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추억의 5일장과 정선 아라리 장터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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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5-06-07 ㅣ No.3495

 

내 어릴 때 5일장은 온종일 축제분위기였었다.

읍내로 통하는 우리 마을 앞 신작로에는 인근 여러 마을에서 서둘러 장을 보러 나오는 촌사람들로 이른 아침부터 장사진을 이루었다.

가뭄에 콩 나듯이 자동차가 띄엄띄엄 보이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걸어 다녔고 여러 집이 어울려서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오는 이들도 있었다.

먹고 살기가 무척 힘들었던 그 시절, 촌사람들이 지게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장에 팔러 나오는 물건들이란 대부분 보리쌀이나 좁쌀, 콩이나 팥 같은 잡곡이거나 햇볕에 말린 고추나 마늘 같은 것들이었고 가끔 망태기에 이제 겨우 눈을 뜬 강아지나 돼지새끼를 팔러 나오는 이들도 있었다.

멀리, 동네 어귀나 목이 좋은 길목에는 촌사람들이 장터에 팔러 나오는 물건을 싼값으로 거둬들이는 수집상, 소위 장돌뱅이들이 이른 아침부터 나와 앉아서 곧잘 수작을 부렸었다.

“아재. 등허리 욕하네요. 무겁게 지고 장터에 가본들 금(값)을 더 쳐주는 것도 아니고 그만 여기 부려놓고(내려놓고) 시원한 탁주(막걸리) 한 사발 쭉 하면 속이 고만 시원할 텐데....?”

“아지메요. 목 부러집니더. 안 그래도 목이 짧아 뵈는데 글카다가(그렇게 하다가) 오래 못 사니데이. 여기다 내려놓으소 고만. 내가 장금보다 많이 쳐줌시더”

순진한 촌사람 꼬시는 방법도 여러 가지였다.

그런데 문제는 여태까지 어깨나 머리에 얹은 짐이 무겁다고 느끼지 않고 그곳까지 걸어왔던 사람들이 그 소리만 들으면 갑자기 짐이 무겁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금도 잘 쳐주고 시원한 막걸리까지 공짜로 준다니 내려놓지 않을 장사가 없다.

물건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흥정에 들어간다.

“지난 장날에는 금이 좋았다 캐서 가져나왔는데 우째 그래 쳐 줄라고 하는지 모르겠네.”하며 볼멘소리라도 할라치면

“아재는 우째 신문도 안 보능교? 지난 장에는 금이 좋았제요. 하지만 어제부터 내렸심더. 신문에 났니데이”하고 무안을 주기가 일쑤였다.

한때 “무식한 사람하고 싸우면 목소리 큰 놈이 이기고 촌사람하고 싸울 때는 신문에 났다 하면 끝난다.”는 말이 있었듯이 그 시절에 신문을 보는 사람이 과연 얼마였겠는가. 촌사람 중에는 가갸거겨도 모르는 이들이 숱하였는데 말이다.

결국 장돌뱅이 농간에 속아서 장사꾼이 쥐어 주는 대로 손에 돈을 받아 들고 읍내 장터로 들어선다. 우선 몸이 홀가분해서 좋다.

아침 일찍 서둘러 장을 보러 나오는 바람에 아침을 시원찮게 먹었으니 출출할 수밖에. ‘에라! 금강산구경도 식후경이라드라. 우선 먹고 보자’하며 두리번거리면 임시 부뚜막에 커다란 무쇠 가마솥에 설설 끓는 개장국에, 소고기 국에 둥둥 떠 있는 하얀 대파가 왜 그리 먹음직스러워 보이는지.....

국밥 한그릇 뚝딱하면 그제사 풍각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장날에 맞추어 찾아온 말광대(서커스) 천막이다.

바깥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구경 값이면 아이들 공책을 몇 권 살수 있을 텐데....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은 걸음이 돌아 선다.


그 시절 갓 시집 온 새색씨에게는 장날이 곧 외출날이었다. 지엄하신 시댁 어른들에게 장을 보러 나가겠다는 핑계를 대고 외출허락을 받아내기가 제일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장날 장터에 가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친정식구들을 장터에서 만날 수 있었고 시집을 오기 전까지 한 동네에 살았던 친한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새색씨 얼굴이 달처럼 환하다.

어물전, 유기전, 포목전 등으로 저마다 뿔뿔이 흩어졌던 마을 사람들이 장이 파할 무렵이면 신통하게도 한자리에 모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아침나절 값을 후려쳤던 장돌뱅이는 어느새 보따리를 싸서 보이지도 않고, 속아도 속은 줄 모르고 장에서 산 물건들을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생각에 그저 마냥 즐겁기만 하다.

서로가 장 본 물건들을 얘기하다 보면 뉘 집에 잔치 있고, 뉘 집에는 제사, 뉘 집에는 누구 생일까지도 마을사람들이 서로 소상히 알게 된다.

그래서 당시의 시골 5일장은 정보교환 장소나 다름이 없었다.

비록 모두가 가난하게 살았던 그 시절이었지만 서로 나눌 줄 알았고 함께 할 줄 알았던 그 시절이 마냥 그립기만 하다.


그래서 정선 아우라지 5일장을 보러 갔다. 관광버스 3대를 인솔하고....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실망이 컸다. 추억을 찾아서 그곳에 간 사람들에게 추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을 그곳 군수님은 전혀 몰랐다.

장터는 마치 서울에서 보는 재래시장이었을 뿐이었다. 답십리 골목시장이나 경동시장보다 훨씬 못했다.

차라리 정선강 옆 고수부지에 정선장날인 2일과 7일에는 임시로 천막이나 채양을 쳐서 동동구리무 장사, 엿장사 등을 데려다놓고 연출을 하는 성의라도 보여야 다시 또 그곳을 사람들이 가지 한번 가 본 사람이 어찌 다시 그곳에 가겠는가?

아우라지 촌에 갔더니 마치 왕건 셋트장처럼 해놓았다. 옛날 기와집이라고 지어 놓은 것이 흙벽 미장이 얼마나 현대적인지 마치 합판조각에 색칠을 한 것처럼 메끄럽게 보였다. 간간이 짚을 썰어서 섞은 옛날식 흙벽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선역에서 탄 꼬마관광열차는 현대식 디젤 기관차가 끄는 최신형 객실이었다. 도대체가 문화마인드가 있는 이들이 한 일일까 싶을 정도로 보는 이들 마음이 너무 안타까웠다.

관광열차라면 옛날식 증기기관차는 비록 힘이 들어서 못 가져놓는다 하드라도 딱딱한 나무의자에 옛날 통일호 객차를 갖다놓고 디젤 기관차에 모형으로 증기기관차를 덮씌우기 해서 얼마든지 그럴듯하게 만들 수가 있고 석탄이 타는 연기가 나는 듯이 시각효과를 내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어찌 그리 무관심한지....

외국에 가보면 추억의 관광명소가 너무나 많다. 캐나다에 토텐햄, 그리고 싱거폴의 센토사 섬 등지에 가서 그들이 “추억”을 관광상품으로 파는 솜씨를 벤쳐마킹을 해 와서라도 국내에도 어디 한곳쯤은 우리 가난했던 그 시절 정겨웠던 5일장을 보여주는 곳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 글을 쓴다.

물론 정선군수님께도 이 글을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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