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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평화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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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백 [sblee2] 쪽지 캡슐

2006-03-25 ㅣ No.4412

우리에게 평화를

- 일본(나가사끼) 聖地순례기 -

 

2005. 9. 1 ∼ 9.3(3일간)

            

 방 문 지

1.히라도시(市)

2.사세보시(市)(사이카이 펄 씨 리조트)

3.나가사끼시(市)

 

 + 찬미예수님!

  지난 8월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찜통같은 무더위가 우리의 생활을 위협하는 가운데 가을을 알리는 처서(8월23일)와 함께 아침저녁으로 소슬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면서 코스모스꽃의 향긋함과, 해맑은 사과와, 가을하늘의 높고 푸르름이 서서히 우리곁으로 다가오는 듯했습니다.

 

  8월28일 주보는 결실의 계절이자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 9월은 순교자 성월임을 알리는 가운데 김주영(루가) 신부님을 단장으로 모시고 우리성당 (창4동성당) 교우 75명과 타본당(상계동, 상도동성당 등) 교우 35명등 110명이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 일본, 제2차세계대전(大戰)때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피해를 입은 지역 나가사끼시(長埼市)를 향해 9월 1일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역사적인 성지순례의 장도에 올랐습니다.

 

  9월 1일 오전 5시 30분!

  우리 일행 75명은 저멀리 현해탄건너 우리 조상들의 한(恨)과 애환이 깃든 나가사끼를 향하기 위하여 성당 인근에서 버스2대에 나누어 탔습니다.

 

  5시 34분, 일행을 태운 버스는 인천국제공항을 향해 달리기 시작 하였고, 이윽고 10분이 지나자 버스안에서 묵주기도(Rosary Pray) 5단에 이어서 삼종기도를 바치고나니 6시 13분. 버스는 쉴새없이 달려서 7시 10분에 우리 일행을 공항 청사 입구에 내려 놓았습니다.

 

  일행을 태운 비행기(KE787)는 예정시간(8시10분)보다 15분 늦게 이륙하더니 이내 한반도 상공으로 솟구쳤고 창공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우리의 산야는 우거진 숲들이 푸르다 못해 검푸른 색깔로 눈앞에 다가왔으며, 비행기 아래 떠다니는 자그마한 뭉게구름과 새털구름의 조우(遭遇)는 서로를 위로하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사이좋게 임무교대중임을 속삭이는 듯 수줍어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9시 10분!

  한반도의 한축을 포근히 감싼 동해(East Sea)가 눈앞에 나타나며 지난여름 「피서지에서 생긴일」들을 역사속에 묻어두고 점점히 떠다니는 구름조각은 일행을 향해 일본성지순례를 잘하고 돌아와서 예전과는 조금은 달라진 모습으로 산앙생활을 해줄 것을 당부하는 듯 하였습니다.

 

  비행기는 동해안 상공을 나르고 있었고 출렁이는 동해바다의 검푸른 물결은 한·일간 오욕과 반목의 역사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짙푸른 색깔로만 우리에게 투영되고 있었습니다.

 

  우리와는 「과거와 이제와 항상 영원히」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을 지천명(知天命)의 5학년 중반에 재생(在生)중인 장년의 황소가 되도록 방문할 기회가 없었기에 짧은 일정 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보고, 배우고, 느끼고 오겠다고 조용히 다짐하며 조·중·동·KH·KT등 조간신문들을 기자인양 열심히 훑어보고 있었습니다.

 

  한편 바로옆에 자리하신 자매님은 연방 「성호경」을 그으며 기도를 열심히 하고 계시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며 저도 저렇게 「기도의 생활화」가 되어야 할텐데 하는 생각이 미치는 순간 비행기는 어느덧 일본땅 후쿠오카(HuKuoKa)상공에 이르렀다는 기장(機長)의 멘트(Ment)가 나오는가 했더니 9시 33분, 예정시간(9시 25분)보다 조금 늦게 후쿠오카 국제 공항(지도1)에 사뿐히 내려 앉았습니다.

 

  이윽고 일행 114명(창4동 교우 75명 기타성당교우 36명, 여행 안내원 3명)이 공항 청사에 들어서자 입국수속 절차에 대한 방송이 일본어와 한국어로 계속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면서 이곳이 우리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도 「떨어져서는 못사는」 일본땅임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관광버스 3대(그 이름도 훌륭한 Human Tour, Hirado Bus)에 전화 안내번호와 같은 숫자인 114명이 분승한 후 버스가 히라도(Hirado) 시(市)를 향해 달리자 이번여행을 맡은 여행사인 대건 안드레아 성지 순례본부 (ST, Andrew Kim Pilgrimage Tour)소속 여행 안내원의 안내가 시작 되었습니다.

 

  일본의 인구 1억 2천 5백만명 가운데 등록된 종교인수는 약 2억명이며 그 가운데 천주교(기독교)인이 48만여명에 불과하며 일본에서 천주교 성당은 교회(敎會)로 표기되고 성당은 기도와 신앙 생활을 위한 공간 이라기 보다 결혼 예식장으로 더 인기가 있으며 일본인들은 오늘날에도 한국에서 전래된 불교외에 많은 잡신(神)들을 숭배하고 있어 서양종교인 천주교(기독교)는 전파되기가 구조적으로 그리 쉽지 않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데도 추기경은 왜 두분씩이나 될까? 그것도 잘난(?) 국력때문일가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도 비록 저만의 생각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전 12시 10분

  반세기의 생애 처음으로 일본땅 일본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유치원생 소꿉장난감같은 그릇에 한젓가락이면 없어질 반찬들이 식탁을 장식한가운데 (인건비도 비싼데 좀 큰 그릇에 맛있는 반찬으로 몇가지만 준비하지..) 모든음식은 개인별로 제공되고 위생 관념은 철저하고 단체손님에 대한 사전 준비가 철저한 듯 우리나라의 여느 식당과는 달리 종업원들은 서두르는 기색이 없이 차분하게 행동하는 가운데 친절하고 상냥하였습니다.

 

일행은 2층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끝내고 1층 도자기 판매점에 들렀는데 가격이 얼마나 비싼지 우리나라 남대문시장에서 천원이면 살수 있을것같은 숟가락이 세일(20%)해서 천앤(¥, 일만원 수준)이라 그렇잖아도 더워서 열이 나는 판국에 영어로 물어도 대답을 들을 수 없는데다 지배인이 정장차림을 한 저를 더욱 열나게 만들었습니다.

 

이어서 일행은 오후1시에 첫 방문예정지인 다비라성당(사진1)으로 향하였고 2시 15분에 성당에 도착하였습니다.

 

  다비라 성당은 1918년에 축조되었는데 건축양식은 명동성당과 같은 고딕식 건축(Gothic architecture) 양식이 였고, 성당내부 제단뒤 십자가와 십자가의 길(14처) 그림액자, 유리창에 그려진 성화(聖畵)등이 정교하고도 훌륭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성당옆 공원묘지의 깔끔함에 깊은 인상을 받으면서 20여분간의 관람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이어서 일행은 경남 남해(南海) 대교를 연상할정도로 비슷한 모양으로 건설된 해상(海上) 30m높이의 히라도대교(Hirado Bridge)(사진2)를 통과하여 오후 2시50분에 히라도시(平戶市)소재(지도2)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성당(St. Francis Xavier Cathedral)을 방문하였습니다.

 

이 성당의 주인이신 하비에르성인(St. Francis Xavier 선교의 수호자. 12월 3일은 하비에르사제 대축일)은 1550년 가고시마(Kagoshima)를 통하여 히라도에 들어가 당시 영주(領主)인 티카노부(Takanobu)의 허락을 받아 히라도에 처음으로 천주교를 전파하신분으로 하비애르 성인을 기념하여 축조된 하비에르 기념성당은 주변의 사찰(사진4)들과 어우러져 동양(Orient)과 서양(Occident)의 조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히라도 항구를 가장 인상적으로 바라볼수 있는곳에 자리하고 있었고, 성당의 성화(聖畵)로 장식된 색유리(Stained glass)와 이국(異國)적인 성(聖) 조각품들은 성당의 예술적 가치를 한층더해주고 있었습니다.

 

하비에르 성당을 20여분간 관람한 일행은 오후 3시30분 히라도 항구를 출발하여 다음 방문 예정지인 히모사시 성당(細差敎會, Himosashi Catholic Church) (사진5)으로 향하였습니다.

 

오후 4시경 히모사시성당에 도착한 일행은 숨돌릴 사이도 없이 루가, 마르코, 마테오 팀으로 나뉘어 「십자가의 길」 (The Way of The Cross)」을 시작하였습니다.

 

성당 경내는 제법 넓고 좋았는데 「십자가의 길 14처」는 대략 3처씩 나누어 다닥다닥 붙여놓아 기도하기가 매우불편 하였으며 섭씨 34~35??를 오르내리는 폭염속에서도 제대로 예의를 갖추어 기도한다고 정장차림을 한 저는 비지땀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였고, 기도를 마친후 일행과 함께 성당안으로 들어가 오후 4시 50분경부터 약 50분간 무정(無情)천리 일본땅 소재 성당에서 정성을 다하여 미사를 드렸습니다.

 

저 멀리 이국(異國)땅 그것도 우리 조상들의 한(恨)이 서린 일본에 자리한 성당에 그 후손 교우들이 100여명이나 방문하였는데도 신자가 4명(나중에 알았지만)이라는 이곳 성당에서는 신부님, 수녀님 교우 한분 보이지 않고 어떻게 성체와 기도장소(성당)만 제공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신부님은 강론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이곳 성당을 도와주자고 호소 하시었습니다.

 

일행은 성당 경내에 있는 예수님의 가족과 어린양의 형상이 있는 쪼그마한 동산을 배경으로 그리고 돌위에 홀로서 계시어 오늘따라 유달리 외로워보이는 성모님과의 기념 촬영

(사진1)을 마치고 제 1일 숙박지인 란뿌호텔(蘭風 Ranpu Hotel) 에 도착하니 오후 6시 반이 되었습니다.

 

호텔식당에서의 저녁식사는 그야말로 정통일본식 식단에 무대에선 갖가지 공연을 선보였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다 교우들의 가슴속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왜색(倭色)문화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으로 교우들에게 그다지 흥을 돋구지는 못한듯하며 하루의 힘들었던 여정(旅情)의 피로를 풀기위하여 일본 잠옷인 유가다(ろか)차림으로 호텔내 온천욕을 즐기며 첫날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제 2일, 9월 2일!

아침에 일어나보니 란뿌호텔은 바닷가에서 약 200m뒤 바다를 향하여 남향에 위치하고 있어 전망이 좋은 가운데 야자수를 비롯한 열대식물들이 지상 7층의 호텔건물을 감싸고 있어 마치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 최남단 제주도에 온것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 였습니다.

 

저는 아침 7시를 갓 넘어서 시속 50km의 제한속도에 맞춰 해변가 야자수가 늘어선 왕복 2차선을 운전하는 일본인들의 여유로운 출근길 모습을 간간히 보면서 해변가 차도(車道)를 따라 달리다가 마지막엔 호텔 전면에 설치된 방파제 끝에 홀로 외로이 서서 "독도는 우리땅, 일본은 종군위안부에게 배상하라"고 소리 높이 외쳐댔지만 그 외침은 한낮 분노의 메아리 되어 호텔 주변과 망망대해(大海)를 맴돌 뿐이었습니다.

 

오전 8시 40분!

일행을 태운 버스는 일본해상 자위대 총감부가 자리하고 있어 우리의 진해 해군기지와 비슷한 기능을 갖인 사세보항(Sasebo Port)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여 9시 50분 사세보항 사이카이 펄 씨 리조트(Saikai Pearl Sea Resort)(사진6)에 도착 하였습니다.

이곳은 한국의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을 연상할 정도로 크고 작은 다양한 형성의 섬들이 아름답게 오밀조밀 위치하고 있었는데 사세보항에서 북으로는 25km, 히라도 해협까지 줄을 잇는 크고 작은 208개의 섬들을 구주쿠시마(Kujukushima)(사진4)라고 하며, 섬의 조밀도가 일본에서 최고라고 알려져 있어 히라도제도, 고토열도등의 외양성 다도해군(群)과 함께 일본 본토 최서단에 해양국립공원으로 사이카이 국립공원(Saikai National Park) (사진6)이라고 명명된 곳입니다.

 

사세보항 근해의 섬들은 남구주쿠시마(South Kujukushima)라 불리며, 섬하나하나에 독특한표정들이 서려있어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아름다운 지역으로 99개의 섬 순항부두(99 Islands Crusing Pier/Saikai Pearl Sea Resort)(사진5)에 집결한 일행은 관광유람선 펄퀸(Pearl Queen, 진주여왕)(사진6)호에 기대감과 부푼가슴을 안고 승선하였습니다.

 

오전 10시 3분!

  펄퀸호가 조용한 톤(Tone)의 뱃고동 소리를 울리며 출항하자 소풍나온 40여명의 유치원생들의 환송을 멀리한채 우리 일행은 무더위 속에서도 조금은 시원한 바닷바람을 정면에서 맞으며 바다로 나아갔고, 원숭이 띠도 아닌 소띠인 저도 마스트(Mast)난간(사진6)에 기대어, 어린애처럼 기뻐 하시는 수녀님, 자매님들에 둘러싸여 모처럼 즐거움 7가지 ( 전망의 즐거움 짜릿함의 즐거움 시원함의 즐거움 가슴이 탁트이는 즐거움 사진촬영의 즐거움 연설과 호음의 즐거움 타본당 교우들과 친교의 즐거움)즐거움을 맛 볼수 있어서 너무나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펄퀸호가 바다가운데 여기저기, 옹기종기, 올망졸망 떠있는 99개의 섬들의 세계로 진입함에따라 요코시마섬(사자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섬)을 비롯해서 간, 만조에 따라 각각 3개, 2개로 나뉘어지는 구로코지마섬, 말안장형태의 구라카케섬, 잠수함이 떠오르는 형상의 오지카세섬등 갖가지 모양의섬들(사진6)이 우리의 시선을 끌면서 몸안에 엔드르핀(Endrophine) 생성을 유도하자 마스트에 올라 저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눈앞에 펼쳐진 환상적인 경관(景觀)앞에 일행들가운데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는가 했더니 펄퀸호 간판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일본어와 영어로 섬의 모양과 특성, 섬에 얽힌 전설들이 상냥스런 여자의 목소리로 흘러나오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저도 질세라 절경(絶景)에 매료되어 흥분된 감정에 복받쳐 즉흥연설을 토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선내(중앙) 방송의 위력에 지방 방송인 저의 연설은 주파수가 낮아 힘이 약한 듯 하였지만 저는 원어(한국어)로 말하는데다 음성과 발음이 정확하고 내용이 재미있어 승선자들에게 이해력 100%에 이르니 여기저기서 '옳소'소리와 함께 박수가 터져나오는 등 갑자기 인기가 치솟았던 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연설내용은 우리 일행이 임진왜란(1592-1598)때 13척의 거북선으로 333척의 왜적의 배를 격파한 이순신장군의 후손들로 이곳 일본의 해상자위대 총감부(해군사령부)가 있는 사세보항에서 해상 관광을 즐기게 된데 대하여 뿌듯한 자부심을 느낀다는 사실과, 일본의 인구 1억 2천여만명 가운데 천주교(기독교)신자가 50만명도 채 안되는데도 추기경님이 두분이라는데 한국은 인구4천8백만명중 천주교 신자가 440만명에 이르는데도 추기경님이 김수환 추기경(Stephen Cardinal Kim) 한분 뿐이니 제 265대 교항에 오르신 베네딕토 16세(Pope Benedict ⅩⅥ)교황님께서는 이러한 사정을 굽어 살피시어 교황즉위기념으로 한국에 최소한 추기경 한분을 더 임명해달라는 440만 교우들의 염원을 모아 천주교 서울대교구 창4동 성당 현대구역 구역장 이신백(요한, 목자)교우가 교황님께 간절히 호소 드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옆자리에 함께했던 교우들의 옳소! 함성소리와 함께 옆에서 지켜보시던 수녀님이 저더러 창4동 성당에서만 활동하기에는 아까우니 여의도로 진출해서 일하라고 권하셨지만 저는 약 20년을 창 4동에 살면서 창 4동성당과 우리 신부님과 교우들이 좋고 여의도는 여러면에서  너무 오염되어 싫다면서 정중히 그리고 겸손되이 사양하기도 하였으며 상도동성당에서 오셨다는 어느자매님은 저보고 성당에서 상당히 유명하겠다고 하시기에 보좌구역장 1년여만에 올해들어 겨우 구역장을 맡았다고 하였더니 믿기지가 않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우리 창4동성당에 인재(人材)가 아닌 인재(人財)가 많은줄을 잘 모르시니 그럴수밖에요.

 

일행은 약 45분간의 관광 유람끝에 10시 48분!

부두에 도착하여 간단한 쇼핑후 하나이치(Hanaichi)식당에서 깔끔하고 맛깔스러운 일본식 부폐로 점심을 먹고 아쉬움을 간직한채 12시20분 구주쿠시마의 관문인 펄시 리조트부두(Pearl Sea Resort Pier)를 떠나 일본 천주교(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26인의 성인이 탄생한 일본판 골고다 언덕이 있는곳, 나가사끼 (長山奇, Nagasaki)로 향하였습니다.

 

「26인 순교지」는 부둣가에 위치한 JR(일본철도) 나가사끼역(Nagasaki Station) 맞은편 일본 NHK 방송국 나가사끼 지국과 인접하고 있는 언덕배기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나가사끼 항구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26인 순교지」는 임진왜란때인 1597년에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탄압할 때 순교한 일본최초의 천주교(기독교) 순교자(Martyr)들을 기념하기 위한곳으로 나시자카코엔(西板公園)(사진7)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26인의 순교자 가운데는 스페인 신부 수사 6인(오사까 교또에서 체포)과 어린이 3인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26인의 순교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형을 당한 골고다 언덕과 닳은 이곳을 자신들의 순교지로 직접 선택하였고 1597년 2월 5일 나무에 묶인채 배교(背敎)하면 살려주겠다는데도 굳이 죽음을 택하셨다는 사실에 접하고 마음이 숙연해짐을 느꼈습니다.

 

 26인 순교자들은

「나는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았지만 단지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 했다는 이유로 죽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죽게 됨을 기쁘게 생각하며 우리주님이 나에게 내려주신 커다란 은혜라고 생각한다」는 마지막 유언/공동성명서(?)를 발표하시고 순교하셨다고 합니다.

 

26인 순교자들은 교횡피오 9세(Pope Pius Ⅸ)에 의해 1862년 성인(聖人, Saints)반열에 올랐고 그 후 100주년이 되는해인 1962년 성인들의 명복을 비는 성(聖)필립보 교회(사진7)와 26성인 조각기념비(사진8)가 건립되었고 기념비 바로 뒤편에는 나가사끼에 전래된 천주교(기독교)관련자료를 전시하는 「26성인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26인의 순교자가 일본최초로 처형되고 그 후 기록상으로도 600여명의 순교자가 발생되었다는 이 순교지를 1981년에 순례한 제 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Ⅱ, 2005. 4. 3 선종)께서는 이곳 나시자까 순교지를 「더 없는 행복의 언덕」이라고 명명(命名)하셨으며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지켜낸 순교자들에 대한 축복의 말씀을 남기셨다고 하며 이곳 나사자까 순교지는 나가사끼현(Prefecture of Nagasaki)에 의해 1956년 4월 6일 사적(史積 Historic Society)으로 지정 되었습니다.

 

한편 26성인 조각상 아래의 동판에는 7개의 십자가가 양각(사진9)되어 있었는데 이 7개의 양각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며 동판 가운데에 큰 십자가가 있고 좌우로 약간 위쪽으로 아래 그림처럼 계단식으로 배치한 좌우 각 3개씩의 작은 십자가는 무엇을 상징하는지 참으로 궁금하였으며 라틴어로 쓰여 있어 저는 라틴어 문맹이라 글자를 이해할 수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 라 틴 어 )

 

포도송이                                                              포도송이

 

( 라 틴 어 )

또한 26성인 조각상 우측에는 장뇌나무(Camphor Tree)가 있었는데 장뇌나무 옆 동판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늙은 장뇌나무 뿌리(Old Camphor Tree Root)

 

"이 늙은(장뇌) 나무뿌리는 순교자들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으나 장뇌나무가 나가사끼 지역에 널리보급되어 있으면서 그 뿌리가 오랜 생명의 인내와 고통을 보여주는 것처럼 장뇌 나무는 순교자들의 삶을 잘 나타내고 있다"(필자번역)

 

「"This old tree root has no direct relation with the martys, but as camphor trees are common in the Nagasaki area, and as the root shows the endrance and the sufferings of a long life, it symbolizes aptly the martyrs' Lives"」

 

장뇌 나무의 특성은 잘 모르겠으나 위글은 26순교성인들의 삶과 영성의 향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면 이는 저만의 생각일까요? 함께한 교우들도 공감 할까요?

 

26성인 조각상 바로 뒤편에 위치한 「26성인 기념관」은 1,2층으로 구성되어 1550년대 하비에르 신부님(St, Francis Xavier)이후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된 명치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의 천주교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출신으로 일본에서 신부님으로 봉사하시다가 은퇴하시고 26성인 기념관장을 맡고 계시는 이유끼신부님께서 기념관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해주셨는데 신부님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26성인 순교자외 600여명의 천주교 신자가 순교하였고 그 중에는 일본인을 비롯하여 스페인, 폴투칼, 이태리 및 한국인 순교자도 있으며 복자 205인중 한국인이 10인에 이른다고 하며 한국의 천주교 역사와 얽혀 있는 부분도 많이 있다고 설명 하셨습니다.

 

이곳 기념관 자료에 의하면 임진왜란(1592~1598)이 한창때인 1594년 당시 일본에는 약 2000명의 조선인 가톨릭교도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 1598년 임진왜란때 패퇴한 소서행장(少西行長)이 한국에서 퇴각하면서 우리 조상들을 다수체포하여 이곳 나가사끼로 압송하여 왔고 그분들은 귀국하지 못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되어 「고려」라는 독립 마을을 조성하여 생활하면서 천주교를 믿게 되었고

 

그들은 도구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 시절 탄압받는 외국인 선교사, 신부들을 집에 숨겨 주었고 이 사실이 적발되면 함께 목숨을 잃는 엄청난 시련속에서도 궂궂이 살아오면서 성 로렌스(St. Lorens) 성당을 건축하는등 활발한 신앙 생활을 하여 왔다고 합니다.

 

이곳 기념관에 전시된 불상(佛像)은 6세기경 불교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이래 천주교가 핍박받던 시대에 기도시간에 예수님상과 함께 사용한 것으로 이 불상을 최후에 소유한 신자가 기념관에 기증한것이라고 하였습니다.(26성인 순교지 기념관에서는 홍보자료가 없어 기념관에서 헌금하고 제공받은 '일본26성인'(자료1.2)을 붙입니다)

 

 오후 2시 54분!

일행은 다음 목적지인 히가시 나가사끼 성당(Higasi Nagasaki Cathedral)(사진 )으로 향하였습니다. 오후 3시 30분경 성당에 도착하자 성당 현관 정면에는 「나가사끼 현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고 한국어로 쓴 가로 간판을 붙여두고 연로하신 하마다 신부님과 몇몇 교우분들이 다과를 준비해두고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이 성당은 폴란드 출신이신 콜베신부(Father Golbe, 1894-1994, 100세)님 께서 축조하셨는데 계단을 올라 성당 입구 한가운데 자리한 성모님상은 계란형 미인으로 너무나 잘생기셨고 흠잡을데 없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어 그 아름다움에 사로잡히어 발걸음을 옮길줄을 몰랐습니다.(성당 홍보자료 없음)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Peter Cathedral)에 있는 성모님도 모나리자의 미소도 비너스상(像)도 이 성모님상보다 더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일 수 없을 것이라는 상상을 할 정도로 그 아름다운 자태(姿態)에 빠져들었습니다.

 

오후 3시 35분!

이윽고 미사가 시작되었고 김주영(루가)신부님은 강론에서 순교자를 옆에두고 순교자를 밟고 지나갈래 칼을 맞을래? 하는 질문을 받았을때 어떻게 처신할 것 인지를 물으시고

 

제주도를 단체관광 하던중 미사 시간이 됐을때 미사에 참석할것인지 관광을 계속 할것인지중 택일할 것을 물으시며 손을 들어보라고 하시기에 저는 쉬운쪽으로 과감히 손을 들었습니다. (쉬운쪽이 어느 쪽인지는 교우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신부님은 우리 모두의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을 기도 하는것이며 기도중에 응답은 침묵 자체가 응답 이라면서 하느님의 영광속에 그 분의 뜻대로 사는 것이 곧 우리자신을 위한 길이며 순교자들의 참뜻을 되살리는 길이라고 말씀하시며 일상생활속에서의 언행이 배교(背敎)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다짐하는 생활이 중요하며 부부싸움 끝에는 용서와 사랑으로 감싸야 한다는 말씀으로 강론을 마치셨습니다.

 

오후 4시 25분!

약 45분간에 걸친 미사가 끝난후 하마다 신부님의 인사 말씀에서 이성당은 프란치스코 성인(St. Francisco)께서 성당을 다시 지으라는 계시가 있어 건축하게된 축복 받은 성당이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신 후 일행들과 함께 기념사진촬영(사진 ) 등으로 아쉬운 석별(Sayonara)의 시간을 갖은 후 손에 소형 태극기를 들고 흔들며 환송하는 10여명의 일본인 교우들을 뒤로한채 4시 반경 나가사끼 원폭 중심지 기념관으로 향하였습니다.

 

오후 5시 5분경!

일행은 소위 국립장기 원폭 사몰자 추도 평화기념관(國立長崎 原爆 死沒者 追悼 平和記念館, Nagasaki National Peace Memorial Hall for the Atomic Bomb Victims)

(사진11.12) 이라는 이름도 거창한 기념관에 도착하였습니다.

 

제2차세계 대전이 끝날무렵인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Fat Man(뚱보)(사진13)이라는 원자폭탄의 투하로 나가사끼 시가지는 일순간에 폐허로 변하고 24만명의 시민중 7만 4천명이 희생되었고, 7만 5천명이 부상했으며 요행히 목숨을 건진 시민들이라도 일생을 두고 치유될수 없는 깊은 마음의 상처와 방사선 후유증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으로 시달려야만 했던 그 처참했던 순간들을 영상물과 사진과 실물등을 통해 접한 일행들은 일순간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과연 일본은 원폭의 일방적 피해자일 뿐인지 묻지 않을수 없고 기념관 옆에 일본이 제 2차대전때 이웃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동남아 국가에 끼친 엄청난 살육과 만행과 전쟁의 폐해를 함께 전시하며 통회의마음(Mind of Contrition)을 담은 전시관이 나란히 있다면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눌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기념관 전시 자료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나가사끼 의과대학 교수와 부인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부인은 원폭중심지 자택에서 원폭으로 형체를 알아볼수 없을정도의 처참한 모습으로 사망하였고 교수는 학교에 남아 다행히 목숨을 건져 집에가보니 부인은 사망하고 사망당시 손에 간직했던 묵주(Rosary)는 불에 그을린채 원형모습대로 남아 전시되어 있어 이를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도구를 소중히 여기시고, 아껴주시는구나 하는 믿음과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편 피폭당한 의대교수는 자신이 치료를 받아야하는 환자이면서도 얼마후 사망할때까지 피폭환자들을 돌보며 "우리에게 평화를!"(Grant Us Peace!)하며 세계 만방에 호소한 사연을 접했을때에는 가슴과 온몸이 찡하였음은 일행 모두에게 공동된 현상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기념관 전시장 유리를 통해 불에 그을린 그묵주를 보며 사연을 기록하려는 순간 경비원이 다가와 무언가(일본어)말하기에 잠깐 동안 「묵주사연 (영문)을 좀 적자고(영어로) 말했더니 뭐라고(일본어) 대꾸하기에 주변을 둘러보니 일행이 아무도 없어 순간적으로 관람시간이 끝나서 나가달라는 뜻이구나 싶어 (영어로) 잠깐만 양해해 달라고 해도 계속 뭐라고 하기에 타임아웃?(Time Out?)하니까 경비원이 예스, 예스(Yes, yes)하기에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35분 이었습니다.

이번 여행기간 중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일본인들의 영어실력이 짐작이 가는지라 그 경비원은 Time out! 과 Yes!를 아는 걸보면 상당한 지식층에 속하는 것 같은데 민간외교 교육은 받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만 더 관람하게 놔 두지...

 

오후 5시가 관람 마감시간인데 30여분이나 기다려줬으니 경비원이 많이 봐줬다고 이해하면서도 순간 화가나는 상태에서 묵주와 교수의 사연을 기록하지 못한 채 전시실을 떠난게 못내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념관을 나오려는 순간 원폭당일 멈춰선 시계(11시2분)(사진  )를 보지못하였기에 출입구 경비원에게 원폭시계가 어디에 있느냐고 (영어로) 물었더니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빨리 나가달라는 표정을 하며 서둘러 문을 닫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일본의 최대 피해국인 한국의 관광객들에게 단 몇분간의 배려나 친절을 베풀지 못하는 경비원들을 보면서 한편으로 경비원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시물중 피폭으로 정상인의 비장(脾臧)이 110g에서 400g으로 부풀어 오른 비장(Swollen spleen)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 전시물 제목「Markd Splenomegaly」의 Markd는 Marked가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오후 5시 40분. 일행은 원폭낙하중심지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은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고도 9600m 상공에서 투하된 원자폭탄이 마쯔야마마찌(松公町) 500m 상공에서 폭발하여 일순간에 인구 24만 여명중148천명이 사상(死傷)당하였는데 이 중 천주(기독)교 신자도 8500명이나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마쯔야마마치의 원폭 중심지에는 한사람의 소녀만을 남기고 주민 전원이 사망하였다고 하며 원폭낙하중심지 표지대 옆에는 동양 최대의 성당이라는 우라카미 성당(Urakami Cathedral)(사진1 ) 벽 기둥(Wall) 일부(사진1 )가 쓸쓸히 세워져 있어 당시의 참상을 말해 주는 듯 하였습니다.

(성당 입구 양쪽 잔해는 기념관내에 조형물로 재현하여 전시함)(사진1 )

+우라카미 성당(Urakami Cathedral)

1873년 천주교 금지령이 폐지된후 신앙의 자유를 얻은 우라카미 지역의 신자들이 33년에 걸쳐 축조한 성당으로 원래는 평화공원(원폭중심지)안에 있었으나 원폭으로 사라지고 현재는 성당잔해(벽돌기둥 1개)만 공원 한구석에 남아 있을뿐이며

 

지금의 성당은 1959년에 재건된 것으로 외관은 옛 모습 그대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취하고 있고 성당의 정면 출입구 양쪽에 두개의 쌍둥이 탑이 있는데 한개의 탑에는 '안젤라스의 종'이 다른 1개에는 원폭에서도 잔존한 '나가사끼의 종(鐘)'이 설치되어 있음.

 

그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나가사끼 원폭 조선인 희생자 비(碑)가 있었는데 비석에는 「1945. 8. 15 일본패전당시 강제 노동에 투입된 한국인이 2,365,236명에 이르렀고 나가사끼에 거주한 한국인 7만명 중 8월 9일 원폭으로 약 2만명이 피폭되었고 그 중 1만명이 폭사하였는데 뜻 있는 많은 일본인들의 도움으로 이 추모비를 세웠음」

「1979. 8. 9. 나가사끼 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원폭 낙하 중심지 공원에서 계단을 올라 조그마한 언덕에 이르니 평화의 샘(平和)이라는 인공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은 그 당시 죽어간 피폭자들의 목마른 영혼을 달래주기 위하여 조성한 연못으로 연못옆 석판에는 당시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소녀가 썼다는 수기가 새겨있어 그 당시 생존을 위한 처절한 절규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몹시 숙연해졌습니다.

목이 말라 견딜 수 없었습니다.

물에는 기름 같은게 떠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물이 마시고 싶어

그냥 기름이 떠 있는 채로 마셨습니다.

?? 소녀의 수기(手記)는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전 국회의원 페트릭 헨리(Petric Henny)가 행한 연설문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이라는 연설문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평화의 샘에 연이어 평화공원(平和公園)이 펼쳐져있고 저 만치에 거대한 평화기념상(像)(사진15)이 설치 되어 있었습니다.

 

우람한 체구의 평화기념상 (Statue)은 하늘을 향해 뻗은 오른손과 수평으로 뻗은 왼손, 그리고 가볍게 감겨있는 두눈의 모습이 서양인(남자)을 닮은 모습의 기념상은 나가가끼 출신 조각가 키따무라 세이보의 1952년도 작품으로 무게 10톤에 높이가 약 10m에 이르며 하늘을 향해 뻗은 오른팔은 전쟁(원폭)의 위협을, 수평으로 뻗은 왼팔은 평화를 상징하며, 감은 두눈은 희생자의 명목을 비는 뜻을 담았으며 주변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일본전역에서 보내온 종이학들이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戰犯國)이라는 사실을 애써 망각한채, 마치 자기네들이 오로지 원폭피해자인양 역사적 사실을 왜곡 강조하는 현장(사진  )만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 같아 동정심 보다는 왠지 씁쓸한 마음은 우리 일행 모두의 한결같은 마음일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1879년(3월14일출생)독일이 나은 세계적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955.8.18선종)이 원자폭탄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2차대전후 6,25동란전에 태어난 저는 한글과 영어대신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황국신민(臣民)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작고, 소담스러운것, 오밀조밀한 것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국민성에 비추어 엄청난 크기의 평화기념상을 제작, 설치한 것을 보면서 원자폭탄의 위력에 놀라 항복한 일본의 평화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절실했으면 저렇게 큰 기념상을 만들었을까하는 생각에 젖어 걷다보니 기념상 우측에 조각가가 석판에 남긴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하였습니다.

「Words of the Sculptor」

 

「This statue was created as a signpost in the cause of global harmony. Standing ten meters tall, it conveys the profundity of knowledge and the beauty of health and virility.

The right hand points to the atomic bomb, the left hand points to peace, and the face prays deeply for the victims of war.

Transcending the barrier of race and evoking the qualities of both Buddha and God,

it is a symbol of the greatest determination ever known in the history of Nagasaki and of the highest hope of all mankind.

 

Spring, 1955                 Seibo Kitamura. 」

이를 번역하면

「조각가의 변(辯)」

 

이기념상은 지구상의 화합을 위한 하나의 이정표로서 제작되었습니다.

(기념상이) 10m높이로 설치되어 있는 것은, 지식의 심오함과 건강과

힘찬활력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원자폭탄을, 왼손은 평화를

얼굴은 전몰자들을 위한 간구(懇求)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인종(人種)의 벽을 초월하고,부처님과 하느님의 섭리를 환기하면서

 

기념상은, 이제까지 알려져 있는 나가사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결의의 상징이자

온 인류의 최고의 희망의 상장이고 싶습니다.

 

     1955년 봄

세이보 키타무라

일행은 숙연한 마음을 간직한채 오후 6시 10분 주택가 주차장을 빠져나와 숙소로 가는길에 낮으막한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는 우라카미 주교좌성당(Urakami Cathedral)(사진1 )을 버스가 교통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40~50m 거리의 먼 발치서 겉 모습만 바라보았습니다.

 

주교좌성당 현관 양쪽에 두개의 종탑이 있는데 한개의 종탑에 설치한 종 (Bell)은 원폭당시 파손되지 않고 남아 있던 종, 소위 '나가사끼의 종(鐘)'이라는 사실에 원폭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묵주와 함께 하느님의 섭리를 느낄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일행은 숙소로 향하던도중 오후 6시 30분. 유메사이토 마트(夢彩都, You-Me Saito Mart)에서 모처럼 쇼핑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병영(兵營)생활을 하며 답답함을 느끼던 군인이 마치 외출나온 듯 홀가분한 기분이었습니다. 할인점에 들른 교우들은 대부분 지하 식품코너로 향하더니 특색있는 일본식품(라면, 차류, 가스테라등)과 간단한 선물을 구입(저는 조깅화를 3만원에 샀음)한후 승차한 일행은 오후 7시 35분에 어둠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하는 나가사끼 시가지를 빠져 나와 저 멀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야산 꼭대기에 위치한 야타로 여관(矢太樓南館)(Nagasaki Yataro Minamikan, 長崎市 風頭町)(지도3)에 오후 8시경 도착하여 여장을 푼다음, 일, 중식 혼용세트 메뉴로 한 시간동안 저녁식사를 하였는데 준비해간 잘 익은 기무치(김치)와 잘 구은 하이타이(海苔, 김)가 어찌나 맛있던지...

 

일본체류 2일째의 잠자리는 일본인들이 일상생활속에서 취침전에 즐긴다는 온천욕으로 하루의 피로를 푼다음 간단한 산책을 한 후 10시 반이 넘어서야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하는 저녁기도를 한 후 (저를 제외한 신부님을 비롯 사목 위원님등)잠을 청하였습니다.

 

일본여행 3일째인 9월 3일 토요일!

새벽 2시 45분에 잠이 깬 저는 10여분간 뒤척여도 잠이들지 않아 곤히 자고있는 두형제의 안면(安眠) 방해를 우려해서 3시 10분경 조기축구 유니폼 차림으로 이번 성지순례 여행기를 쓸 자료와 필기구를 챙겨 방에서 나왔습니다.

 

9층 현관로비(지상 10층 건물이기는 하나 산등성이에 축조된 건물구조상 9층이 1층 역할을 함)로 나왔으나 여관 근무자들도 잠을 자고 있어 글을 쓸만한 장소를 찾지 못하던차에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Seek, and you will find)라는 예수님의 말씀(마태복음 7장 7절)대로 승강기 바로 정면 벽에 있는 거울아래 꽃바구니가 놓여있는 탁자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 있는데다 의자까지 놓여있어 그곳에서 자리를 잡아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린 다음, 여행 첫날의 사연들을 기록하기 시작하여 한참을 쓰고 있으려니 5시를 알리는 시계 괘종소리와 함께 로비에 불이 밝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직원들의 오전 일과가 시작된 거지요.

 

나가사끼의 야경(夜景)(사진/지도  )은 고베, 하꼬다데와 함께 일본의 3대 야경에 들어간다고 하였으나 일본인들의 철저한 절전의식 때문인지 먼동이 트이기 시작하는 나가사끼 항구의 야경은 저에게는 한마디로 별로로 느껴졌습니다.

 

서서히 동창(東窓)이 밝아오자 노고지리 우지짖는 소리는 안들리는 상태에서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신부님은 전날밤에 익일 오전 6시 30분에 미사가 있다고 말씀 하셨는데 저는 미사 참석이냐 아니면 조깅을 통하여 나가사끼의 아침 시가지의 참 모습을 둘러 봄으로써 일본을 이해할 기회를 가질것이냐 양자택일의 문제였습니다.

 

고민을 거듭하다 예수님과 신부님께 마음속으로 양해를 구한후 새벽공기를 가르며 예수님께서 임하실때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곳으로 더낮은곳으로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숙소에서 나와 아래로 아래로 향하여 뛰기 시작한지 채 1분도 안되어 길 양옆으로 공동묘지가 나타났고 공동묘지는 시가지와 붙어있는 곳까지 뻗쳐 있었습니다.

 

묘지를 뒤로하고 바다를 향해 곧장 뛰었는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바로앞에 어제오후 방문했던 나시자카고엔 26인 성지(聖地) 이정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어요?

 

나즈막한 언덕배기에 위치한 성지를 향해 달려가 26성인 조각상 앞에서 저도 모르게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고 「두 줄기 눈물속에」 가슴에 묻어둔 소원을 빈다음 26성인 기념관 입구에 들렸다가 다시 방향을 선회하여 산꼭대기 숙소를 향해 뛰기 시작 하였습니다.

 

조깅거리의 시가지는 참으로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였으나(인도에서 빈 담배값 1개 유일하게 발견)아침 6시가 훨씬 넘었는데도 차량 통행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공원에서나 길거리에서나 사람은 간간히 노인들만 혼자서, 혹은 애완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을 보고 "젊음이 없는곳에 활력이 있을수 없고 활력이 없는곳에 번영의 꽃이 필수없다"고 제 나름대로 규정짓고 세계일류 경제대국 으로서의 활력보다는 노쇄해가는 일본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약 55분간의 조깅 끝에 6시 30분 숙소로비에 도착한 저는 땀에 흠뻑젖은 상태에서 환갑을 넘긴 근무자 두분에게 약 1시간만에 26성인순교지를 다녀왔다고하자 두눈이 휘둥그레지며 소-오데스까?(そうですか?/정말 그랬어요?) 하고 놀라며 연신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제가 조깅해서 바닷가에 다녀오겠다고하자 여관 바로 옆에 위치한 풍두 공원에나 다녀오라고 제의 했는데도 26인 성지까지 다녀왔다고 했으니 그럴 수 밖에요.

 

 

?? 그 사이 카운터 위에 있는 외국인 응대용 안내문인 "여권좀 보여주시겠어요?"

제목하의 영문에서 복수(S)표기가 누락 되었음을 근무자에게 고치도록 조언해 줌.

- May we see your passport(s)?  (생략) their passport(s)

passport를 Passports로 해야함.

 

 조깅뒤끝에 땀을 뻘뻘흘리며 근무자와 얘기를 나누는도중 미사에 5분 늦은 자매님 두분이 나를 알아보시더니" 공부만 열심히 하면 뭐해 미사에 참석 해야지"하며 미사가 집전되고 있는 방으로 향하는 순간, 저는 가슴이 뜨끔해져서 나와 같은 교우가 또 있는지 알아볼겸 미사실 문앞에 까지 가서 교우들의 신발수를 대강 세어보니 100켤레가 넘는걸 확인하고는 아뿔사! 나만 빠진 모양이구나...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기왕에 엎질러진 물! 주워담을수는 없는 것. 그길로 여관안에 있는 온천장으로 가서 목욕재계하고 헐레벌떡 뷔페식당으로 뛰어가 뒤늦게 아침식사를 마친다음 일본에서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숙소를 떠났습니다.

 

오전 8시 25분!

일행은 '야타로여관을 떠나 미니데지마(出島/출도, Mini Dejima)로 향했습니다. 당초 데지마는 1636년 바다로 메워만든 부채꼴 모양의 약 4천평에 달하는 인공섬으로 당시 서양인들 즉 포르투칼인들이 일본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을 격리시켜 놓은곳이었으나 현재는 그 당시의 모습은 사라지고 미니어쳐(축소모형도, miniature)형태로만 남아 있을뿐인데 미니데지마섬과 육지와의 사이에 흐르는 폭 약 10m의 개천같은 바닷물길은 너무나 깨끗한 청정해역 그 자체였습니다.

 

9시 35분!

일행을 태운 버스는 약 30분을 달려 나가사끼 시가지를 벗어나 외딴섬에 자리한 나가사끼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1시간여 동안 쇼핑과 휴식을 취한 후 서울행 비행기(KE794)에 탑승하였고 예정시간(11시 10분)보다 17분 늦은 11시 27분에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 일본을 뒤로한채 바다위에 높이 떠있는 하얀솜털같은 구름위를 1시간 여의 비행끝에 낮 12시 44분!

 

비행기는 우리의 영원한 조국 대한민국 인천국제공항에 사뿐히 내려 앉은후 입국수속을 마친 일행은 대기중인 버스로 우리모두의 삶의 보급자리와 그리운 가족이 있는 그곳. 창 4동으로 귀가함으로써 실로 77시간의 짧고도 긴 일본 나가사끼시(市)성지순례의 여정(旅程)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저는 3일간의 일본(나가사끼)성지순례 기간동안

  일본인들의 근검절약(승용차의 약 60%가 600cc급 소형차, 시가지의 어두움) 정신과 청결함, 친절함, 느긋함, 잘가꾸어놓은 집안 정원과 산야(山野), 남에게 결코 폐를끼치거나 신세지기 싫어하는 개인주의적 국민성은 한편으로는 본받아야 겠지만

 

 ② 노령인구의 증가와 젊은층의 감소현상으로 인한 사회전반의 노쇄화, 제2차 대전의 전범국으로서 천인공노할만행을 이웃나라 공동체에 저질러놓고도 자신들이 마치 피해자인양 꾸며놓은 수 많은 조형물과 기념관에서 그들의 이중성을 느낌과 동시에

 

  일본인들보다 우리국민들의 신체적조건과 외모(얼굴, 이빨)가 상대적으로 훨씬 더 잘생겼다는 사실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으며

 

 ④ 저와 얘기를 나눈 일본인들이 비록 단편적이고 피상적이기는 하지만 English, Yes, No, Time out 수준의 영어실력을 접하면서, 21세기 제4의 물결(정보기술/IT, 생명공학기술/BT)이 세계무대를 넘실대는 이 순간, 우리의 능력과 지혜를 결집하면 '동방의 등불' 대한민국이 세계의 등불(등대)이 필수 있다는 생각을 감히 해보았습니다.

 

일본(나가사끼)성지순례를 다녀온후 두 번째 교중미사(9월11일)에서 제자 베드로(Peter)가 예수님께 "주여,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일곱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 하여라" (I do not say to you, up to seven times, but up to seventy times seven)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우리는 임진왜란 7년과 치욕의 을사늑약(1905년)과 뒤이은 한일합방(1910년)이후 36년간의 일제치하에서 일본인들이 우리조상과 부모형제 들에게 저지른 만행에도 예수님의 말씀이 적용되어 그들을 용서만해야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는지는 선 뜻 판단이 서지 않아 성지순례를 함께하신 교우여러분 스스로의 판단에 맡기고자 합니다.

 

아프리카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남아프리카 공화국대통령을 지냈고, 최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지도자로 선정된 넬슨 만델라는 30년간 외딴섬에서의 감옥생활끝에 1990년 대통령이되어 흑,백인종간의 갈등을 종식하고 인종간 모든 차별을 금지하는 새 헌법을 1996년 공포하면서 백인들이 저지른 모든 만행과 범죄를 사과(죄)의 바탕위에 용서와 화해를 했음은 우리가 일본인들에 대한 용서와 화해를 위한 타산지석이자 심판의 기준이 되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끝으로 이번여행에 동참할수 있게 배려해주시고 유머(Humor)와 위트(Wit)가 장점인 반면... 7500여 교우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제시는 김주영(루가)신부님과성당일이라면 불철주야, 노심초사, 희생과 사랑과 봉사로서 수고하시는 이기연(루시아) 여성총(구역) 장겸 부회장님께 감사드리고

 

심기일전(心機一轉)새로운 각오로 예수님과 성모님께 한발짝 더 다가갈것을 다짐하면서 짧고도 긴 일본순례기(記)를 마무리하면서 이 순례기를 춥고 배고픈 분들을 보살피시고, 어루만져 주시고, 보듬어 주시는 우리 신부님과, 성지순례를 함께 다녀온 109명 교우 여러분, 그리고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일터에 나가느라 함께 하지못한 홍 아가다에게 바치고자 합니다.

 

순교자 성월, 헌미, 헌금 봉헌의 달 9월을 맞아

남을 동정할줄 모르는자가 어떻게 자기죄에 대한 용서를 청할수 있겠는가?(집회 28.4)라는 성경말씀을 되새기고

 

인간의 사고방식은 꿈과 생각의 크기만큼 성장한다고 하였는데 일본인들이 즐겨 많이 기르는 관상어 중에서 '코이'라는 잉어는 작은 어항에 넣어 기르면 5~8cm밖에 자라지 않으나 큰 수족관이나 연못에서 기르면 15~25cm까지 자라며, 강물에 방류하면 90~120cm까지 성장한다고 하니 일본인들의 사고방식도 대승적인 차원에서 자기네들이 결코 원폭피해자만이 아닌 이웃국가 공동체에 대한 한(限)없는 가해자라는 사실인식과 참회를 통해 60억 세계인구 공동체의 평화스런 삶에 이바지하는 국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보면서

 

440만 한국 천주교 교우들의 영원한 언니, 누나인 이해인(클라우디아) 수녀님의 「가슴으로 읽으면 하늘이 듣는다」는 그 시(詩) 순교자 성월에 즈음한 시한편(무명의 순교자 앞에)을 음미 하면서 주님의 은총속에 무사히 귀국 하였음을 감사 드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교우여러분!  사랑해요♡

 

                 2006. 3. 13

 

일본(나가사끼)성지 순례여행 (9. 1~ 9. 3)을 다녀온    이신백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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