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동성당 게시판

갑자기...생각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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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일수 [PAULK] 쪽지 캡슐

1999-09-03 ㅣ No.2243

 

 

술을 먹었습니다...미소주 반병..아내가 해준  순두부찌게 반찬을 안주삼아서.....

원래 술이 약합니다..지가유~~~~~

술먹구 자는게 특기인디...자기전에 연도 바치구...기도하는데...아버님 생각이 절실히 납니다..

갑자기..

 

울 아버지 이런분이었답니다....간혹..TV나 라디오의 토론 프로그램에서"정릉의 곽입니다"라고 의견같은걸 많이 제시하곤 하셨죠.

중앙일보입니다.....아래의 글에서 작은 아덜놈이 접니다.....

약간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는디......아버님...부디 주님과 함께하시고....평안히 잠드소서..아멘..

 

 

▶ 게 재 일 : 1995년 06월 24일 11 面(40 版)

▶ 글 쓴 이 : 강위석 곽병환  

 

<들으며생각하며>35.참전용사 郭秉煥씨 내가 본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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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참전용사 곽병환(郭秉煥.69)씨는 오늘 1995년6월24일이 45년전 1950년의 6월24일과 같은 토요일임을 강조한다.그날 그는 한국군 1사단 12연대 정보과 소속 이등중사로서 당시의 38선 이남 최전방 도시였던 개성에서 복무하고 있었다.그날의 개성은 이튿날 아침6시면 거의 무저항 상태로 인민군의 군화에 짓밟힐 수밖에 없도록 北이 짜놓은 흉계 속에 깊숙이 빠져 있는 줄도 모른채 순진하게 쉬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달 닷새 뒤인 8월1일부터 25일까지 25일동안 경상북도칠곡군가산면 다부동 한 조그만 골짜기에서는 이곳까지 밀려 내려온 아군의 필사적 저항이 벌어진다.6.25 최대의 격전인 그 유명한「다부동(또는 다부원)전투」가 그것이 다.밤낮 없이 콩 볶는 듯 피아(彼我)간에 서로 퍼부은 포화 속에서 아군은 전사자 2천3백명.부상자 5천명,인민군은 전사자 5천명을 냈다.郭씨는 이 전투에서 싸웠다.오늘 그 다부동 전적지에서는 충혼비 제막식과 구국회관 준공식이 열린 다.郭씨는「다부동전투전우회」의 간사로서 그날의 전우인 다른 생존 회원 천여명과 함께그 식전에 모인다. 조지훈(趙芝薰)은『다부원에서』란 詩에 다음과 같이 썼다. 彼我 공방(攻防)의 포화가/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이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郭씨는『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라고 한 이 詩에 동의하지 않는다.그 황폐했던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이었던가를 알아내려고지금도 문서와 사람을 찾아 묻고 다닌다.그 가련했던 주검에 안식이 있으려면 그 주검을 운명의 말미암음에 돌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때늦은 지금이라도 그 주검들이 몇몇 인간의 음모와 잔학때문임을 밝혀내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6.25의 아픔을 망각증과 얼버무림 밑으로 묻어버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아픔을 생생하게 드러내 잘잘못을 깡그리 밝힘으로써만 우리의 병든 역사를 치료할 수 있다고 그는 확신한다. 『저는 당시의 국방장관 신성모(申性模)와 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이 적과 내통하고 있었거나 적어도 완전히 적의 술책에 말려들어 있었다는 말을 사실이라고 믿습니다.여기에는 무수한 증거가 있습니다.이른바 당시「38선 무역」만해도 그렇습 니다.북에서는 주로 건명태등 수산물과 금이 왔고,남에서는 의약품.전선(電線).타이어.라디오진공관등 전략물자가 갔습니다.이 쪽에서 가는 물건은 미리 견고하게 포장이 되어 있었는데 절대로 내용을 검사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저는 그 속에 북으로 보내는 비밀 정보들이 들어 있었다고 봅니다.김석원(金錫源)장군은 이 38선무역을 끝까지 반대하다가 1사단장 자리에서 해임되었지요. 채병덕도 참모총장 자리를 쫓겨났지만 50년4월 도로 복직되어 38선무역은 6.25 남침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해 6월15일자로 전군 지휘관 대이동이 있었습니다.전 장병은 최대한 모내기에 보내고 부대는 비어 있다시피 했습니다. 6월16일 서울 삼각지 참모학교 회의실에서 군 고급지휘관 회의가 열렸습니다.그 자리에서 김홍일(金弘壹)장군등 몇 분이 38선 경계가 허술하다며 후방 3개사단도 전방으로 배치하고 모내기 보낸 전 장병을 빨리 원대복귀 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신성모와 채병덕은 이를 완전히 묵살했습니다.아군 배후에는 일본과 미국이 있고,우리 M1.카빈 소총은 세계 최고 우수 화기이고,우리 장병의 사기는 일당백인데 무슨 쓸데없는 걱정들인가라며 큰 소리만 꽝꽝쳤던 것입니다.뿐만 아닙니다. 6월24일에는 용산 장교구락부 낙성식이 있었고 전국의 장교가모여 술을 마시고 댄스파티를 열었습니다.이튿날 6.25 남침을보고했을 때 신성모와 채병덕은 전날 저녁 늦게까지 진탕 놀았던나머지 오전내내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일요 일이라 전화를 안받는다는 것이었어요. 신성모는 이북의 이극로와 혈연 관계라는 말을 저는 들은 적이있습니다.혈연관계 까지는 몰라도 이 두사람은 같은 고향 사람으로서 일제때 한 사람은 독일,한 사람은 영국에 있으면서도 항상서로 연락하고 만나기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이용가치 있는 사람을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이용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기본 전술입니다.』 郭씨는 전북임실군에서 태어났다.전주농업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1948년 육군 사병으로 입대해 직업군인이 되었다.55년 준위에 임관되었고,4.19 직전인60년1월에 제대했다.그는 현재「준사관동지회」회장이다.정보 주특기로 군 대생활 12년을 보냈다.그의 말을 더 듣자. 『제가 소속한 부대가 개성으로 이동한 것은 50년4월이었습니다.저는 정보과에 있었기 때문에 첩자들의 보고로 그 당시 38선에서의 적의 동태를 알고 있었습니다.6.25 남침 8개월전 북은 38선 5㎞ 이내에서는 이미 주민을 전부 철 수시켜 놓고있었습니다.인민군부대들이 38선으로 계속 이동 집결하고 있었습니다.송악산 저편에 적 탱크 40대가 대기하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더니 육군본부는「인민군에 탱크가 있을리 만무하다」는 말로 묵살했습니다. 50년 6월24일 토요일 오후 저도 두군데서나 초대를 받았습니다.하나는 송악산밑 마을사람들이 초청한 것이었고 하나는 백천가서 온천하고 연안 가서 동동주 먹자는 초청이었습니다.저는 위험한 때니 두쪽 다 가서는 안된다고 동료들을 말 렸습니다.몇사람은 이쪽으로 갔고 다른 몇사람은 저쪽으로 갔습니다.그 사람들은 한사람도 그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독살 아니면 총살됐다고 봅니다.』 郭씨의 목소리는 이야기 대목대목에서 격정과 정의감 때문에 부르르 떨며 높아진다.그는 결코 이 나라에서 특혜를 받은 사람이 못된다.오히려 철저할 정도로 그 반대다.제대한 다음2년을 놀다가 한 증권관계기관에 취직해 부장까지 승진해 근무하다 55세 정년으로 퇴직했다.「군발이」찬밥 신세로 사는 그를 답답하게 여긴 둘째아들은 그 반발로 좌경 학생운동에 열렬히 가담한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그는 역사적 사실과 사상이론으로 자기의 젊은 아들과 줄기찬 논쟁을 벌인 끝에 그 젊은이의 생각을돌려놓았다고 한다.드문 일일 것이다. 『86년5월 인천사태때「남한은 미제국주의의 용병이다,6.25는 북침이었다」는 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을 보고 저는「결국 여기까지 오고 마는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이런 기막히는 소리가 왜나오게 됩니까.』 ***政權뺏은 군인 「반란군」 거기엔 두가지원인이 작용했다고 그는 분석한다.첫째는 거창양민학살사건 유형 일련의 사건이다.둘째는 군인이 정권을 탈취한 5.16,12.12 군사쿠데타다.그는 이 가운데 두번째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저는 정권을 탈취한 군인들을「반란군」이라고 부릅니다. 지난 주일 재향군인회 모임이 있었어요.제가 거기서 말했습니다. 「전장의 영웅한테만 줘야 할 무공훈장이 정권을 강탈한 반란군 놈,장군계급장 훔친 좀도둑놈들의 액세서리로 격하됐다.이 것을 심판해야 한다.이들이 국군묘지를 참배할 때 화환을 놓게 해서는안된다」고 말했어요.군인이 쿠데타 일으키면 제일 큰 피해는 군인이 받습니다.자기편 아닌 군인은 예편당하고 숙청당합니다.뿐만아니지요.모든 군인이 국민으로부터 명예를 잃고 말았습니다.5. 16,12.12 심판 안하면 아무때고 5.16,12.12 또 생깁니다. 북한 정권은 6.25를 민족해방전쟁이라고 개념을 확실하게 규정해두고 있습니다.민족해방전쟁이라니,말도 안되는 소리지요.그러나 우리한테는 이에 대항할 6.25전쟁의 아무런 역사적 성격규정을 못하고 있습니다.전쟁의 성격을 규정하는데는 그 전쟁에 참여한 군인을 어떻게 대접하느냐 하는 것이 그 열쇱니다. 우리나라에는 6.25 참전군인 생존자가 아직 30만명 있다고한다.그중에 직업군인이 1만명이고,이 가운데 나라로부터 생계보조금을 받는 사람은 생계가 곤란한 1천5백명뿐이라고 한다.郭씨의 말은 첫째 유형에 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거창사건에 희생된 무고한 양민은 7백19명이나 됩니다.6. 25가 나자 보도연맹 가입자 35만명 가운데 수원 이남에 있던30만명을 처형했습니다.그중에는 위험분자도 없지는 않았겠지요. 이 처형이 누구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는지 조차도 밝혀진바 없습니다.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사상범 4천5백명도 전원 총살했습니다.이 일련의 잔악한 사건에 대해 정부는 한번도 사과하지않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이승만(李承晩)대통령을 비롯해 고관들은 다 부산으로 도망쳤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복후에는 피란을 못하고남아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부역자라는 누명을 씌워 또 수만명을처형했습니다.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 가운 데 사상분열이 일어나는 원인입니다. ***6.25 의의규정도 소홀 왜 우리 헌법의 전문에 3.1운동과 4.19항쟁은 들어 있으면서 6.25전쟁은 빠져 있는 것입니까.우리가 싸운 6.25에 비하면 4.19는 말할 것도 없고 3.1운동 조차도 미미합니다.6.25는 소련과 중공 세력에 대항해 조국과 민족의 장래를 수호했던 위대한 전쟁입니다.제가 직접 조사해 보았습니다.우리나라 고등학교 국민윤리 교과서에6.25는 단 여섯줄이 쓰여 있습니다.대학의 국민윤리 교과서에는 단 한줄도 없습니다. 이에 비해 유럽 고등학교의 현대사 교과서에는 6.25에 관해여섯 페이지나 배정하고 있습니다.김일성의 죄는 죽었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그가 일으킨 전쟁은 수백만명의생령을 죽였습니다.6.25를 전후해서,그리고 군사 쿠데타등 우리 정부가 국민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철저하게 사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김일성 집단으로부터도 반드시 철저한 사과가 나와야 합니다.』 郭씨는 과거가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잘못은 반드시 반복된다는 것을 철저히 믿고 있다.노사병(老士兵)이 부르는 흘러간노래같은 걱정이 결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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