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5월1일 노동자인 성 요셉의 축일♬For the beauty of the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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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5-01 ㅣ No.1135

 

Christ in the Carpenter’s Shop-LA TOUR, Georges de

1645 Oil on canvas, 137 x 101 cm Musee du Louvre, Paris

 

5월 1일

노동자 성 요셉

St. Jpseph, Opificis sponsi. B. M. C. Conf

St. Josephus

 

교회 전체의 주보로 공경받을 뿐 아니라 노동자, 가정, 동정녀, 환자, 임종하는 자의 주보이기도 하다.

교황 비오 11세는 요셉을 무신론적 공산주의와 투쟁하는 자들의 주보로 정하였고(1973년),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나자렛 성가정의 보호자 성 요셉에게 ’노동자의 수호 성인’이라는 호칭을 부여하였다.

1955년 5월 1일에 교황 비오 12세는 이 날을 노동자 성 요셉 축일로 선포하였다.

요한 23세는 성 요셉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보호자라고 불렀다 (1961년).

한국 교회는 성 요셉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더불어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공경한다.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성 요셉 축일을 예수 부활 후 셋째 수요일에 지내오다가 3월19일로 성 요셉 대축일을 정했습니다.

또한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1956년에 5월 1일을 노동자의 날로 정하시고, 노동자 성요셉 축일을 설정하여 요셉 성인이 모든 노동단체의 모범이 되시고 보호자가 되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셉 성인의 표양을 본받아 활동을 하고 기술을 익혀야 하며, 요셉 성인의 정신으로 자기 책임을 완수하면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세상을 다스리고 번영을 도모하여 영원한 생명의 상급을 얻어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나자렛 성가정의 보호자이신 요셉성인은 자신을 본받아 따르는 모든 이에게 보호와 은총을 누리도록 빌어주시며, 그들의 거룩한 가정을 번영하게 하여 주시리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예수님을 평범한 인간 생활로부터 떼어 놓지 않으려는 계속적이고 필연적인 노력의 하나로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님이 목수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강조했다.

이 목수의 일에 따른 만족과 고통은 모두 요셉에게서 이어받은 것이 분명하다. 인간은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뿐 아니라 창조하는 것에서도 하느님을 닮았다. 인간이 탁자를 만들든지 대성당을 세우든지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손과 마음으로 결실을 거두라는 소명을 받은 것이며, 궁긍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창세2,15)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이 창조 사업을 계속하도록 명하셨다. 인간은 가정을 이루거나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는 그들의 노동 안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발견한다. 노동자인 요셉은 우리가 창조의 가장 깊은 신비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 활동에 참여하도록 도와준다.

 

비오 1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를 강조했다.

"세상의 구세주이시며 신인(神人)이신 분으로부터 그대와 모든 사람에게로 영이 스며들어 온다. 그러나 그 어떤 노동자도 예수님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노동의 공동체를 이루며 가정 생활을 했던 예수님의 양아버지 요셉보다 더 깊이 그리고 더 완전하게 창조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한 것이 명백하다. 따라서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고자 원한다면 우리는 오늘날에도 ’요셉에게로 가자.’(창세41,55)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다."

 

예수의 작은 형제회 소속인 르네 브와이욤은 그이 저서 ’사람의 서리에서’에서 일상적 노동과 성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예수님의 성덕은 가장 일반적인 생활 환경 안에서도 하나의 실재가 되었다.

언어 생활,가정 생활,한 마을의 사회 생활이 성덕이 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이것은 가장 암담하고 단조로운 인간 활동도 하느님 아들의 완덕에 온전히 적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신비와 관련해서 하느님의 아들에게만 고유했던 이 복음의 성덕은 생계를 위해서 노동을 해야만 하는 가난한 사람의 일상 생활환경에서도 가능하다는 확신을 내포하고 있다."

 

"천주여 외로운 요셉을 택하시어 당신 아들의 유년시절과 소년기를 돌보게 하셨으니, 우리도 형제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게 하소서,

또한 사람들에게 땅을 맡기시어 그것을 개발하고 다스리게 하셨으니, 우리가 세상에 열심히 일하여 당신의 영광을 이루게 하소서(성무일도 청원기도)."

 

◎ 주님,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이며 누리가 나기도 훨씬 전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하느님께서는 계시나이다. ◎

○ 사람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당신께서는 말씀하시나이다,

  "인간의 종락아, 돌아가거라."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비슷하나이다. ◎

○ 날수 셀 줄 알기를 가르쳐 주시어, 저희들 마음이 슬기를 얻게 하소서.

  주님, 돌아오소서, 언제까지오리까? 당신의 종들을 어여삐 여기소서. ◎

○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당신께서 하신 일을 종들에게 보이시고, 당신의 영광을 그 자손에게 보이소서. ◎

 

 

 

 

 

 

성서에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 55)라는 말이 있다. 이로 보아 당시 유다인들은 예수를 목수인 요셉의 아들로 생각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성가정의 보호자로 선택된 요셉은 자기 본 직업인 목수로서 일생을 보내며 성자를 무난히 양육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도 30년간의 나자렛의 사생활에서 목수 일을 하시어 양아버지인 성 요셉을 도와드렸으리라는 것이 수긍된다.

 

과거 어느때보다도 현재처럼 노동 문제가 복잡해진 때는 없을 것이다. 교회에서는 이미 수차 노동 문제에 관한 칙서 즉 사회 질서의 대헌장을 반포함으로써 심각해진 노동 문제를 해결해 주고 노동자들의 앞길을 명시해 주며 철저한 노동 정책을 수립하도록 세계에 호소했던 것이다. 교회의 입장에서 노동의 신성성을 주장하며 교회의 정신에 입각한 노동 정책을 수립하도록 하고 인간의 품위와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인간 본연 목적을 달성시키고자 여러모로 노력해 왔다.

 

역대 교황의 유지를 받들어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저 장인(匠人)들과 노동자들이 성 요셉을 자신들이 보호자로 삼고 그의 모범을 본받아 나가기를 원했다. 그 이유는 성 요셉과 또한 예수께서 목수일을 하시고 노동을 좋아하시면서 자기 정신을 연마했으므로 당연히 목수의 아들로 불려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써 그들의 노동자 사회가 건전히 발전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각 개인에, 각 가정에, 또한 그들의 단체에 항상 같이 계셔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마로 노동 조합체의 특별한 목적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보다 나은 그리스도교적 신자생활을 영위하고 더욱 향상시키며, 하느님의 나라를 널리 전파하며 특히, 공장의 동료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노동 조합체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커감에 따라 비오 12세 교황게서는 1955년 5월 1일, 로마에 노동자들의 모임이 있어 수많은 군중이 베드로 대성전 앞뜰에 모였을 때 그들을 훈시하며 노동 조합체의 결성을 간곡히 요쳥하셨다.

 

그 이유는 현대에 있어서 이것이 장인이나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교리를 당연히 닦게 하고, 그릇된 사회 조직과 경제적 오류를 피하도록 하며, 또한 교회에서 직공들의 권리나 의무에 대해 설명한 바와 같은 하느님께로부터 규정된 윤리적 질서를 잘 납득해서 좋은 결실을 내며 효과있게 처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처음으로 이 문제에 관해 불변하고 가장 능률있는 원칙을 전파하셨고 또한 교회에 전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동의 품위와 원칙은 동일한 것을 형성하며 인간의 마음속에 더 널리 잠재하고 있는 것을 간파하신 비오 12세 교황께서는 노동자 성 요셉의 표준 축일을 설정하고, 성 요셉이 모든 단체의 모범이 되고 보호자가 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표양을 따라 누구나 활동을 하고 첫째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지상을 지배하며 경제적 번영을 도모함과 동시에 영원한 생명의 상급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 요셉은 나자렛 성가정의 보호자이신만큼 자기와 비슷한 일을 하는 자에게 보호와 은총을 내려 주며 그들의 거룩한 가정을 번영케 해 주리라는 것은 의심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가장 적합하게도 교황께서는 이 축일을 5월 1일에 지내도록 명했으며, 노동자들은 그 날을 집회의 날로 채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발전이 기대될 것이며 특히 이 날은 목수인 성 요셉에게 봉헌되어 모든 미움과 논쟁은 감소될 것이고 세월이 갈수록 평화가 없는 나라의 사람들도 점점 행복하게 될 것이다. 또한 각국의 지도자들도 각성해 인간 사회가 요구하는 올바른 질서를 현명하게 처리해 나아가게 될것이다.

 

 

 

 

나자렛의 겸손하고 위대한 노동자 성 요셉의 모습은 전 인류의 구원자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인간의 삶에 직접 뛰어들어 그 고난에 동참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렇게 하여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 역사에 동참하고 완성케 하는 신비한 능력을 인간에게 주는 것이라고 노동관이 성립되었고 이것은 인간의 진정한 노동가치에 눈뜨게 해주었다.

 

현대인들은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와 인격의 존엄성을 주장하게 되면서 이러한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사회적 투쟁으로 인하여 자신의 이익에 손실을 보게된 일부 그리스도 신자들이 이러한 노동자들의 사회적 요구를 자주 외면해 왔다. 바로 이 점이 많은 현대인들의 눈에 5월 1일이 마치 교회에 대항하는 노동자 계급의 투쟁으로 비치게 된 이유이다.

 

이제 교회는 노동의 현실적 가치를 존중하며, 정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몇 나라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투쟁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옹호하기 위하여 ’노동 축일’을 중요시한다. 또한 신도들에게 성직자들이 최근 들어교황 요한 23세의 교서(Mater et Magistra)나 바오로 6세의 교서(Populorum Progressio)를 통하여 끊임없이 일깨워주려 하는 내용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한 까닭이기도 하다.

 

’노동 축일’ 기간에 우리는 노동자 성 요셉의 보호아래 구원의 상징인 성찬 예식을 갖는다.

성찬 예식은 육일간의 창조속에서 일하신 하느님께서(창세 1-2장)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이루기 위하여 제7일에도 그의 일을 계속하시기 때문에(요한 5,17) 그리고 이제 새로이 하느님의 아들이 된 우리가 동참하는 이 새 창조는 근본적으로 성찬 예식을 통하여 완성되기 때문에 이 성찬 예식은 자연적 가치이상의 더욱 고귀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성찬 예식은 현대의 기술 사회속에서 그 목적이나 동기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가치를 나타내주기 때문에 ’노동 축일’속에서 그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새 창조를 이루기 위한 이 ’새’ 일은 자연적인 법칙을 따르지만, 우리를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느님의 아들의 자리까지 이끌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하느님을 위한 일(요한 6,27-29;골로 3,23-4,1;1고린10,31-33 비교) 또는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행위(성경적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성찬’이 된다)에 대하여 말한다면 신약에서는 인간의 노동은 은총과 그 은총에 활기를 더해주는 사회적 의미에 의하여 이미 ’새 세계’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사도 18,3;20,33-35;에페 4,29 비교)

 

우리들이 성찬 예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시작하신 일에 우리가 더욱 밀접히 참여하도록 허락해줌과 동시에 그것이 하느님의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길이며 모든 노동의 목적은 새로운 왕국의 건설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면서 우리가 인간적인 노동에 헌신하는 것조차 성화시켜 주는 것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에서 (Nn. 33-34)

 

우주 안의 인간 활동

 

인간은 자기 노력과 재능을 다하여 자신의 생활을 발전시키려고 언제나 분투해 왔다. 현대에 와서 인간은 특히 과학과 기술의 도움을 받아 그 지배권을 거의 자연계 전체에 확장했과 또 계속 확장하고 있다. 또 무엇보다도 국가들 사이의 여러 가지 교류 수단이 증가함에 따라 인류 가족은 점차 전세계의 한 공동체임을 자각하며 그렇게 형성되어 가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한때 초 인간적인 힘에 의존하던 많은 혜택을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 할 수 있게 되었다.

 

전 인류에게 퍼져 가는 이 거대한 노력 앞에서 인간들에게는 많은 문제점이 생긴다. 인간 활동의 의의와 가치는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 개인적 내지 사회적 노력은 도대체 무슨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가?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위탁받아 보존하며 거기서 종교적 내지 윤리적 분야의 여러 원리를 찾아내고 있으므로, 개개의 문제에 언제나 즉각적인 해답은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근에 인류가 걷기 시작한 행로를 비추어 주기 위해서 계시의 빛을 모든 사람의 경험에 결부시키고자 한다.

 

인간이 세기를 통하여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노력해 온 이 거대한 노력은 그 자체가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한다는 것이 신자들에게는 명백한 일이다. 과연,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의롭고 성스럽게 우주를 통치하고,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인식하며 자신과 전우주를 하느님께 바쳐 드리라는 명을 받았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을 인간에게 복종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이 전우주에 빛나도록 해야 한다.

 

이 명령은 또한 일상 노동에도 적용된다. 자기와 가족들의 생활 유지를 위하여 노동하면서 동시에 사회에 적절히 봉사하는 남녀는 자신의 노동으로 창조주의 사업을 계속하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며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데에 개인의 노력으로 이바지한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인간이 스스로의 재능과 힘으로 만들어낸 것을 하느님의 권능에 배치된다거나 이성을 가진 피조물을 창조주의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인류의 승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증거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의 결실이라고 확신한다. 인간의 능력이 커질수록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의 책임도 더욱 확대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우주 건설에서 인간들을 외면시키거나 동료들의 복지에 무관심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도록 강력히 촉구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사제의 설교에서 - 충실한 양부(養父)이시며 보호자이신 성 요셉

 

 

하느님께서는 어떤 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실 때 다음과 같은 일반 법칙에 따라 하십니다.

즉 특별한 은총을 주시려고 혹은 특별한 위치에 올리시려고 어떤 사람을 택하실 때 그 사람에게 자기 직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은사를 베푸십니다. 이러한 법칙은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양부이시며 세상과 천사들 여왕의 참된 배필이신 성 요셉에게 훌륭히 실현되었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요셉을 당신의 가장 고귀한 보화이신 외아드님과 성모님의 부양자(扶養者)와 보호자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이 직분을 충실히 완수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착하고 충실한 종아, 네 주인의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요셉을 그리스도의 온 교회와 관계하여 생각해 본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아무런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가장 정당한 길로 오시도록 하느님께서 간택하신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교회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받았기에 동정녀께 큰 은혜를 입고 있다면, 동정녀 다음으로 요셉에게도 특별한 은혜를 입고 있으며 그에게 감사와 공경을 바쳐야 합니다.

 

요셉은 구약의 완성입니다. 요셉 안에서 예언자들과 성조들이 받은 약속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예언자들과 성조들에게 약속으로만 주어졌던 것이 이제 실현된 것을 요셉 홀로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계시던 동안 당신의 아버지로서 요셉에게 보여 주셨던 그 친밀성과 지극한 존경심을 하늘에서도 거부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더 완전히 보여 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자, 네 주인의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사람의 마음 안에 들어가는 것은 그 사람이 행복한 일이지만 주님께서 오히려 당신의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상징적으로 그 기쁨은 단순히 사람의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사람을 감싸주고 마치 하느님의 끝없는 심연 속에 삼켜지듯 사람을 흡수해 버린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복되신 요셉이여, 우리를 기억하시어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로 여긴 그분께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소서.

또 당신의 정배이시며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의 자비를 얻어 주소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세세에 영원히 생활하시고 왕하시나이다. 아멘(Sermo 2, de S. Ioseph : Opera 7, 16. 27-30).

 

 

 

 

♬For the beauty of the earth - Rutter- Anthony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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