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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리그마 중에서만 오로지 디다케가 가능할 수 있다 didache [번역오류] 869_tran KH_errors 1293_evangel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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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13 ㅣ No.1602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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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다음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게 최근에 주어진 질문입니다:

 

질문 1: "케리그마" 와 "디다케" 의 차이점이 무엇인지요?

 

그리고 다음은, 위의 질문을 받고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그 자리에서 바로 드린 답변입니다:

 

질문 1에 대한 즉답(卽答): "디다케(Didache)"는 기원후 1세기에 저술된 교회의 문헌의 명칭으로서, 지금의 시리아 지역의, 그 저자가 누군지 모르는, 그리스도인에 의하여 기록된, 초기 교회 시절의 교회 규범서, 사도들의 규정/지시사항들 등이 기록된 문헌이며, 신약 성경의 한 경전으로서 채택될뻔한 교회의 소중한 문헌입니다. 예를 들어, 이 문헌에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라는 지시가 주어져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케리그마(kerygma)"교회(Church, Ecclesia)와 관련된 용어인데, 이 단어는 "디다케" 라고 불리는 문헌과는 그 수준(level)이 다릅니다. "케리그마" 에 대하여서는 다음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간략한 답변 끝)

 

게시자 주: 

(1)"디다케(Didache)" 문헌에 근거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767항을 발췌 인용하고 있는 다음의 글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770.htm

 

(2)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이 "Didache" 문헌에 대한 설명은 다음에 있다:

http://www.newadvent.org/cathen/04779a.htm

 

(3) 그리고 영문본 "디다케(Didache)" 전문은 다음에 있다:

http://www.newadvent.org/fathers/0714.htm

(이상, 게시자 주 끝)

 

          그리스어 단어인 "케리그마(kerygma)" 라는 교회에 관한 용어의 의미는 교회의 여러 양상들을 나타내는 다른 용어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다음에 말씀드리겠다고 답변을 하였던 것인데, 아마도 제가 즉시 드렸던 위의 답변이 만족스럽지 못하였던지, 질문을 주신 분께서 다음과 같은, 더 구체적인, 두 번째 질문을 하셨습니다:

 

질문 2: 복음 선포는 "케리그마"적(的)으로 하여야 하지, "디다케"적(的)으로 하면 아니 된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지요?

 

바로 이 두 번째 질문에 의하여, 애초의 질문이 "케리그마(kerygma)" 와 "디다케(didache)" 라는 그리스어 단어들의 의미의 차이점에 관한 질문임을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드디어 알아차리게 되었는데, 그런데 ... 

 

복음 선포에 관한 이 두 번째 질문을 듣고서 필자가 우선적으로 즉시 느낀  것은,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복음 선포의 효능(efficacy)과 결과(effect)는, 당연히 그리고 전적으로, 강생하신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power)과 권위(authority)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복음 선포의 전달자의 역할을 하는, 피조물인, 한 인격(a person)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느낀 것은, 복음 선포도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그 수준을 달리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즉,

 

(i) 외인들, 즉,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지 않은 자(비신자)들 쪽으로 복음 선포의 방식 및 내용과,

 

(ii)  예를 들어, 세례를 받은 후에 주일 교중 미사에 참례하는 교우님들 쪽으로 복음 선포의 방식 및 내용은

 

동일할 수 없고 또 동일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초기 교회 시절에, 외인(비신자,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지 않은 자)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고자 하는 의향을 가졌으나 그러나 아직 그리스돌교 세례를 받지 않은 입교 희망자(예비 신자)들에게도, "신앙의 신비(the mystery of faith)"에 대하여, 즉 성변화(transubstantiation)에 관하여 가르치지 않았고, 세례를 받은 후에라야 비로소 이들에게 이 신비에 관하여 가르쳤다고 잘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점들은, 주신 두 개의 질문들로부터 분명하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를 들어, 세례를 받음으로써 입교하여 신앙 샣활을 하고 계신 분들 쪽으로 복음 선포의 방식 및 내용이,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지 않은 분들 쪽으로 복음 선포의 방식 및 내용과 항상 반드시 동일하여야 한다고 누군가가 주장한다면, 그럴 경우에, 복음 말씀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가능하게 할 수도 있는, 소위 말하는, 성화(snactification)의 단계에 있어서의 완미(perfection)로의 접근은 어떻게 진행될 수 있겠는지요???

 

2. 주의 사항 한 개

2-1. 다음은 바오로 6세 교황님1975년 12월 8일자 교황 권고[제목: EVANGELII NUNTIANDI(현대의 복음 선교)] 제22항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paul_vi/apost_exhortations/documents/
hf_p-vi_exh_19751208_evangelii-nuntiandi_en.html

(발췌 시작)

This proclamation - kerygma, preaching or catechesis - occupies such an important place in evangelization that it has often become synonymous with it; and yet it is only one aspect of evangelization.

 

바로 이러한 선포 - 케리그마(kerygma), 설교(說敎) 행위(preaching) 혹은 교리교육(catechesis) - 는 복음화(evangelization)(*)에 있어 자주 복음화와 동의어인 것이 될 정도로 한 개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오로지 복음화의 하나의 양상일 뿐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2-1: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2월 7일]

(0) "복음화(evangelization)" 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 등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10.htm <----- 필독 권고

[이상, 내용 추가 끝]

 

(1)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케리그마"란 설교(說敎) 행위(preaching) 혹은 교리교육(catechesis)을 말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설교(說敎) 행위교리교육이 등가인(equivalent) 것임을 말하는 "케리그마" 라는 용어를 말씀하고 계심에 주목하십시오.

 

(2) 위의 교황님의 권고의 본문 전체에서 "케리그마"라는 단어는 단 한 번 사용되고 있는데, 이 교황님께서는 그리스어 "케리그마"라는 단어의 세속의 사전의 의미가 아닌, 이 교회의 용어의 의미/개념을 설교(說敎) 행위(preaching) 혹은 교리교육(catechesis)이라고 정의(define)를 한 후부터는, 당신의 권고의 본문에서 "케리그마"라는 용어를 사용하여도 무방한 자리에서, 대신에, 설교 행위 혹은 교리교이라는 용어들만을 사용하셨다는 생각입니다.

 

(3) 사실 신약 성경이 한 권의 책으로 등장하기 한참 전인 초기 교회 시절에, 특히 성 베드로(St. Peter)와 성 바오로(St. Paul) 등의 사도들과 이들의 직계 후계자들인 주교들이 하였던 설교(說敎) 행위(preachings)들 그 자체가 바로, 소위 말하는, 신앙의 유산(the deposit of faith)에 근거한 그리스도교 교리교육 전부였기 때문에, 따라서, 혹시라도 여태까지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제대로 학습한 적도 없고 또 가톨릭 교회의 교리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그리하여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일부 봉사자들이, 가톨릭 교회의 교리 지식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감추기 위한 한 방편 혹은 수단으로서, 복음화라는 미명 아래에서, 입교를 원하는 분들과 초심자들에게 반드시 주어져야 하는 세례준비 교리교육 자체를 배제하기 위한 목적 혹은 의도로 "케리그마"라는 용어를 사용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말씀을 이 교황님께서 하고 계심에 또한 주목하십시오.

 

(4) 바오로 6세 교황님에 의한 그리스어 "케리그마(kerygma)" 라는 용어에 대한 정의(definition)에 충실하게 이번 글의 제목, "케리그마 중에서만 오로지 디다케가 가능할 수 있다" 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하여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제목을 선택한 또다른 이유는, 일부 개신교측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디다케(didache)" 라는 그리스어 단어를, 국내의 가톨릭계에서, 특히, 위의 질문 2에서와 같은 이분법적 표현으로, 가톨릭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 "교리교육(catechesis)[혹은 교리교수학(catechetics)]" 이라는 표준 용어 대신에, 어떻하다가 그리고 무슨 특별한 이유로 사용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2월 5일]

예를 들어, 다음의 논문에 의하면, "케리그마(kerygma)" "디다케(didache)" 라는 그리스어 단어들로써, 위에서 이미 안내해 드린 바오로 6세(Paul VI, 1897-1978년) 교황님(교황 재위 기간: 1963-1978년)용어 정의(definition)와 다르게, 이분법적 구분을 처음으로 하기 시작한 자들은, 가톨릭 믿음과 관습에 적대적이었던, 20세기의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자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년)과 그의 한 명의 동료인 도드(C. H. Dodd, 1884-1973년)였다고 합니다:

 

출처 1: http://www.christendom-awake.org/pages/trower/kerygma-and-didache.htm

출처 2: http://thewandererpress.com/frontpage/kerygma-didache-and-the-new-evangelization/

출처 3: "Dodd" "Bultmann" "didache" "kerygma"

(출처 2로부터 발췌 시작)

The first people to think of making this distinction between kerygma and didache were the Protestant theologian Rudolph Bultmann and an associate called Dodd for reasons which it is not necessary to go into in this article.


The only point I will make here is that, in the hands of thinkers hostile to Catholic belief and practice, distinguishing between the kerygma and the didache can be and has been used as a way of devaluing or dismissing much or all of the latter. The kerygma alone is important. The rest of what passes for Christian belief and teaching is mostly just man-made stuff.
(이상, 발췌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이상, 게시자 주 끝)

 

2-2. 다른 한편으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6항에서, "initial proclamation of the Gospel or missionary preaching([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초기 선포 혹은 선교 설교 행위)" 라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를, 이 본글에서 그리스어 단어 "kerygma" 가 의미한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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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제5항"에 명기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Jesus Christ)" 은 곧 지상에 "하느님 나라의 도래(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를 말한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예를 들어, 다음의 글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76.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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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다음은 그리스어 케리그마([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초기 선포 혹은 선교 설교 행위)라는 교회의 용어와 관련된 교회의 용어들에 대한 간략한 안내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roman_curia/pontifical_councils/chrstuni/Bapstist%20alliance/
rc_pc_chrstuni_doc_20130401_commentary-baima_en.html

(발췌 시작)

the five dimensions of the Church, kerygma, koinonia, leiturgia, diakonia and episcope. These are less models of the church than they are constituting dimensions of the Church and explanations of her essential nature.

 

(번역문 1)

... 교회의 다섯 개의 양상들, 케리그마(kerygma), 코이노니아(koinonia)(*), 레이투르지아(leiturgia), 디아코니아(diakonia) 그리고 에피스코페(episcope). 이 단어들은 교회의 구성 양상들 그리고 교회의 본질적 본성에 대한 설명들이라기보다 이 단어들은 교회에 대한 저급의 모델(less models)들을 말합니다.

 

번역자 주: 그런데, 위의 우리말 번역문 1에서처럼, 그리스어 단어들을 음역(音譯, transliteration)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어떤 유익한 점이 있는지요???  이들 음역된 차용 번역 용어들을 우리말을 자신의 모국어로 사용하는 독자들이 읽기만 하면 이들 단어을의 원 의미를 이 독자들이 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무슨 말씀인고 하면, 그러한 음역을 사용하는 분의 숨은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러한 음역들을 사용하는 분과 그러한 음역들을 듣는 분들과의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소통(疏通, 상호 이해)에 있어서의 괴리(乖離)의 문제는 어떻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과 관련하여, 위의 질문 1질문 2를, 질문자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오.

 

(번역문 2)

... 교회의 다섯 개의 양상들, 선포(케리그마, kerygma), 공동체(코이노니아, koinonia)(*), 전례(레이투르지아, leiturgia), 봉사(디아코니아, diakonia) 그리고 주교직(에피스코페, episcope). 이 단어들은 교회의 구성 양상들 그리고 교회의 본질적 본성에 대한 설명들이라기보다 이 단어들은 교회에 대한 저급의 모델(less models)들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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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koinonia"에 대한 설명은 다음의 글의 제3-2항에 있으니 추가로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67.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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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4.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kerygma"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k/k007.htm

(발췌 시작) 

KERYGMA

 

Preaching or proclaiming, as distinct from teaching or instruction (didache) in the Gospel of Christ. Before the Gospel was written, it was first preached (Romans 16:25), but beyond preaching it was also to be taught (Matthew 28:19) in order that, as far as possible, it might be understood (Matthew 13:19). (Etym. Greek K?rygma, proclamation; from keryks, herald.)

 

케리그마(kerygma)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Christ)[즉, 하늘 나라의 도래(the coming of the kingdom of heaven)]에 대하여 가르치는 행위(teaching) 혹은 교육(instruction)[디다케(didache)]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사도들의] 설교 행위(preaching) 혹은 선포 행위(proclaiming)를 말합니다.(*) 이 복음이 기록되기 전에, 이 복음은 먼저 설교되었으나(로마 16,25), 그러나 설교 행위를 넘어서 이것은 또한, 가능한 한 멀리까지 이 복음이 이해될 수 있도록(마태오 복음서 13,19), 가르쳐져야 하였습니다(마태오 28,19). [어원. Greek K?rygma, proclamation; from keryks, herald.]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2-4: 

(1) 따라서, "케리그마(kerygma)"가,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통상적으로 사도(apostles)들에 의한 설교 행위(preaching) 혹은 선포 행위(proclaiming)을, 즉, "사도들의 케리그마(apostolic kerygma)"를 말하는 것이지, 마태오 복음서 4,17; 마르코 복음서 1,15; 루카 복음서 4,43-44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선포(the proclamation of Jesus)", 즉, "예수님의 케리그마(the kerygma of Jesus)", 즉, "예수님에 의한 하늘 나라의 도래라는 선포[the proclamation of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heaven by Jesus]"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제5장], 즉, "그리스도에 의한 그리스도의 복음 의 선포(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of Christ by Christ)" 그 자체(itself)를 말하는 것이 아님에 반드시 유념하라.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1월 31일]

(2) 아래의 제2-6항에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 고유의 케리그마를 말하는, "케리그마(the Kerygma)" 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또한 반드시 읽도록 하라.

[이상, 내용 추가 끝]

 

2-5.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kerygmatic theology"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k/k008.htm

(발췌 시작) 

KERYGMATIC THEOLOGY

 

The science of theology which stresses the functional use of sacred doctrine in preaching, contrasted with a more academic or speculative study of religious truths.

 

케리그마 신학(kerygmatic theology)

 

설교 행위(preaching)에 있어 성스러운 교리의 기능적 사용을 강조하는, 경신덕적 진리(religious truths)들에 대한 더 학문적(academic) 혹은 사변적(speculative) 연구와 대조되는, 신학의 한 학문 분야를 말합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1월 31일]

2-6. 2012년에 개최된 "새로운 복음화(the New Evangelization)"를 위한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58개의 제안(Propositions)들 중에서 정의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고유의 케리그마를 말하는, "케리그마(the Kerygma)"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11_Def_of_Kerygma.htm <----- 필독 권고

[이상, 내용 추가 끝]

  

3.

3-1. 다음은 2012년 10월 28일자 글입니다. 국내의 교우님들께 혹시라도 유익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지가 우리말 번역을 하였습니다:

 

출처: http://blog.adw.org/2012/10/what-do-we-mean-by-the-term-kerygma/

(발췌 시작)

What do we mean by the term Kerygma?

케리그마(Kerygma)라는 용어에 의하여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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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자 주: 미국 워싱톤 DC, 대교구 소속의 몬시놀이십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4월 17일]

그리고 1961년 생이고 1989년에 신품을 받았고, 그리고 2005년부터 몬시뇰로 불리는, 이분에 대한 안내의 글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www.ihmconference.org/charles-pope/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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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one of last week’s blog posts I made use of the term, Kerygma, and a number of people asked me to expand on the meaning of this term. To some extent, it is an example of one of those “Church words” which is rich in meaning to those who know, and have perhaps had been to seminary or studied advanced theology, but is largely unknown to many others. So let’s take a look at this term since it seems to be coming more central as we look to evangelizing a culture, almost from scratch.

 

지난 주의 블로그 게시글들 중의 한 개에서 저는 케리그마(Kerygma) 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그리고 사람들 중의 일부가 저에게 이 용어의 의미에 대하여 자세이 말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어떠한 범위에까지, 이 용어는, 식별할 수 있는(know) 자들에게, 그리고 아마도 신학교에 이미 머물렀던 혹은 고급 신학(advanced theology)을 학습하였던 자들에게, 그 의미에 있어 풍부한, 그러나 대다수의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교회의 용어들(Church words)" 중의 한 개에 대한 한 예(an example) 입니다. 따라서 이 용어에 대하여 함께 살펴 보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의, 앞 선 시기에 아무 것도 행해지지 않은, 한 점에서부터(from scratch), 한 개의 문화를 전교함(evangelizing)에 기대를 걸 때에 이 용어가 더 중심 용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The term κ?ρυγμα, (Kerugma) is a Greek word meaning “proclamation”. The Greek word κηρ?σσω, (kerusso) means “herald,” or one who proclaims. And thus the Kerygma is what is proclaimed.

 

케리그마(κ?ρυγμα, Kerugma)라는 용어는 "선포(proclamation)" 를 의미하는 한 개의 그리스어 단어입니다. κηρ?σσω, (kerusso) 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선구자(herald)", 혹은 선포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케리그마(Kerygma)는 선포되는 바를 말합니다.

 

As the apostles began the work of preaching and proclaiming Christ, they proclaimed a message that was rather basic and simple. More extended teaching or instruction (Διδαχ?, (didache), in Greek) would come later, after baptism. But the initial proclamation of Christ was simple, and to the point.

 

사도(the apostles)들이  그리스도를 설교(說敎)하고(preaching) 그리고 선포하는(proclaiming) 일을 시작할 때에, 그들은 상당히 기본적이고(basic) 그리고 간단한(simple) 한 개의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더 확장된 가르침(teaching) 혹은 교육(instruction) (그리스어로 Διδαχ?, (didache), 디다케)은, 세례 후에, 나중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 초기 선포(즉, the Kerygma)(**)는 간단하였고, 그리고 적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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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따라서, 달리 말하여, 이 글에서 말하는 "디다케(didache)"는 가툴릭 교회의 표준 언어로, "교리교육(catechesis)[혹은 교리교수학(catechetics)]"을 말함을 알 수 있다.

 

(**) 번역자 주: 위의 제2-6항에 안내된 이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반드시 숙지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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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does not mean that later development was both necessary and good. It simply means that the initial proclamation sought to get right to the point. In effect, this kerygmatic approach was seen more as a proclamation addressed directly to the hearer, and is a call to conversion, rather than as an extended appeal to the reason or to motives of credibility.

 

바로 이 간단함과 적절함은 이후의 전개가 필요하였고 그리고 훌륭하였다(good) 둘 다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초기(initial) 선포가 곧장 요지(point)를 추구하고자 노력하였음을 단순히 의미합니다. 사실상, 이러한 케리그마적 접근(kerygmatic approach)은, 이성(reason) 쪽으로 혹은 신뢰(credibility)의 동기들 쪽으로 한 개의 확장된 호소로서 보다는 오히려, 듣는 이들을 향하여 직접적으로 주어졌으며, 그리하여 귀의/회심(conversion) 쪽으로 한 개의 부름(a call)인, 한 개의 선포(a proclamation)로서 더 나은 것으로서 이해되었습니다. 

 

The basic curricula of the kerygma emphasizes that Jesus is the chosen Messiah of God, the one who was promised. And though he was crucified, He rose gloriously from the dead, appearing to his disciples, and having been exul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through his ascension, now summons all to him, through the ministry of the Church. This proclamation (kerygma) requires a response from us, that we should repent of our sins accept baptism and live in the new life which Christ is offering. This alone will prepare us for the coming judgment that is to come upon all humanity. There is an urgent need to conform ourselves to Christ and be prepared by him for the coming judgment.

 

케리그마([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초기 선포 혹은 선교 설교 행위)의 기본 교과 과정들은 예수님이, 과거에 약속되었던 분이신, 하느님의 선택된 메시아이심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비록 그분께서 십자가형에 처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영광스럽게 일어나셨으며,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리고 당신의 승천을 통하여 성부의 오른 편에 이미 높이 올려지셨는데, 이제, 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모든 이를 당신에게로 불러 모으십니다. 바로 이러한 선포(proclamation)[케리그마(kerygma)([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초기 선포 혹은 선교 설교 행위)]는 우리로부터, 우리가 마땅히 우리의 죄들에 대하여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들이며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제공하고 계시는 새 생명/삶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한 개의 응답을 요구합니다. 오직 이것만으로도, 모든 인류에게 장차 오기로 되어 있는, 다가오는 심판을 위하여 우리를 준비하게 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심판을 위하여 우리 자신들을 그리스도께 순응하여야 하는 그리하여 그분에 의하여 준비되어져야 하는 당면한 필요가 있습니다.

 

This was the basic Kerygma. The Apostles would surely go on to develop more, for example, the theology of grace, extended moral treatises, Christology, Ecclesiology, Trinitarian theology, and so forth. But the deeper things and concepts wait until the soul has first been cleansed of sin, and the darkness of mind that sin brings. Once initiated into the mysteries through baptism, the soul is now able to go on to maturity in Christ.

 

이것은 기본적인 케리그마(Kerygma)([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초기 선포 혹은 선교 설교 행위)였습니다. 사도들은, 예를 들어, 은총(grace)에 대한 신학, 확장된 윤리에 대한 논문들, 그리스도론, 교회론, 삼위일체 신학 등등을 더 전개하기 위하여 분명히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사물들과 개념들은 먼저 영혼(the soul)이 죄로부터, 그리고 죄가 가져다 준 마음(mind)의 어두움이, 깨끗하게 될 때까지 기다립니다. 일단 세례를 통하여 신비들 안쪽으로 인도된(initiated) 다음에, 영혼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을 향하여 계속 나아갈 수 있습니다

 

But step one is the announcement of the kerygma, and the acceptance of it by the believer, so as to enter into the deeper mysteries.

 

그러나 첫 번째 단계는 케리그마([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초기 선포 혹은 선교 설교 행위)라는 공표(announcement)이며, 그리고, 더 깊은 신비들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믿는 이(the believer)에 의하여 이것의 받아들임입니다.

 

Thus, it would seem that the early Church, and the Apostles tended to preach the basics, and then to draw those who would accept and believe, into the deeper mysteries.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초기 교회는, 그리고 사도들은, 기본 사항들을 설교하는, 그런 다음에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믿는(believe) 자들을 더 깊은 신비들 안쪽으로 잡아 당기는, 경항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Our tendency today is to unload the entire bale of hay, to instruct converts in the whole counsel of Christ, before they are even initiated, and ask that they assent to all of it, before they are baptized, or received into the Church.

 

오늘날 우리의 경항은 건초 더미 전체를 내려서, 심지어 회심자들/귀의자들이 인도되기도 전에, 그들을 그리스도의 권고 전체 쪽으로 가르치며, 그리고, 그들이 세례를 받거나, 혹은 교회 안쪽으로 받아들여지기 전에, 그들이 그것에 대하여 모두 동의할 것을 요구합니다. 

 

This is not wrong per se, but there are some today who argue that we should get back to the original plan of proclaiming the basic kerygma, repentance, baptism, and the faith that that implies, and then continue instruction in the deeper things after the enlightenment that baptism brings.

 

이것은 그 자체로(per se) 잘못이 아니나,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마땅히 기본적인 케리그마(kerygma)를 선포함, 회개, 세례,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의미하는, 믿음(faith)으로 이루어진 원 계획(original plan)으로 되돌아 가고, 그런 다음에 세례가 가져다 주는 교화(enlightment) 후에 더 깊은 사물들 쪽으로 가르침을 계속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습니다.

 

It is too easy today for people to get lost in the weeds, and to miss the essential point. Often for example, people rush to the demands fo the moral norms with little understanding or experience of the grace that life in Christ provides. Within days of entering a catechumenate, the students are being asked to ponder sophisticated notions of sanctifying versus actual grace, transubstantiation, Trinitarian mysteries, and so forth.

 

오늘날 사람들이 잡초들 안에서 길을 잃게 되고, 그리하여 본질적 요지를 놓치는 것이 너무나 쉽습니다. 자주, 예를 들어,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 제공하는 은총(grace)에 대한 이해 혹은 경험 거의 없이 윤리 규범(moral norms)들에 대한 요구들 쪽으로 성급하게 달려갑니다. 한 세례준비 기긴(a catechumenate)에 들어간지 며칠 안에, 학습자들은 성화은총 대(對) 상존은총, 성변화, 성삼위 신비들 등의 세련된 개념들을 숙고(poner)할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It would seem that the earliest days of the church reserved a good deal of this for a time of μυσταγωγia (mystagogia), a kind of ongoing instruction into the mysteries to which one has already been initiated. In fact, the early church often kept the deeper things hidden until after baptism. There was a kind of a discipline of the secret (disciplina arcanis). And those who were unbaptized could not experience the liturgy, or expect that deeper things should be revealed to them until after they had been enlightened by Baptism, Confirmation and Holy Eucharist.

 

교회의 가장 초기 시절들은 μυσταγωγia (mystagogia) 당분간, 그쪽을 향하여 입교자가 이미 개시하게 된 신비들 쪽으로 계속하는 가르침의 한 종류인, 이 요구의 상당 양을 유보하였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초기 교회는 자주 더 깊은 사물(things)들을 세례 후까지 감추어 두었습니다. 비전(秘傳, the secret)에 대한 한 개의 기율(a disciple)(disciplina arcanis)의 한 종류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세례를 받지 봇한 자들은 전례를 경험할 수 없었거나. 혹은 그들이 세례성사, 견진성사 그리고 성체성사에 의하여 이미 교화될(enlightened) 때까지 더 깊은 사물들이 그들에게 드러내어지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Today, this sort of notion is generally set aside in favor of the laying out the whole doctrine of Christ to the uninitiated, insistence on their assent to it all, and only after this, an offer a baptism is extended. Again, this modern approach is not per se wrong, but it is different from the approach of the earliest days.

 

오늘날, 개념의 이러한 종류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 전체를 초심자(the uninitiated)들에게 펼치는 것을, 이 교리 모두에 대하여 그들이 동의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선호하여 일반적으로 제쳐 놓여지게 되며, 그리고 오로지 이 동의 후에, 한 개의 세례라는 제안 한 개가 내밀어집니다. 또다시, 바로 이러한 현대의 접근이 그 자체로(per se) 잘못은 아니나, 그러나 이것은 초기의 날들의 접근과 다릅니다.

 

And thus, one approach of the new evangelization today is the proposal to return to a more kerygmatic approach. This is especially the case when we are in effect, starting from scratch with many people today.

 

그리하여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오늘날 새로운 복음화(the new evangelization)(*)에 대한 하나의 접근은 더 나은 케리그마적(的)(kerygmatic) 접근으로 되돌아가자는 제안입니다. 이 접근은 특히 우리가 실제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앞 선 시기에 아무 것도 행해지지 않은, 한 점에서부터(from scratch) 시작하는 때인 경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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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하여 더 구체적으로 정의되는(defined) "새로운 복음화(the New Evangelization)" 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10.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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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some sense, the current times are not unlike the pagan world in which the apostles first proclaimed the Gospel of Jesus Christ. It is true, that the West is more an “angry divorcee,” and the ancient Gentile world which was more like a virgin awaiting her groom. But there are still some parallels, and our presumption that most people heard the basics of Scripture, and the gospel is generally a poor presumption today. Most have not heard Christ, or the Scriptures authentically proclaimed. And to the degree that they have, it has been proclaimed to them with hostility and cynicism by a world and a culture that scoffs at the claims of Christ, his Church, the Christian tradition.

 

어떠한 의미에 있어, 현재의 시기들은, 그 안에서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 선포하였던, 다신교 세상(the pagan wordl)과 같지 않은(unlike) 것이 아닙니다. 서방 세계(the West)는 한 명의 "분노한 이혼녀(angry divorcee)" 더 이상이고 그리고 고대 이방인 세상은 자신의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한 명의 처녀(virgin)같은 것은 사실(true)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유사점(parallels)들이 여전히 있으며,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 본문의 기본적인 것들 들었다는 우리의 전제(pesumption)가 있고, 그리고 이 복음은 오늘날 한 개의 빈약한 전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혹은 성경 본문들이 권위있게 선포되는 것을 여태까지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에까지 그들은 이 복음이, 한 개의 세상에 의한, 그리고, 그리스도의, 당신의 교회의, 그리스도교 전통의 주장들에 비웃는, 한 개의 문화에 의한, 적대감 및 냉소와 함께 그들에게 선포되어 왔음을 가집니다. 

 

In this current climate and context, there are some who argue for a return to basic apostolic preaching as a fundamental schema in speaking to an unbelieving world. Deeper doctrines can and should be enunciated later but the initial proclamation should stick to basics:

 

바로 이러한 현재의 풍조(climate)와 문맥 안에서, 한 개의 불신하는 세상을 향하여 말함에 있어 한 개의 근본적이 도식(schema)로서, 기본적인 사도들의 설교 행위로의 어떤 되돌아감을 지지하고자 논하는 분들이 다소(some) 있습니다. 더 깊은 교리는 나중에 명확하게 진술될(enunciate) 수 있고 그리고 마땅히 명확하게 진술되어야 하나 그러나 초기의 선포는 마땅히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That we are lost in our sins, that those deep drives are destroying us, and that God has sent the Savior, Jesus Christ, who died to set us free and offer us whole new life. It is he who calls to you now, who is drawing you to himself, that he might save you and give to you a whole new life. He died to give you this life, and having been raised from the dead, he ascended to the Father, where he is drawing you to himself even now, calling you by name, and offering you deliverance from every sinful and destructive drive, establishing you in a new, more glorious, and hopeful life. Come to him now, the repent of your sins, and let him begin the good work in you.

 

우리가 우리의 죄들 안에서 길을 잃게 됨, 바로 이러한 깊은 충동(drives)들이 우리를 파괴함,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하고자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 전체를 제공하고자 죽은 분이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파견하섰음. 그대를 구하여(save) 그리하여 그대에게 한 개의 새로운 삶 전체를 제공하기 위하여, 지금 그대 쪽으로 부르고 계신 분이, 그대를 당신 자신 쪽으로 잡아 당기고 계신 분이, 바로 이분이십니다. 이분께서는 그대에게 바로 이러한 삶을 제공하고자 죽으셨으며, 그리고 죽은 이들로부터 이미 일어나게 됨으로써, 이분께서는 성부께로 올라가셨으며, 거기서 이분께서는, 이름으로 그대를 부름으로써, 모든 죄 있는 그리고 파괴적인 충동으로부터 구츨을 그대에게 제안함으로써, 한 개의 새로운, 더 영광스러운, 그리고 희망에 찬 삶을 제정함으로써, 그대를 심지어 지금 당신 자신 쪽으로 잡아 당기고 계십니다. 자신의 죄들에 대하여 회개하는 자들이여, 지금 이분께로 와서, 그리하여 이분께서 그대 안에 선행(the good work)을 시작하도록 합시다.

 

This is the basic Kerygma. It is the starting point, the initial proclamation, the summons, the invitation: the conviction of sins, but the announcement of loving hope.

 

바로 이것이 기본적인 케리그마([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초기 선포 혹은 선교 설교 행위)입니다. 이것은 시작점, 개시하는 선포, 소집들, 초대들이며, 그리고 죄들에 대한 자각(conviction), 그러나 애정있는 희망(loving hope)의 선포입니다. 

 

There are eight kerygmatic sermons set forth in the Acts of the Apostles. In tomorrow’s blog post I would like to explore each of these sermons, and extract their basic details. Today for the sake of brevity, let this be enough, to introduce the concept of what we mean by kerygma.

 

사도 행전에 진술된 열덟 개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들의] 케리그마 설교(kerygmatic sermons)([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초기 선포 혹은 선교 설교 행위)들이 있습니다. 내일의 블로그 게시에서 저는 이들 설교들 각각을 탐구하고, 그리고 그들의 기본적인 세부 사항들을 추출하고자 합니다. 간결을 위하여 오늘은, 케리그마(kerygma)에 의하여 우리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개념을 소개하는 것이 충분하도록 합시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2. 바로 위의 글에 이어지는 몬시놀님의 글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blog.adw.org/2012/10/what-do-the-kerygmatic-sermons-of-acts-have-
to-teach-us-about-the-new-evangelization/

 

3-3. 바로 위의 이어지는 글에서 안내되고 있는 여덟 개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들의 케리그마 설교들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blog.adw.org/wp-content/uploads/Eight-Sermons-of-the-Kerygma-in-Acts.pdf

 

3-4. 그리고 이들 여덟 개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들의 케리그마 설교들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들은 다음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2,14-36: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ct_easter_mon.htm [부활 팔일 월요일 제1독서(사도행전 2,14.22-33)]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a_east_3.htm [가해 부활 제1주일 제1독서(사도행전 2,14.22-33)]

 

사도행전 3,12-26: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ct_easter_thu.htm [부활 팔일 목요일 제1독서(사도행전 3,11-26)]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east_3.htm [나해 부활 제3주일 제1독서(사도행전 3,13-15.17-19)]

 

사도행전 4,8-12: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ct_easter_fri.htm [부활 팔일 금요일 제1독서(사도행전 4,1-12)]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east_4.htm [나해 부활 제4주일 제1독서(사도행전 4,8-12)]

 

사도행전 5,29-32: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east_2_thu.htm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사도행전 5,27-33)]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east_3.htm [다해 부활 제3주일 제1독서(사도행전 5,27ㄴ-32.40ㄴ-41)]

 

사도행전 10,34-43: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a_baptlord.htm [매년 주님 세례 축일 제1독서(사도행전 10,34-38)]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easter.htm [매년 부활 대축일 제1독서(사도행전 10,34ㄱ.37-43)]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east_6.htm [나해 부활 제6주일 제1독서(사도행전 10,25-26.34-35.44-48)]
 
사도행전 13,16-41: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east_4_thu.htm [매년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제1독서(사도행전 13,13-25)]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east_4_fri.htm [매년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사도행전 13,26-33)]

 
사도행전 14,15-17: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east_5_mon.htm [매년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제1독서(사도행전 14,5-18)]

 
사도행전 17,22-31: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east_6_wed.htm [매년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제1독서(사도행전 17,15.22-18,1)]

 

3-5. 송봉모 신부님의 논문[제목: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재산 공유적 삶에 대한 논의들]의 입문 첫 문장에서 언급되는 "케리그마"에 주어진 각주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http://hompi.sogang.ac.kr/theoinst/journal/journal_6/6-2.pdf

(발췌 시작)
케리그마(kh,rugma)는 디다케(didach,)와 구분된다. 케리그마는 복음 선포이고, 디다케는 가르침이다. 케리그마, 즉 복음 선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을 향한 복음 전도적 설교이다. 이 단어의 동사 케르소(khpu,ssw)는 ‘선포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선포 내용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재림에 대한 것이다.


한편 디다케는 사도들의 가르침 구체적으로 신자 재교육을 가리킨다. 이 단어의 동사 디다스코(dida,skw)는 “가르치다”의 의미를 갖는다. 신자 재교육은 이미 신자 된 사람들을 향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사도들을 통해서 복음 선포를 듣고, 즉 케리그마를 접하고 신앙을 받아들인 이들은, 계속해서 애초에 받아들인 신앙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할 필요가 있었다.


좀더 요약해서 케리그마와 디다케의 차이를 설명해본다. 케리그마가 대외적이라면 디다케는 대내적이다. 케리그마는 회개로의 부르심이고, 디다케는 제자로의 부르심이라 할 수 있다. 전자가 영적인 탄생을 이끌어내는 것이라면, 후자는 영적인 성장을 돕는 것이다. 전자가 길 잃은 양들을 주님의 목장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 양들을 잘 먹이고 인도하는 것이다.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3-5: 그러므로, 위의 질문 2는, 다음과 같이, 이분법적으로 서술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이미 받은 분들에게 주어지는 복음 선포는 당연히 "디다케(didache)"적(的)으로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 2: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초기 복음 선포는 "케리그마"적(的)으로 하여야 하지, "디다케"적(的)으로 하면 아니 된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지요?

(이상, 게시자 주 3-5 끝)

 

4.

이번 항에서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사도들의 케리그마(the apostolic kerygma)"이라고 불리는 바가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인, "예수님의 케리그마(the Kerygma)"에 대한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을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4-1. "예수님 고유의 케리그마(선포, kerygma)"[즉, "예수님에 의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사도들에 의한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케리그마(선포, kerygma)"에 대하여,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1990년 12월 7일자 회칙 [제목: "구세주의 임무/사명(REDEMPTORIS MISSIO)"]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의 제16항의 마지막 단락에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18.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Indeed, after the resurrection, the disciples preach the kingdom by proclaiming Jesus crucified and risen from the dead. In Samaria, Philip "preached good news about the kingdom of God and the name of Jesus Christ" (Acts 8:12). In Rome, we find Paul "preaching the kingdom of God and teaching about the Lord Jesus Christ'' (Acts 28:31). The first Christians also proclaim "the kingdom of Christ and of God" (Eph 5:5; cf. Rev 11:15; 12:10), or "the kingdom of our Lord and Savior Jesus Christ" (2 Pt 1:11). The preaching of the early Church was centered on the proclamation of Jesus Christ, with whom the kingdom was identified. Now, as then, there is a need to unite the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the content of Jesus' own "kerygma") and the proclamation of the Christ-event (the "kerygma" of the apostles). The two proclamations are complementary; each throws light on the other.
 
진실로, 당신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으며 그리고 죽은 이들로부터 부활하셨음을 선포함으로써 이 나라를 설교합니다. 사마리아에서, 필립포스(Philip)는 “하느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사도행전 8,12). 로마에서, 우리는 바오로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쳤음”(사도행전 28,31)을 발견합니다. 첫 그리스도인들도 또한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를(에페소 5,5; 요한 묵시록 11,15; 12,10을 보라), 혹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2베드로 1,11)를 선포합니다. 초기 교회의 설교는, 이 나라와 동일시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에 중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요즈음에 와서, 과거처럼,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예수님 고유의 ‘선포(케리그마, kerygma)’에 대한 내용]그리스도 사건(Christ-event)에 대한 선포[사도들의 ‘선포(케리그마, kerygma)’]를 결합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들 두 선포들은 상호 보완적이며, 각 선포는 다른 선포를 쉽게 이해하게 합니다(each throws light on the other).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4-1: 그 전후 문맥 안에서 바로 위에 발췌된 단락에 대한 보다 더 나은 이해를 위하여, 바로 위의 출처에 있는 바를 읽도록 하십시오.

 

4-2. 다음은 미국의 개신교 목회자 한 분의 "Kerygma" 제목의 신학 논문의 초록(abstract) 전문입니다:

출처: http://onlinelibrary.wiley.com/doi/10.1002/9780470670606.wbecc0751/abstract

(발췌 시작)

Kerygma
 
Paul Hartog
 
Abstract

The Greek noun kerygma is a derivative of the verb kerusso, meaning “to preach or proclaim.” Attic Greek employed kerygma especially in relation to a herald or public crier; the word was used of either the act of announcing or the content of the message. The word kerygma appears eight times within the critical text of the Greek New Testament, where it still retains this notion of a public annunciation. For example, Luke 4:18–19 provides a paradigm of the public nature of kerusso. After reading from the prophet Isaiah, Jesus proclaimed to his listeners that his ministry would herald good news to the poor, blind, and captive. Early Christian preaching (such as is portrayed in the book of Acts) highlighted the fulfillment of God's promises in Jesus of Nazareth, the beneficent and miraculous ministry of Jesus, his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his exaltation and bestowal of the Spirit, his future restoration of all things, and a call for personal response. The interpretive context of this proclamation included moral accountability to the creator, human failure in sin, and coming divine judgment (Acts 14, 17). In the New Testament, the Christian kerygma appears in connection with the “gospel.” In a doxology at the end of Romans, the apostle Paul lauded God “who is able to establish you according to my gospel and the kerygma of Jesus Christ” (Rom. 16:25). According to Paul, God saves sinners through the foolishness of the kergyma, which centered upon “Jesus Christ, and him crucified” (1 Cor. 1:24; 2:4). Furthermore, according to 1 Corinthians 15:14, if Jesus was not raised from the dead, then the Christian kerygma was futile and vain. This kerygmatic emphasis upon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Christ parallels Paul's delineation of the Gospel in 1 Corinthians 15:1–11. The Pastoral Epistles portray the kerygma as the foundation of faith and of the knowledge of the truth (Titus 1:1–4; cf. 2 Tim. 4:17). Later Christian theologians, such as Irenaeus, emphasized and defended the “apostolic kerygma” (Adversus haereses 1.10).

 

케리그마(Kertgma)

 

Paul Hartog

 

그리스어 명사 케리그마(kerygma)는, "설교하다 혹은 선포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kerusso 의 한 파생어입니다. 아티카(아테네) 그리스인(attic Greek)들은 케리그마(kerygma)를 특별히 한 명의 선구자 혹은 공적 외치는 자 쪽으로 관계에 있어 사용하였으며, 그리하여 이 단어는 공표 행위(act of announcing) 혹은 이 메시지의 내용 이들 둘 중의 하나에 대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케리그마(kerygma) 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신약 성경의 비평 사본(critical text) 안쪽에서 여덟 번 나타는데, 거기서 이 단어는 한 개의 공적 공표(a public announciation)라는 바로 이 개념을 여전히 계속 유지합니다. 예를 들어, 루카 복음서 4,18-19는 kerusso 의 공적 본성(public nature)에 대한 한 개의 전형(paradigm)을 제공합니다.  예언자 이사야로부터 독서 후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청중들 쪽으로 당신의 사역이 가난한 이들, 눈 먼 이들, 그리고 잡혀간 이들에게 좋은 소식(good news)의 도래를 알릴(herald)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도 행전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초기 그리스도교 설교 행위는 나자렛 지역 출신의 예수님(Jesus of Nazareth) 안에서 하느님의 약속들의 구현을, 즉, 예수님의, 혜택을 베푸는 및 기적적인, 사역,  당신의 십자가형과 부활, 당신의 높이 들어올려짐과 거룩한 영(the Spirit)의 수여, 모든 사물들에 대한 당신의 회복(restoration), 그리고 인격적 화답(personal response)을 바라는 한 개의 부름을, 돋보이게 하였습니다(highlighted). 바로 이 선포에 대한 해석적인 문맥은 창조주 쪽으로 더 많은 윤리적 의무(moral accountability), 죄에 있어 인간의 실패, 그리고 도래하는 하느님의 판단(사도행전 14,17)을 포함하였습니다. 신약 성경에 있어, 그리스도인들의 케리그마(kerygma)는 이 "복음(gospel)"과 관련하여 나타납니다. 로마서의 끝에 있는 한 개의 영광송(a doxology)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을 "내 복음 그리고(and)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선포, kerygma)에 따라 여러분을 자리잡게 할(establish) 능력이 있는 분"(로마 16,25) 이라고 칭송하였습니다(lauded). 바오로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십자가형을 받게 되는 그분을" 중심에 두었던(1코린토 1,24; 2,4)이 케리그마(kerygma,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죄인들을 구하십니다(saves). 더욱이, 1코린토 15,14에 따르면, 만약에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로부터 일어나게 되지 않으셨더라면, 그리스도인들의 케리그마(Chritian kerygma)는 무익하고(futile) 그리고 헛된(vain) 것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upon) 바로 이러한 케리그마적/선포적 강조(kerygmatic emphasis)1코린토 15,1-11에서 복음(the Gospel)에 대한 바오로의 묘사에 평행합니다(parallel). 사목 서간들은 이 케리그마(kerygma)를 신앙(faith)의 그리고 진리에 대한 지식의 기초로서 묘사합니다(티토 1,1-4; 그리고 2티모테오 4,17 참조). 이후에, [리옹의 주교였던] 성 이레네오(St. Irenaeus)와 같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사도들의 케리그마(apostolic keygma)"를 강조하였고 그리고 옹호하였습니다[성 이레네오(St. Irenaeus), 이단 논박(dversus haereses) 1.10].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4-2: 특히 위의 글에서 발췌 인용되고 있는 로마서 16,25"공동번역성서""새 번역 성경"로마서 16,25에 중대한 번역 오류가 있음을 또한 말해주고 있습니다.

 

4-3. 이번 항에서는 "공동번역성서""새 번역 성경"로마서 16,25 에 있는 중대한 번역 오류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3-1. 다음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1982년 9월 13일자 교리 교육용 일반 알현 강론 말씀, 주석 (1)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발췌 인용되고 있는 로마서 16,25에서, my gospel the preaching of Jesus Christ 사이에 and(그리고) 가 사용되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출처: http://www.miraclerosarymission.org/ga82sep13.html 

(주석 (1)에서 발췌 시작)

...

In this sense "mystÀrion" appears only once in the Gospels: "To you has been given the secret of the kingdom of God" (Mk 4:11 and par.). In the great letters of St Paul, this term is found seven times, reaching its climax in the Letter to the Romans: "...according to my gospel(내 복음[즉, 사도 바오로의 복음]) and (그리고) the preaching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 according to the revelation of the mystery which was kept secret for long ages, but is now disclosed..." (Rom 16:25-26). (이하 발췌 생략)

(이상, 발췌 및 일부 표현에 대한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4-3-1:

(1) 위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1982년 9월 13일자 교리 교육용 일반 알현 강론 말씀, 주석 (1)에서 발췌 인용되고 있는 로마서 16,25-26은 1611년에 초판 발행된 King James Version(KJV) 을 현대 어법에 맞게 개신교측과 가톨릭측헤서 함께 1950-1960년대에 개정하였던, 그리하여, 가톨릭 교회의 미사 중에 독서로 발췌되는 것이 교황청 유관 부서에 의하여 승인되었던, Revised Standard Version(RSV) 로마서 16,25-26임은 다음을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quod.lib.umich.edu/cgi/r/rsv/rsv-idx?type=DIV1&byte=5173534

 

(2) 사실,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로마서 16,25-26(i) 나해 대림 제4주일 제2독서(로마 16,25-27), (ii) 홀수 해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제1독서(로마 16,3-9.16.22-27)에 포함되므로, 또한 다음에 있는 영어본 나바르 성경 주석서로마서 16,25를 확인하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이 가톨릭용 주석서의 영어본 성경 본문은 Revised Standard Version Catholic Edition(RSV CE) 이기 때문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adv_4.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31_sat.htm

(발췌 시작)
[25] Now to him who is able to strengthen you according to my gospel and the preaching of Jesus Christ, according to the revelation of the mystery which was kept secret for long ages [26] but is now disclosed and through the prophetic writings is made known to all nations, according to the command of the eternal God, to bring about the obedience of faith--[27] to the only wise God be glory for evermore through Jesus Christ! Amen.
(이상, 발췌 끝)

 

4-3-2. 다음은, 1611년 초판의 King James Version 이 마련될 때에 상당한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는, Clementine Vulgate(대중 라틴말 성경, 1979년까지 가톨릭 교회의 공인 라틴어본 성경)를 영어로 직역 번역한 가톨릭용 영어본 Douay Rheim Version 로마서 16,25 전문입니다. 위의 RSV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연결자(connective)로 and (그리고) 가 사용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출처: http://haydock1859.tripod.com/id160.html

(발췌 시작)

25 Now to him that is able to establish you, according to my gospel, and the preaching of Jesus Christ, according to the revelation of the mystery kept secret from eternity,

(이상, 발췌 끝)

 

4-3-3. 다음은 1970년에 초판 발행된, 가톨릭 교회의 미사 중에 독서로 발췌되는 것이 교황청 유관 부서에 의하여 승인된,  New American Bible(NAB)의 로마서 16,25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Z4.HTM

(발췌 시작)

25 Now to him who can strengthen you, according to my gospel and the proclamation of Jesus Christ, according to the revelation of the mystery kept secret for long ages

(이상, 발췌 끝)

 

4-3-4. 다음은  Clementine Vulgate(대중 라틴말 성경, 1979년까지 가톨릭 교회의 공인 라틴어본 성경)로마서 16,25 전문입니다. 연결자로서 et 가 사용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출처: http://www.newadvent.org/bible/rom016.htm

(발췌 시작)
25 Ei autem, qui potens est vos confirmare juxta Evangelium meum, et prædicationem Jesu Christi, secundum revelationem mysterii temporibus æternis taciti

(이상, 발췌 끝)

 

4-3-5. 다음은 1979년에 초판 발행된 Nova Vulgata (새 대중 라틴말 성경)의 로마서 16,25 전문입니다. 연결자로서 et 가 마찬가지로 사용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bible/nova_vulgata/documents/
nova-vulgata_nt_epist-romanos_lt.html#16

(발췌 시작)
25 Ei autem, qui potens est vos confirmare iuxta evangelium meum et praedicationem Iesu Christi secundum revelationem mysterii temporibus aeternis taciti,

(이상, 발췌 끝)

 

4-3-6. 그리스어본 로마서 16,25 전문은 다음에 있는데, 연결자로서 kai 가 사용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출처: http://biblehub.com/text/romans/16-25.htm

 

그리고 연결자 kai 가 영어로 and 에 등가로 대응함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biblehub.com/greek/kai_2532.htm

 

4-3-7. 다음은 1977년에 초판 발행된, 국내의 개신교측과 함께 마련된, 공동번역성서 로마서 16,25 전문입니다. 그리고 대신에, 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번역 오류입니다:

 

(발췌 시작)
25 하느님께서는 내가 전하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 두셨던 그 심오한 진리를 나타내 보여주심으로써 여러분의 믿음을 굳세게 해 주십니다.

(이상, 발췌 끝) 

 

4-3-8. 다음은 2005년에 초판 발행된 "새 번역 성경" 로마서 16,25 전문입니다. 그리고 대신에, 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번역 오류입니다:

 

(발췌 시작)

25 하느님은 내가 전하는 복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또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신비의 계시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이상, 발췌 끝)

 

4-3-9.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 제공의 국내의 개신교용 로마서 16,25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표준새번역새번역 에서, 그리고 대신에, 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번역 오류입니다. 반드시 클릭하여 확인하도록 하십시오:

 

출처: http://www.bskorea.or.kr/infobank/korSearch/korbibReadpage.aspx?version=GAE&readInfo
=%uB86C%2016%3A25&cVersion=SAE^SAENEW^&fontString=12px&fontSize=1#focus

 

게시자 주 4-3: (번역 오류) 로마서 16,25에서 말하는, 내 복음(즉, 사도 바오로의 복음) 과, 결코 사도들의 가르침(the apostolic teaching), 즉, 디다케(didache)일 수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the Kerygma)[주: 여기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대문자 K 를 사용하고 있음을 꼭 기억하십시오]절대로 동일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로 국내의 우리말본 성경들의 로마서 16,25 에서 그리고 대신에 이 차용 번역 용어로 선택되는 명백한 번역 오류가 발생하게 되었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으며, 가능하다면 즉시, 반드시 바로잡아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질문 3: 그럲다면, 로마서 16,25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the Kerygma)는 무엇을 말할까요?

 

질문 3에 대한 답변: 위의 제4-1항에 발췌 되어 있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회칙[제목: 구세주의 임무/사명(REDEMPTORIS MISSIO)]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다음과 같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발췌 시작)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예수님 고유의 ‘선포(케리그마, kerygma)’에 대한 내용]

(이상, 발췌 끝) 

 

, 더 자세하게,

(i) 마태오 복음서 4,17; 마르코 복음서 1,15; 루카 복음서 4,43-44 등 에서 다음과 같은 바가 기록되어 있고,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87.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This is the time of fulfillment.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Repent, and believe in the gospel." (Mark 1,15)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공동번역성서, 마르코 복음서 1,15)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새 번역 성경"마르코 복음서 1,15에서, " 복음을 믿어라" 대신에, 그냥 "복음을 믿어라" 로 번역된 것은, 바로 위의 출처에 있는 글에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또한 이미 지적하였듯이, 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입니다.

(이상, 게시자 주 끝)

 

(ii)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의 부록인, 1990년 게재 당시에 대구 가톨릭 대학 학장이셨던, 정하권 플로리아노 몬시뇰님의 글 [제목: 신약 성서의 하느님 백성, 경향잡지, 1990년 6월호] 첫 단락에서 또한 동일한 지적을 하고 계시고,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48.htm

(발췌 시작)

구약 시대 말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편협한 민족주의적 구원관에서 탈피하여 만민의 구원을 지향하는 보편적 메시아 왕국올 기대하였다(본지 l월호 124면 참조). 마침내 예수께서 오셔서 “때가 다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공동번역성서, 마르 1,15) 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고, 당신의 설교와 기적과 행적으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을 형성하셨다.

(이상, 발췌 끝)

 

(iii)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도행전 8,12(필립보스); 사도행전 28,31(사도 바오로); 에페소 5,5; 요한 묵시록 11,15; 12,10(첫그리스도인들); 2베드로 1,11(첫 그리스도인들)등에서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iv) 그리고 1990년 12월 7일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회칙[제목: 구세주의 임무/사명(REDEMPTORIS MISSIO)]에서 또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예수님에 의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입니다:

 

출처: 위의 제4-1항 

(발췌 시작)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예수님 고유의 ‘선포(케리그마, kerygma)’에 대한 내용]

(이상, 발췌 끝)

 

질문 4: 그렇다면, 바로 이 예수님의 케리그마(the Kerygma)[주: 여기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대문자 K 를 사용하고 있음을 꼭 기억하십시오]사도들의 케리그마(the apostolic kerygma)가 그리스도교 세례를 아직 받지 못한 이들에게 주어질 때에 함께 제시되지 않아야/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질문 4에 대한 답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위의 제4-1항에 발췌된 1990년 12월 7일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회칙[제목: 구세주의 임무/사명(REDEMPTORIS MISSIO)] 제16항의 마지막 단락을 다시 한 번 더 잘 읽어 보십시오. 그리스도교 세례를 아직 받지 못한 이들에게 등급(order, rank)/수준(level)이 다른 이들 두 개의 케리그마(kerygmas)들이 함께 제시되면, 훨씬 더 복음화(evangelization)가 잘 이루어질 것임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1990년 당신의 회칙 [제목: 구세주의 임무/사명]에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케리그마(the Kerygma)가 확실하게 포함되지 않은 사도들의 케리그마(the apostolic kerygma) 가 혹시라도 "첫 선포(the primary proclamation)" 로 제시된다면, 이 선포는, 시쳇(時體)말로, "앙꼬 없는 팥빵"입니다.

 

그리고 또한, "앙꼬 없는 팥빵"아니라"앙꼬 있는 팥빵"을 건네는 것이야말로,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교황 권고 [제목: 복음의 기쁨]에서 언급되고 있는, "새로운 복음화(the new evangelization)"(*)의 가장 효율적인 지름길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의 힘(power)이 또한 함께, 그리고 즉시, 건네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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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하여 더 구체적으로 정의되는(defined) "새로운 복음화(the New Evangelization)" 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의 제1항제2항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10.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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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칠문 4에 대한 답변 끝)

 

4-4. 우리말본 교리교육 총지침 본문 중의 번역 오류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2월 7일]

다음의 글들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성경 용어인 "심장(heart)"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어떠한 말씀들을 하시는지 꼭 읽도록 하십시오. 영어로 "heart" 로 번역되는, 그 기원이 히브리어 구약 성경 본문인, 성경 용어는 그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가 [표준국어대사전에 그 의미가 주어진 추상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순수한 우리말 "마음"의 의미가 결코 아닌] 우리 몸/신체의 가장 중요한 장기인 "심장(염통)"을 말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국내의 성직자 및 수도자들께서 꼭 읽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84.htm [성 요한 바오로 2세]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00.htm [성 요한 바오로 2세]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98.htm [베네딕토 16세]<----- 필독 권고

[이상, 내용 추가 끝]

 

아래에 있는 나열은, 다음의 출처들에 있는 영문본 교리교육 총지침(General Directory for Catechesis)우리말본 교리교육 총지침의 본문들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한 결과 입니다:

 

출처 1: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clergy/documents/
rc_con_ccatheduc_doc_17041998_directory-for-catechesis_en.html
 [영문본]

출처 2: http://ebook.cbck.or.kr/gallery/view.asp?seq=113146&path=100118164644 [우리말본]

 

우리말본 교리교육 총지침에서, 다음과 같이 바로잡아 주십시오:

 

제15항에서,

사람의 마음 -----> 사람들의 심장들(the hearts of men)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에서만 ----->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심장에서만(only in a well disposed heart)

 

제17항에서,

그리스도인의 마음 -----> 그리스도인들의 심장들(Christian hearts)

 

제25장에서,

곧 종교심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았지만 -----> 곧 비록 다수의 심장들에 있어(in many hearts) 종교에 대한 느낌(religious feeling)이 이미 완전하게 상실되지 않았지만

 

제41항에서,

모든 성경의 핵심이다 -----> 성경 본문 모두의 심장(the heart of  all the Scriptures)

 

제46항에서,

복음화란 "인류의 모든 계층까지 기쁜 소식을 전해 주며, 그 힘으로 인류를 내부로부터 변화시켜 새롭게 하는 것이다" -----> 복음화란 "이 복음(the Good News)의 힘에 의하여 이 복음이 사람들의 심장(the hearts of men)들 안쪽으로 들어가 그리하여 인류를 일신할 수 있도록 인류의 모든 부문을 향하여 이 복음을 바깥으로 전하는 것을 말한다(the carrying forth of the Good News to every sector of the human race so that by its strength it may enter into the hearts of men and renew the human race)."

 

제55항에서,

정신과 마음 -----> 마음 및 심장(mind and heart)

마음 -----> 심장(heart) (3번)

 

제56항에서,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 믿는 이들의 심장들 안에서(in the hearts of believers)

마음속에 -----> 심장 안에(in the heart)

 

제67항에서,

마음에서부터 -----> "심장"으로부터(from the "heart")

 

제78항에서,

교회는 주님의 어버니를 본받아 마음속에 복음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 교회는 이 복음을 자신의 심장 안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음에 있어 주님의 어머니를 본보기로 합니다(The Church imitates the Mother of the Lord in treasuring the Gospel in her heart).

대상자들의 마음에 -----> 대상자들의 심장들 안에(in the hearts of)

 

제79항에서,

인간 마음속 -----> 인간의 심장(the human heart)

 

제84항에서,

마음이 온유하고 -----> 심장에 있어(in heart)

 

제94항 직전의 발췌문에서,

마음 -----> 심장(heart) (2번)

목숨 -----> 영혼(soul)

 

제98항에서,

교리교육의 핵심에서 -----> 교리교육의 심장에서(at the heart of catechesis)

 

제104항에서,

희망에 찬 마음으로 -----> 희망에 찬 심장들과 함께(with hearts full of hope)

 

제105항에서,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 믿는 이들의 심장들 안에(in the hearts of believers)

 

제109항에서, [제131항에서의 동일한 원문에 대한 우리말 번역과도 다름]

일정한 문화나 여러 문화들 한가운데에 -----> 문화의 바로 그 심장의 안쪽으로 그리하여 문화들 안쪽으로(into the very heart of culture and cultures)

 

제116항에서,

인간의 정신 -----> 인간의 마음(a human mind)

인간의 마음 -----> 인간의 심장(a human heart)

 

제117항에서,

인간의 마음 -----> 인간의 심장(the human heart)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 사람의 심장 안에 존재하는(present in the heart of man)

 

제122항에서,

온 마음을 다하여 -----> 온 심장을 다하여(with all one's heart)

 

제127항에서,

지성과 교회의 마음을 가지고 -----> 교회의 마음심장으로(with the mind and heart of the Church)

 

제131항에서, [제109항에서의 동일한 원문에 대한 우리말 번역과도 다름]

문화나 여러 문화들 한가운데에 -----> 문화의 바로 그 심장의 안쪽으로 그리하여 문화들 안쪽으로(into the very heart of culture and cultures)

 

제144항에서,

자신의 지혜, 의지, 마음, 기억 등을 -----> 자신의 지능(intelligence), 의지(will), 심장(heart) 그리고 기억(memory)을

 

제183항에서,

교리교육의 핵심 -----> 교리교육의 심장(the heart of catechesis)

 

제203항의 직전 발췌문에서,  [제109항과 제131항에서의 동일한 원문에 대한 우리말 번역과도 다름]

어느 특정한 문화나 여러 문화 한 가운데에 -----> 문화의 바로 그 심장의 안쪽으로 그리하여 문화들 안쪽으로(into the very heart of culture and cultures)

 

제205항에서,

올바른 교리교육은 신앙의 지적 동화를 촉진할 뿐만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을 변화시킨다. -----> 지성이 이 믿음을 자기 것으로 흡수할뿐만이 아니라, 또한 심장을 접촉하고 그리하여 처신을 변화시키는, 한 개의 교리교육은 온당한 것이다(a catechesis which inspires not only intellecual assimilation of the faith, but also touches the heart and transforms conduct is correct).

 

제242항에서,

인간 내면의 -----> 인간의 심장의(of the human heart)

 

제244항에서,

사람의 마음에 -----> 사람의 심장 안에(in the heart of man)

 

4-5. 다음은 교리교육용 총지침서 제26항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intratext.com/IXT/ENG0159/_PB.HTM#AX

(발췌 시작)

26. There is also a certain number of baptized Christians who, desiring to promote dialogue with various cultures and other religious confessions, or on account of a certain reticence on their part to live in contemporary society as believers, fail to give explicit and courageous witness in their lives to the faith of Jesus Christ. These concrete situations of the Christian faith call urgently on the sower to develop a new evangelization,(49) especially in those Churches of long-standing Christian tradition where secularism has made greater inroads. In this new context of evangelization, missionary proclamation and catechesis, especially of the young and of adults, is an evident priority.

 

26. 다양한 문화들과 다른 종교적 종파(religious confessions)들과 대화를 증진하기를 욕망함에도 불구하고(desiring), 혹은 믿는 자들로서 동시대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자신들 측에 있어 어떤 구체적인 과묵(recticence)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쪽으로 자신들의 삶들에 있어 명백한 그리고 용기있는 증언을 제시하는 데에 실패하는,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의 바로 이러한 구체적인 상황들은, 오래 계속되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특히 세속주의(secularism)가 이미 더 크게 침략들을 행해온 장소인, 바로 그러한 교회들에 있어, 씨를 뿌리는 자 측에 한 개의 새로운 복음화(a new evangelization)(49)(*)를 개발할 것을 다급하게 요청합니다. 복음화에 있어서의 바로 이러한 새로운 문맥 안에서, 특히 청년들에 대한 그리고 성년인 자들에 대한, 선교적 선포(missionary proclamation)와 교리교육은 어떤 분명한 우선권을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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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ChL, 34b; 33d.

ChL: John Paul II, Post-synodal Apostolic Exhortation, Christifedeles Laici (30 December 1988): AAS 81 (1989) pp. 393-521

http://w2.vatican.va/content/john-paul-ii/en/apost_exhortations/documents/
hf_jp-ii_exh_30121988_christifideles-laici.html

 

(*) 번역자 주: "새로운 복음화(new evangelization)" 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의 제1항제2항에 있으니, 별도의 시간을 내어서라도,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10.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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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4-6. 다음은 교리교육 총지침 본문에서 "하느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혹은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가 언급되고 있는 항들의 나열입니다. 특히, 이 표현들이 총 45번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5 kingdom <----- 클릭하여 꼭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이들이 2번 이상 언급되고 있는 항들은 다음과 같으며, 특히 집중적으로 주되게 11번 언급되고 있는 항이 제102항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제15항 (Introduction)

2 제34항,

2 제84항,

2 제101항,

11 제102항,

2 제140항,

2 제1 63항,

2 제228항.

 

4-7.  다음의 자료는, 케리그마(the Kerygma)라는 선포의 (i) 의미, (ii) 성경 근거, 그리고 (iii) 이 케리그마의 네 개의 구성 요소들을, "하늘 나라", 즉, "하느님의 나라" 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교리교육 총지침(GDC)" 제102항을 발췌 인용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www.kinoinstitute.org/wp-content/uploads/2011/08/Constitutive-Elements
-of-The-Kerygma.pdf
 

 

다음은, 바로 취의 출처에서 말하는, 케리그마(the Kerygma)의 네 개의 구성 요소들입니다:

 

(1) 하느님의 사랑의 실재(reality)와 당신의 구하시는 계획 (로마 8,38-39; 예레미야 29,11; 요한 복음서 10,10) 

 

GDC 102: “God is not a distant, inaccessible Being, a remote power without a name, but a Father, who is present among his creatures and whose power is his love…Jesus manifests that the history of humanity is not journeying towards nothingness, but, with its aspects of both grace and sin, is in him taken up by God and transformed.”

 

(2) 죄의 파괴성과 죄의 소원하게 하는 결과 (로마 3,23)

 

GDC 102: “Jesus, in announcing the Kingdom, proclaims the justice of God: he proclaims God’s judgment and our responsibility…The call to conversion and belief in the Gospel of the kingdom – a kingdom of justice, love and peace, and in whose light we shall be judged – is fundamental for catechesis.”

 

(3) 하느님의 아드님(성자)의 강생/육화와 파스카 신비: 인류의 "죄 문제" 에 대한 유일한 구제책(remedy) (요한 복음서 3,16; 14,6)

 

GDC 102: “Jesus declares that the Kingdom of God is inaugurated in him, in his very person.”

 

(4)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 쪽으로 통공(communion, 하나 됨)을 통하여 제공되는, 속량과 구원이라는 커다란 선물 (요한 묵시록 3,20; 요한 복음서 8,12;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21항)

 

GDC 102: “Jesus shows, equally, that the community of his disciples, the Church, ‘is, on earth, the seed and the beginning of that kingdom’ [LG 5] and, like leaven in the dough, what she desires is that the kingdom of God grow in the world like a great tree, giving shelter to all peoples and cultures.”
 

5. 

이번 항에서는, 위의 항들에서 함께 고찰하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선포)(the Kerygma)에 의하여 지상에서 그 현실태화(actualization)가 개시(開始)되었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해 온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마태오 복음서의 용어)" 혹은 "하느님 나라(the kingdom of God)" 라는 용어들이 나타내는 초자연적 개념(supernatural concept)이, (i) 언어 장벽, 문화 장벽 때문에, 우리나라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이유와 (ii) 이 용어들이 나타내는 개념 자체에 대하여, 그동안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작성한 글들로의 안내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래의 글들을 읽을 때에, 우선적으로, 우리말본 성경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등의 가톨릭 보편 교회의 핵심 문헌들이 모두 번역서들임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 본문에는 (i) 피조물인 인간들이라면, 동서고금에 걸쳐, 즉, 시대와 장소에 무관하게, 어느 정도 세상 경험들을 하게 되면 누구나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소위 말하는, 각자의 심장(heart)에 새겨져 있는 자연법(the natural law)의 범주에 속하는 자연적 개념(natural concepts)들을 나타내는 용어들과, (ii) 하느님으로부터 오기에 피조물인 인간들의 세상 경험들과 지성(intellect)만으로는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가 되나 그러나 올바르게 제대로 깊이있게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힘든, 거의 불가능한, 초자연적 개념(supernatural concepts)들을 나타내는 용어들이 뒤섞여 있음을 또한 항상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우리말본 성경과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등에서 사용되고 있는 명사들 혹은 형용사들의 7할 혹은 8할이, 설상가상으로, 한자 단어들을 차용(借用)하여 사용하고 있기에, 가톨릭 보편 교회의 우리말본 문헌들을 읽으면서, 이들 차용(借用) 번역 용어들을 접할 때에, 지중해 지역 문화권이 아닌 중국 한문 문화권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의 한국어 국어사전 혹은 한자자전 등에 주어져 있는 의미에 따라 이들 차용(借用) 번역 용어들의 의미들를 이해하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말로 번역되기 이전의 원 용어들의 의미가 이들 차용 번역 용어들로 번역된 원 용어들의 의미와 다른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이번 항에서 또한 다루고 있는 바와 같은, 예상밖의 잘못된 해석들과 추론들이 진행됨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5-1.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마태오 복음서)" 혹은 "하느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라는 용어들이 나타내는 초자연적 개념(supernatural concept)이, 언어 장벽, 문화 장벽 때문에, 우리나라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구체적인 이유에 대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지적의 글들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72.htm [제목: 과거의 번역오류와 지금까지의 개념전달 실패 때문]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79.htm [제목: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천국과 우리말 성경의 하늘 나라는 동일하지 않은 개념]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73.htm [제목: 천국과 하늘 나라(하느님 나라)는 동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75.htm [제목: 마르코 복음 관련해서 궁금합니다.] <---- 필독 권고

 

게시자 주 5-1: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2월 8일]
(1) 바로 위의 제5-1항에서 지적한 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제5-2항제5-3항에 안내된 귿들을 읽도록 하십시오. 특히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마태오 복음서)" 혹은 "하느님 나라(the kingdom of God)" 교회 안에, 특히 영성체에서 우리들 가운데에 있다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가르침들은 다음의 주소에 있으니,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72.htm <--- 필독 권고

[제목: 하느님의 나라 그 자체가 각자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직자들께서는 반드시 읽고 강론 말씀 중에 이 가르침을 국내의 가톨릭 교우님들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를 들어, 해마다 열 번 이상의 주일 미사 강론 말씀들에서) 반복하여, 널리 전달해 주실 것을 강력하게 요청드립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2)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마태오 복음서)" 혹은 "하느님 나라(the kingdom of God)" 라는 용어들이 나타내는 초자연적 개념(supernatural concept)에 대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신앙의 유산(the deposit of faith)"애 근거한, 자상한 가르침들을 읽고자 하는 분들께서는, 다음의 제5-4항으로 이동하십시오.

 

(3)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마태오 복음서)" 혹은 "하느님 나라(the kingdom of God)" 라는 용어들이 나타내는 초자연적 개념(supernatural concept)에 대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 모두로의 안내는 아래의 제5-5항에 있습니다.

(이상, 게시자 주 끝)

 

5-2.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마태오 복음서)" 혹은 "하느님 나라(the kingdom of God)" 라는 용어들이 나타내는 초자연적 개념(supernatural concept)의 번역 오류에 대한 글들은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KH_translation_errors.htm [번역 오류]

 

5-3.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마태오 복음서)" 혹은 "하느님 나라(the kingdom of God)" 라는 용어들이 나타내는 초자연적 개념(supernatural concept)의 개념 오류에 대한 글들은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KH_concept_errors.htm [개념 오류]

 

5-4.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마태오 복음서)" 혹은 "하느님 나라(the kingdom of God)" 라는 용어들이 나타내는 초자연적 개념(supernatural concept)에 대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신앙의 유산(the deposit of faith)"애 근거한, 자상한 가르침들은 다음에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굵게 표시된 제목의 글들을 차분히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John_Paul_II4Kingdom_of_heaven.htm <---- 필독 권고

 

5-5.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마태오 복음서)" 혹은 "하느님 나라(the kingdom of God)" 라는 용어들이 나타내는 초자연적 개념(supernatural concept)에 대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의 모음으로의 안내는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Kingdom_of_heaven.htm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6월 4일]

6.

다음에 있는 pdf 파일에 담긴 복음화에 대한 설명을 또한 참고하십시오:

https://oca.org/cdn/PDFs/evangelization/basics-of-evangelism.pdf [제공처: 미국에 있는 정교회 홈페이지]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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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36시간 (위의 제5항의 잘 정돈된 안내를 제공하기 위한 자료 검색/정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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