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홍릉(洪陵)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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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5-07-17 ㅣ No.3537

어제 토요일은 국무총리실 산하 복권위원회의 지원에 의해 로또복권의 문화소외계층에 대한 문화체험행사 중 하나인 ‘우리역사 바로알기 문화탐방’을 했다.

장안동에 있는 장안사회복지회관의 추천을 받아 무료급식에 오시는 할머니 36분과 민요반봉사자를 엮어서 버스 1대와 전농동에 있는 ‘열린 시민사회’에서 추천받은 ‘방과 후 교실’ 어린이와, 대학생 봉사자, 그리고 토요일이라서 쉬는 그 아이들의 엄마들이 동승한 버스 1대,

대형버스 2대를 인솔하고 동대문구에 있는 선농단과 영휘원, 숭인원을 보고 오후엔 금곡에 있는 홍릉과 유릉을 다녀왔다.


생활형편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이들이 ‘문화 소외계층’이 아니겠나 싶어서 그 쪽으로 추천을 받았더니 역시 내 예상이 적중했다. 돈 내고 하는 관광이나 문화답사를 전혀 해본 적이 없다 하시니 나로서는 그분들을 모시는 것이 큰 보람이 아닐 수 없었다.

70이 넘으신 할머니들이 대부분이어서 그분들이 역사를 알면 얼마나 알겠으며 3학년에서 6학년까지의 아이들이 뭘 그리 해설을 잘 알아 듣겠는가마는 할머니와 아이들이 왕릉 앞 잔디밭 맑은 공기 속에 산보만 하는 것만 봐도 내 마음이 흐뭇했고, 점심으로 오리 로스구이에 상추쌈을 맛있게 잡수시는 모습만 보아도 기분이 저절로 좋았다.

가며오며 버스 안에서 함께 간 문화원의 민요봉사자들이 불러주는 태평가, 청춘가. 뱃노래에 할머님들은 흥이 나고 아이들은 대학생봉사자들이 맡아 흥을 돋우어 주었다.

또한 젊은 엄마들은 대부분 노트를 꺼내서 바른 역사 해설을 자세히 듣고 또 받아서 적는 그 모습도 보기가 좋았다.  


현재 동대문구에 있는 영휘원은 명성황후의 시녀상궁으로 있다가 고종황제의 승은을 입어 귀비가 된 순헌귀비 嚴妃(일본인들이 英親王이라 칭하게 한 英王의 친어머니)의 무덤이며 숭인원은 영왕 이 은(垠)의 맏아들인 진(晉)의 무덤. 다시 말하면 세손의 무덤이다.

 

일제는 조선왕조를 멸손(滅孫) 시키기 위해 의사의 진맥에 의해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하는 일본왕실의 방계 처녀인 方子(마사코)를 영왕의 배필로 정해 정략결혼을 시켰지만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마사코 여사가 덜컥 아이를 낳으니 그가 바로 진이었다. (진맥을 잘못한 일본의사는 활복을 해서 죽었다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진은 첫돌이 지나고 세손이 보고 싶다는 고종황제와 할머니 순헌귀비의 부름을 받은 영왕과 마사코와 함께 잠시 서울에 왔다가 그만 숨을 거둔다.

고종황제가 궁궐(덕수궁)에서 주최한 만찬에 아빠 엄마가 다니려 간 사이에 유모에게 맡겨진 어린 아기 晉이 찰떡을 먹다가 식도에 걸려서 질식사 했다고 역사에 기록돼 있지만 철저히 조선왕실의 멸손을 꾀하고자 했던 일제의 흉계가 아니었을까 의심을 하는 이들이 지금도 많다.


금곡에 있는 홍릉은 1919년에 돌아가신 고종황제의 무덤으로서 청량리에 있던 명성황후의 무덤을 고종황제 무덤을 쓰면서 그곳으로 옮겨 갔기에 지금은 동대문구에 홍릉이라는 이름만 남은 셈이다.

하루에 고종황제의 정비인 명성황후와 후비로 추존되기는 했지만 명성황후의 시앗이기도 했던 엄비의 무덤을 한꺼번에 둘러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기록에 의하면 명성황후는 시녀상궁을 둘 때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인물 모양도 훨씬 빠지는 엄비를 택했는데 어느 날 아침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인물도 못생긴 엄비가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오니(당시 내명부(궁궐)에서 임금과 동침하면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와서 자신이 임금님의 승은을 입었다는 사실을 공표했다고 한다) 얼마나 분했던지 형틀을 차리고 황후가 손수 메를 쳤는데 고종황제가 다시는 그녀를 가까이 하지 않을 테니 죽이지 말고 궁궐 밖으로 내 쫓는 것으로 끝내자고 사정을 하여 목숨을 구하였다 한다.

 

훗날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은 다시 엄비를 궁궐로 불러 야밤에 상궁으로 가장한 엄비의 가마 안에 숨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옮겨 가니 역사에는 이를 두고 ‘아관파천’이라 했다. 임금이 옮겨 간다는 것은 당시로는 정부가 옮겨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모든 각료대신들이 임금 곁에서 정무를 척결해야 되니 매국노 이완용도 러시아 공사관에 함께 있었다.

 

비록 후비이긴 했지만 엄비는 나라의 장래를 위해 당시 사재(물론 매관매직으로 번 돈이겠지만) 2백만 원의 재산을 내놓아 양정의숙(현재 養正중고등학교)과 진명의숙(進明여중고)를 설립함으로서 신교육사업에 투자하기도 하였으니 오직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애를 쓰느라 다른 일은 전혀 못한 명성황후보다도 오히려 후세에게 남긴 업적이 많은 셈이다.


오늘 특히 새로 배운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왕릉인 裕陵 앞의 석물(石物)이 청나라 사람들(오늘의 중국사람)이 대한제국 이후의 우리나라와 우의를 돈독하게 유지하고자 저들 왕릉(명나라 주원장의 묘)과 같은 형태의 석물, 즉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해태, 말 등과 같은 석물들을 만들어서 설치해 주었다는 점과, 고종황제의 능인 홍릉 비석에 있는 大韓이라는 단어와 太皇帝라는 단어 앞에 일제가 ‘전(前)’이라는 글씨를 써넣으라고 강요했음에도 불구하고, 前이라는 글씨 한자 때문에 다 만들어진 비석이 3개월 넘게 제 자리에 설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굴하지 않고 단 하룻밤 만에 주도면밀하게 제자리에 그 고치지않은 비석을 세운 조상님들의 불굴의 민족혼이 나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 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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