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계동성당 게시판

평신도 주일 강론 - 주일 저녁 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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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계동홍보팀 [chunggye] 쪽지 캡슐

2005-11-17 ㅣ No.6157

 

 

찬미예수님!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 제단에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카톨릭성서봉사자 정춘자 루피나입니다.

평신도주일 강론을 준비하라는 소식을 들은 날,그날은 음력 9월 보름,

내 인생의 대희년이 되는 50회째 생일이었습니다.


6남매 둘째로 태어난 나는, 부모님의 특별한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집안의 전, 월세 계약서를 중학교때부터 모인 사람들에게

자랑하듯이 쓰게 시키셨고, 장남인 동생이 있는데도 대접받고,

형제간 질투도 받고 ‘작은언니는 엄마가 데려온 딸이냐’ 할 정도로

넘치는 부모 사랑이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과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집안 미래는 내가 책임져야 할 것 같이

모든 일을 나와 상의하고 결정하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롯이 눈을들어 요르단 온 들판을 바라보니

어디나 물이 넉넉하여 마치 주님의 동산같은

그런 세상이 내 맘대로 될 것 같았습니다.


미래의 여사장이 되어 사회인으로서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세상속 파라오를 꿈꾸었습니다.

지금처럼 인기직업이 아닌 공무원생활을 그만 두었고,충무로에 출판, 인쇄 하청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만난  남편은내 사회활동을 인정하였고

충분히 인정할 사람이라 생각하고 결혼을 하였습니다.

생각처럼 집안일, 직장일하기가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업상 오가가는 거래금액은 여자이기 때문에 못받는 돈과,

남에게 받을 것 많아도 챙겨서 봉급주어야하고, 지급할 것들 하고나면

네게 돌아오는 것, 내 생활에 필요한 돈은 큰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현실적 불편함과 반대, 가정에만 충실하기를 원하였기에

내 인생의 계획은 바꾸어야 했습니다.

그 암담한 내 영혼에 성서통독을 시작하였습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앞 뒤가 잘 연결이 안되고이해가 안되는 성서를 보면서

‘이 다음에 내가 자유로울 때 성서공부는 꼭 해야지’하는 그 바램이 하느님 뜻과 맞았는지, 갑자기 시부모님 미국 떠나시면서 계획에 없던 분가를 하게 되였습니다.


남편과 아이들 모두 세례를 받고 성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기쁘고 즐겁게 주님의 품에서 찬미하는  아이들보며

내가 누리지 못했던 청소년기 성당활동을 자유롭게 두었습니다. 

그것이 아이들 삶 안에 누려야할 행복의 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멀리 찾을 것도 없이, 우리 성당에 성서공부가 시작되었고 5년 동안

한번의 결석도 없이 다닐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면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창세기 안에서  구원의 하느님은  자비와 사랑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출애굽 공부에서 모세가 태어나면서부터 받았던 불합리와 삶의 무게,

어둠 속에 불꽃같은 열정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아듣지 못하는 시기였습니다.

마르코복음사가는 내가 영적 소경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그려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겠습니까?”  하는 예수님의 질문은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3일 밤낮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버린 수도자,

성직자들을 보고  ‘그들이 전 인생을 걸 정도라면 나도 한번 믿어보자’

하며 시작한 신앙생활이었습니다.

매일미사를 열심히 다니던 어느날, 순간 발이 땅에 붙어버리듯 멈추어

‘내가 왜 열심히 성당가는지’ 이 답을 찾지 않으면 오늘 미사에

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일상 안에서의 습관이 타성이 붙어 시간만 되면 뛰어가는 성당이었고,

남들이 믿는 예수님 나도 그들따라 그냥 믿었던 내 모습 속에 나는 비어 있었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처럼

의미도 모른채  “그리스도이십니다”를  말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었고 내가 걷는 걸음이 아니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요한복음 14장을 읽으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가지 못합니다.“ 라는 말씀은  눈, 귀, 입을 통해 온 가슴을 가득 채우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큰 감동과 기쁨과 환희는

네게 진실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체험이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17장은

당신께서 저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루피나 안에 있게하고 저 또한 루피나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라는 일치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는미사 안에서 이루어졌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성서공부는 세상 어떤 것보다 힘이되는 만나가 되었습니다.


기쁨과 희망 속에 성서봉사할 것을 권하였을 때

'내가 어떻게 하느님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에

다른 단체에 들어가려 기웃거렸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주님의 손길에 의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선포합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말씀의 봉사자 선서를 하던날,

제단에 바쳐지는 송아지처럼 몸과 마음은 큰 무게에 짓눌려

양손의 축하의 꽃다발을 멍에처럼 받아 안았습니다.

집안 한가운데 항상 기도하시는 성모님을 보자, 홍해바다를 건넌

기쁨처럼 주체할 수 없는 감동으로 큰 절을 하였습니다.

유난히 일찍 들어오는 남편에게 “여보 축하해”하며 이유도 모르는 꽃다발을 받은 남편은, 성서봉사를 가기전 공부 안하느냐고 걱정하고  배려하는 이미 하느님 섭리 속에 었었던 것입니다.

그 감사의 시간에도  자녀들 교육문제 앞에서

나는 다시 세상속 가치기준에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은 

‘주님, 저를 당신 집에 앉지도 세상속에 서지도 못하게 하십니까?’하고  홍해를 건넌후 이스라엘사람들의 불평처럼

나의 눈에 보이는 현실은 쓴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룹원들과의 만남은 설레임이고 기쁨이였지만

때론, 봉사자의 부족함 때문에 갈등도 겪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두려운 나머지 두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쓸모없는 종 같은 모습을

선택하려 할 때, 예수님 옆구리의 피와 물의 체험같은, 갈비뼈 속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대 위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나 다시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환희였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한 그 자리는 우리 모두의 사랑을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이제는 그것을 갚는 삶을 살아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감사를 갚아나가는 짐으로 보는 잘못,

내 안의 열정이 없었음을 보았습니다.

다섯달란트를 맡은 종이 주인에게 다섯달란트를 더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은 두려움보다 하느님 자비에 온전히 신뢰된 열정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네 손에 있는 열정의 지팡이로, 네 안에 바위를 쳐 샘물이 솟아나게 하라고, 너만의 제물을 봉헌하라고 부르시는 날 아침,

주님 제단에 무릎을 끓습니다.

‘주님! 오늘도 부족한 저를 쓰시겠습니까?

  지난 날은 나의 자존심을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님 자존심을 위해 살겠습니다.   주님! 행복합니다’


구원의 하느님, 당신의 영광스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소서.

감사기도 당신께 드리오리다. 세세대대 영원토록 찬양노래 부르오리다 아멘.


성서 봉사자 정춘자 루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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