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우리는 이미 도착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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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08-05 ㅣ No.5212

 

 

내 친구 중 하나는 연세가 아흔세 살이나 되는 어머니를 보살피고 있었다. 의사는 친구의 어머니가 언제든 돌아가실 수 있다고 말했다. 내 친구는 1년이 넘게 어머니에게 명상을 가르쳤고, 그것은 어머니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행복의 씨앗에 물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친구의 어머니는 딸이 찾아갈 때마다 무척 활기 찬 모습으로 딸을 맞이한다. 최근에 친구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육체는 정말로 어머니 것이 아니에요. 어머니의 몸은 그보다 훨씬 커요. 어머니에게는 아홉 명의 자식이 있고, 수십 명의 손자들이 있고, 증손자들도 있어요. 우리는 모두 어머니로부터 이어진 존재들이고, 모두 행복하고 건강해요. 어머니는 우리 속에서 언제나 살아 숨쉬고 있을 거예요."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래서 미소를 지었다.

내 친구는 계속해서 말했다.

"젊었을 때, 어머니는 많은 사람들에게 요리와 다른 많은 일들을 가르쳐 주었어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었지요. 지금 우리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어머니가 시작하신 일을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젊었을 때, 어머니는 시를 쓰고 노래를 불렀어요. 그리고 지금 우리도 시를 쓰고 아름답게 노래를 불러요. 어머니는 우리들 속에서 계속 살아 숨쉬고 있어요. 어머니는 여러 곳에 동시에 살아 있는 거예요."

이것이 작은 자아를 뛰어넘는 명상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 명상을 통해 육체가 자신의 진정한 자아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의 몸은 떠나도 자신이 여러 모습으로 계속 살아 있으리란 것을 이해했다.

그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그대는 어머니가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적인 차원에서 본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어머니를 만날 때, 그대는 어머니가 여전히 그대 곁에 존재해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꽃도 마찬가지다.

꽃은 태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꽃은 다른 모습으로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꽃은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그것에 속지 말아야 한다. 꽃은 다만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다. 꽃은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숨어 버린다.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언제든 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대의 어머니 또한 놀이를 하고 있다. 그녀는 그대의 어머니로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역할을 아주 잘 해냈다. 이제 그녀는 어머니로서 그대의 성장을 돕기 위해 그곳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다.

어느 날 숲을 걷다가 바싹 마른 나뭇잎 하나를 밟으려고 하는 순간, 나는 궁극적인 차원에서 그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나뭇잎이 사실은 죽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것은 축축한 흙과 하나가 되어, 이듬해 봄에 다른 모습으로 나무에서 싹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나뭇잎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지금 죽은 척하고 있구나."

내가 밟을 뻔했던 나뭇잎을 포함해 모든 것이 태어나고 죽는 것처럼 보인다. 붓다는 말했다.

"조건이 충분히 갖춰지면 몸이 나타난다. 그러면 우리는 몸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조건이 충분히 갖춰지지 않을 때, 우리는 몸을 인식할 수 없다. 그때 우리는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 단지 그 차이일 뿐이다.

이른바 우리가 죽는 날이란 우리가 다른 많은 모습으로 계속 이러지는 날을 뜻한다. 만일 그대가 궁극적인 차원에서 그대의 어머니를 만나는 법을 안다면, 어머니는 언제나 그대와 함께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만일 그대가 그대의 손, 그대의 얼굴, 그대의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매우 깊이 바라본다면, 어머니가 그대 안에서 미소짓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깊은 명상이고, 또한 가장 깊은 차원의 치료다.

절대 세계란 곧 모든 관념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탄생과 죽음, 있음과 없음, 나타남과 사라짐을 포함한 모든 관념의 소멸을 뜻한다. 절대 세계는 삶의 궁극적인 차원이다. 고요와 평화와 기쁨의 상태다. 그것은 죽은 다음에야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호흡하고, 걷고, 한 잔의 차를 마실 때, 그대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절대 세계와 만날 수 있다. 시작이란 없기 때문에 그대는 사실 계속 그 세계에 있었다. 그리고 모든 존재와 모든 사람들도 그 세계 속에 갈고 있다.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한겨울에 편도나무 앞에 서 있던 성 프란치스코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성 프란치스코는 어느 겨울날 편도나무에게 다가가 하느님에 대해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갑자기 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편도나무는 아름다운 꽃들로 뒤덮였다.

그 이야기를 읽었을 때,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나는 성프란치스코가 궁극적인 차원에 서 있음을 알았다. 그때는 겨울이어서 나무에는 잎사귀와 꽃, 열매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세계에서 꽃을 본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인 차원을 만날 수 없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만났다. 문제는 더욱 깊이, 그리고 더욱 자주 만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체적으로 바라보라’ 는 말은 궁극적인 차원을 만날 수 잇는 방향을 제사하고 있다. 사물을 전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더욱 지혜로와지고 한결 기분이 좋아진다. 그때 우리는 조그맣고 사소한 일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전체적인 눈으로 볼 때, 우리는 많은 실수를 피할 수 있고 삶과 행복에 대해 더욱 심오한 시각을 가질 수가 있다.

역사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을 때, 그대는 매번 수많은 파도에 흔들린다. 그대는 자신이 하는 일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고, 수퍼마켓에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친구와 전화를 하다가 혼선이 될 때도 있다. 그때마다 그대는 피곤해지고, 우울하고, 화가 난다. 그것은 그대가 현재의 상황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을 감고 백 년 뒤의 세계를 상상한다면, 그런 문제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것이다. 그렇게 백 년 뒤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그대는 상황을 매우 다르게 바라볼 것이다. 하물며 궁극적인 차원과 만날 때 얼마나 그대에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겠는가!

그대는 궁극적인 차원과 만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내 발이 자두 마을의 땅 위에 있고, 프랑스의 대지를 딛고 있음을 느낀다. 또한 프랑스의 대지가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러시아는 물론 심지어 인도, 중국, 베트남에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전체적으로 생각할 때, 나는 내 자신이 단지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에 서 있음을 안다. 왜냐하면 내가 자두 마을을 느낄 때, 유럽과 아시아 모두를 느끼기 때문이다.

중국은 단지 내 발 밑의 작은 땅이 이어진 곳에 있을 뿐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한 곳에 서 있을 때, 나는 지구의 전 대륙 위에 서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깨달음은 지금 그대가 서 있는 그 지점이 지구 전체를 포함할 수 있도록 탈바꿈시켜 준다. 걷는 명상을 하면서 자신이 아름다운 지구별 위를 걸어가고 있음을 깨달을 때, 그대는 자기 자신과 자신이 내딛는 걸음을 매우 다르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때 그대는 좁은 시야와 한정된 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걸음을 한 발자욱 옮길 때마다 그대는 자신이 지구 전체와 만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 자각과 함께 자신의 발걸음을 느낄 때, 그대는 많은 고통과 잘못된 관념들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깊은 자각 속에서 어떤 것을 만날 때, 그대는 곧 모든 것과 만나게 된다. 이것은 시간에 대해서도 진실이다. 그대가 활짝 깨어 있는 상태로 한순간과 만난다면, 그대는 곧 모든 순간과 만나는 것이다. 불교의 화엄경에 따르면, 그대가 한순간을 깊이 느끼는 순간 그 순간 속으로 모든 과거와 미래가 들어온다고 한다.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만난다는 것은 과거나 미래를 지워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만날 때, 그대는 현재가 과거로부터 생겨났으며 또한 미래를 창조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현재를 만날 때, 그대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만나는 것이다. 즉 무한한 시간 전체, 실체의 궁극적인 차원을 만나는 것이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차 한 잔을 마실 때, 그대는 현재의 순간을 만나고 시간 전체와 만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가 한 일이었다. 그가 편도나무를 깊이 느끼자,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무에 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그 순간, 시간을 초월한 것이다.

명상은 삶의 매 순간을 싶이 사는 것이다. 명상을 통해 우리는 파도가 오로지 바다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역사적인 차원과 궁극적인 차원이 하나임을 깨닫는다. 파도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바다를 만나고, 파도가 단지 바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파도만 만난다면, 우리는 고통받을 것이다. 그러나 바다와 만나는 법을 배운다면, 큰 위안을 얻을 것이다.

절대 세계에 이를 때, 우리는 많은 걱정들도부터 해방된다. 과거에 우리를 화나게 했던 일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바로 어제 일어난 일이라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대가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만날 수 있다고 행각해보라.

우리는 역사적인 차원에서 위로받고 치료받기 위해 명상을 한다. 우리는 몸과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평화롭고 신선하고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갖는다. 친절과 자비를 실천하고 분노를 탈바꿈 시킬 때, 우리는 위안을 받는다.

하지만 실체의 궁극적인 차원과 만날 때, 우리는 가장 깊은 차원의 위로를 받을 수가 있다. 우리 모두는 그 절대 세계에 이를 수 있으며, 그렇게 되었을 때, 탄생과 죽음, 하나와 여럿, 나타남과 사라짐 등의 개념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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