했던 부산은 어떤 곳인가. 물론 그곳은 현재 부산광역시를 말하지 않는다. 그가 식민 종주국 국민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남김없이 누리며 군림하던 그 시절의 부산이다. 그곳에 이케하라씨가 갔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무작정 간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내 분석이 옳다면 그는 고인이 된 부친과의 긴밀한 동일화 과정에서 그곳으로 가고 싶어하는 깊은 열망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드디어 부산에 당도한 이케하라씨는 말한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무언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느낌’이 결코 단순할 수 없는 까닭은 그의 아이덴티티가 부친의 그것과 동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그후 26년 동안 그 느낌을 실천에 옮기며 한국에서 지내고 있다. 책 전체를 통해 그가 해야 한다고 느꼈던 무언가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상세히 밝히고 있지 않다.

 

 

 

자신의 말로 현재 로비스트로 활약하고 있다고 하지만 맥락이 애매하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케하라씨가 그의 부친이 그 옛날 식민지에서 누렸던 그런 특권들을 고스란히 누리며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식민시대의 훌륭한 귀환이 아닌가.

 

 

 

우리가 아는 대로 조용필을 슈퍼스타로 만든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에서 먼저 히트하고 국내로 역수입된 가요다. 그런데 왜 그 노래가 그때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그토록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던가. 내가 존경하는 정경모씨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 식민주의자들의 뿌리깊은 열망이 담겨 있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 노래 가사의 발화자와 수화자를 구체적으로 설정해 보면 그런 그림이 금방 그려진다. 부산항에서 떠나간 형제를 기다리며 노래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떠나간 형제는 누구이겠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라. 섬뜩하지 않는가.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과 이케하라씨가 돌아온, 또 그의 부친이 그렇게도 돌아오고 싶어했던 부산항은 그저 우연한 일치일 뿐일까.

 

식민 이대(二代), 이것이 그의 언행과 부친의 행적 그리고 그 행간의 의미들을 분석한 끝에 내가 내리는 결론이다.

 

 

 

마침내 드러내는 식민주의자의 정체

 

 

 

당신이 이케하라씨의 책을 읽은 독자라는 전제하에 묻겠다. 당신은 이케하라씨의 이야기를 머리를 끄덕이며 쫓아가다가 책의 끝 부분에서 뒤통수를 한방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았는가? 만약 그런 느낌이 없었다면 나의 글 읽기를 멈추고 “맞아죽을 각오로 쓴 한국·한국인 비판”의 194쪽에서 212쪽까지만이라도 다시 읽어 주기를 부탁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귀찮은 주문을 하는 것은 책의 막바지인 그 부분이 식민주의자 이케하라씨가 이제 마각을 드러내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일본을 싫어할까. 그들은 36년 동안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가슴 아픈 과거를 이야기한다. 여기서 비롯되는 국민감정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194쪽)

 

 

 

그는 ‘36년 동안의 일제의 식민지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대신 줄곧 ‘36년 동안의 일본의 한국통치’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 표현의 차이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도 곧 다음 줄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에서는 그 36년의 식민지 역사를 ‘일제 식민지배’라고 부르는데, 일본에서는 ‘일본 통치시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다시 꼼꼼히 살펴보니 과연 그는 이 책 어디에서도 그 자신의 말로는 식민지배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거듭 거듭 일본 통치, 일본 지배라는 말을 한사코 고집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가 일제의 식민지배를 마음으로부터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 통치시대’의 안중근 선생은 한국인들에게는 투사요, 의사(義士)지만 일본인들에게는 한낱 테러리스트요, 암살자일 뿐이라고 논조를 바꾸면서 ‘일본통치’를 냉정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봐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런 다음 우리의 뒤통수를 홍두깨처럼 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에 가장 큰 피해를 끼치고 고통을 준 나라가 과연 일본인가”라고 묻는다.

 

 

 

이에 대한 답으로 식민주의자 이케하라씨는 그것이 결코 한국을 36년이나 통치했던 일본이 아니라 7백년 전에 1백년간에 걸쳐 한국을 침략, 유린했던 몽고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몽고가 얼마나 잔인한 종족인가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잠시 아연해진 정신이 미처 수습되기도 전에 두번째 물음이 우리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갈긴다.

 

 

 

‘요즈음 종군위안부 문제가 나올 때마다 많은 사람이 거품을 물고 일본을 비난한다. 그러나 혹시 호수만복(胡水滿腹)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도 솔직히 마모루씨의 책을 본 다음에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몽고군이 침략했을 당시 그들에게 몸 더럽힘을 당한 조선 여인들이 거기서 몸을 씻고 다시 정(淨)함을 받도록 임금이 정해 놓은 연못이라 한다.

 

 

 

나는 이케하라씨에게 분노한다. 그는 어디선가 남을 끌어내림으로써 자기가 높아지려는 한국인들의 비열함을 공격하고 있다. 우리 민족성의 병폐라고 공격했던 바로 그 수법을 지금 여기서 그는 더 비열하고 교활하게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금 여기서 보여주어야 할 것이 누가 더 악독했고, 누가 더 피해를 주었는가에 대한 역사지식의 자랑인가. 조건 없이 무릎을 꿇고 자기 조국의 죄를 참회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는 이 본질적인 문제는 옆으로 제쳐두고 엉뚱한 몽고를 끌어들여 자신의 죄를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는 눈속임의 수법을 쓰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우리가 일본을 미워하는 것은 순전히 이러한 역사에 대한 무식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 우리가 그 사실들에 무지해서 줄기차게 일본만 미워하는가?

 

 

 

나는 이케하라씨가 호수만복을 끌어들이는 콘텍스트를 꼼꼼히 분석해 보았다. 어째서 그가 직접 상관없는 정신대와 연못을 비교하는가. 놀랍게도 나는 거기서 그가 단지 몽고의 호수만복이 일본의 정신대보다 더 잔인한 증거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훨씬 더 깊숙한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냈다.

 

 

 

다음을 보라.

 

‘한국 사람들은 수많은 외세 침략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한 민족 한 핏줄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도 적지 않은 의문을 느끼고 있다. … 앞에서 언급한 ‘호수만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과연 그 물에 몸을 씻는다고 몽골 병사들이 뿌리고 간 씨가 모두 씻겼을까. 임진왜란은 또 어떤가. 당시 두 차례에 걸쳐 무려 30만명이나 되는 일본 병사가 조선에 상륙했다. 그들이 다 일본으로 돌아갔을까.’(198쪽)

 

아마 그가 정말 맞아죽을 각오를 했다면 논의를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렇게 말하는 데까지 나아갔을 것이다.

 

 

 

‘정신대에 좀 써먹은 여인들이 어떻게 꼭 당신네 씨라고 할 수 있으며 좀 그렇게 써먹은들 어차피 잡탕인데 왜 이 야단들이냐.’

 

그러나 식민주의자로서의 그의 정체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은 다음 말인 듯하다.

 

 

 

‘일본이 36년 동안 한국을 지배하면서 몽골 못지 않은 피해를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 보수세력 중에는 그 점을 인정하면서도 일본의 한국 지배가 한국에 도움을 준 측면도 없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196쪽)

 

그는 그 증거들로 철도·항만·다리 등 식민지 시대에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시설물들을 들면서 비록 동기야 어디에 있든지 지금 한국의 재산으로 남아 있으니 덕을 보고 있지 않느냐는 식의 논지를 편다.

 

 

 

‘불행한 과거’ 진정 반성하나

 

 

 

바로 이 시각이 그가 이 땅에 머무른 26년 동안 한국을 보고 한국인들을 만날 때 언제나 그를 이끌었던 안목이었다. 언제 우리가 그들더러 다리를, 항구를, 철도를 달랬던가. 그들의 총칼에 쓰러져간 투사들, 고문과 폭력으로 목숨을 빼앗긴 열사들, 실험병동에서 알 수 없는 증상을 온 전신으로 앓다가 흉물스럽게 숨져간 저 무죄한 동족들, 명분을 알 수 없는 전쟁에 징용되어 군번도 없이 사라져간 숱한 열혈의 청춘들, 낯선 이국으로 끌려가 희망없는 노역 속에서 무덤도 없이 죽어간 형제들, 정신대로 끌려가 동물처럼 부려지던 조국의 순결한 딸들.

 

 

 

거기에다 창씨개명, 언어말살, 신사참배 강요 등 식민시대에 우리가 당했던 참척의 고통을 그런 뼈다귀 몇개로 무마시킬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식민주의자 이케하라씨는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것은 과거에 있는 게 아니라 현재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몽고를 일본보다 더 미워하지 않는 한국인들에 대해 노골적인 섭섭함을 표명하면서 마침내 망발에 가까운 다음과 같은 말을 서슴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이 몽고를 철천지 원수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몽고가 한국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하고 비참하기 때문이다. … 역사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당했기 때문에 미워하고 싫어하기보다 일본이 한국보다 잘살기 때문에 배가 아픈 것은 아닐까.’(197쪽)

 

 

 

나도 이케하라씨의 수준이 이 정도라는 사실에 할 말을 잃는다. 우리는 안다. 이런 일본인이 이케하라씨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은근히 밝힌 일본의 우익 정상배들만도 아니라는 것을. 다수의 일본인들이 식민지배에 대해 이케하라씨와 같은 시각을 갖고 있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해방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단 한번도 이 땅에서 저지른 숱한 죄상들에 대해 진정한 참회자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우리 앞에 서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케하라씨는 ‘일본 천황이 몇차례나 유감을 표명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유감이니 통석(痛惜)이니 하는 말의 정확한 뉘앙스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일본 왕의 태도가 전적으로 말장난에 그치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말장난이 아니라 진정으로 죄인 됨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그것에 대해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그 말 한마디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이 불행한 과거사를 청산하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통과의례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잊을 만하면 또 일본은 교과서를 날조한다, 의미를 왜곡시킨다, 물러설 때쯤 된 각료들 중 한둘은 일본의 한국 통치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피차에 득이 된 일이었다는 식의 돌출발언으로 한국민의 정서를 한껏 들쑤셔 놓고는 옷을 는다.

 

 

 

그들은 이런 식의 패턴화된 한·일관계사를 속절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한가지 이유, 아직도 일본은 그것을 잘못이나 죄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그 결과 일본 왕이 허심탄회하게 죄인임을 머리 숙여 한국민에게 사과하는, 마땅히 있어야 할 의식을 치르지 않은 때문이다.

 

 

 

한국을 사랑한다는 일본인 로비스트 이케하라씨. 그는 정확히 이런 일본인들이 있는 전형적인 위치에 서 있다. 비장하게도 맞아죽을 각오까지 했다는 그의 입에서 코미디언이 쇼프로에서나 뇌까림직한 말들을 해댈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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