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천진암에 갔더니

인쇄

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5-06-13 ㅣ No.3508

 

단오날, 마침 휴무 토요일이라서 친구 몇이 금요일 저녁때 승용차 2대에 나눠 타고 교외로 저녁밥을 먹으러 나갔다. 목적지는 팔당 마재 호수가의 ‘오동나무집’

장어구이 맛이 일품이려니와 해질 무렵의 잔잔한 호수, 그리고 이때쯤 되면 더욱 듣고 싶어지는 개구리 소리며 멀리 호수 건너 쪽의 야경 등이 너무 낭만적이어서 내가 자주 가는 집이었다. 처음엔 저녁만 먹고 돌아올 요량이었지만 나를 포함해서 몇 사람은 이미 집사람한테서 외박허가를 받아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내일이 쉬는 토요일이니(그중에는 매일 쉬는 이들도 있었지만) 느긋하게 한잔 하면서 그동안 만나지 못하여 쌓였던 얘기들도 하고 또 서로가 바빠서 손 놓고 있었던 동양화(?) 공부도 하자고 내가 주선한 자리였다.

“평소에 마누라한테 불신임 받아서 외박허가 못 받은 친구들은 제발 집에 가라. 그 나이에 쫓겨나면 어디 갈 데도 없다”

결국 3명은 금요일 밤에 서울로 돌아가고 허가를 받았거나 허가 받을 까닭이 없는 5명이 승용차 한 대에 끼여 타고 양평대교를 건넜다.

강변에 있는 야경이 매우 아름다운 민박집에 잠자리를 정하고 우리는 점 2백 짜리 동양화공부를 했다. 그것도 수입금의 50%는 무조건 공동경비로 자진납부 하는 것이니까 결코 노름을 한 것은 아니었다.

모처럼 만나서 함께 공부를 하니 시간이 가는 줄을 몰라 새벽 3시를 넘기고 잠들었으니 해가 중천에 떴을 때에서야 겨우 일어나 황태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퇴촌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디 시원한 계곡을 찾아 가서 돗자리 깔아놓고 영업하는 집에 가서 2차전을 해서 점심까지 해결하고 서울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다른 이는 모두가 해장술을 한두 잔씩 했으므로 운전대는 내 차지였다.

한참 퇴촌 쪽을 향해 운전을 하며 가는데 “천진암 천주교성지”라는 이정 표지판을 보고 그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동안 말은 들은 바 있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라 길은 잘 몰랐지만 거의 외통길이라서 그냥 앞만 보고 따라 들어가면 될 것 같았다.

“우린 천주교신자도 아닌데 왜 거기로 가냐?” 했지만

“엿은 가위 잡은 엿장수 맘대로, 차는 운전대 잡은 기사 맘대로 한다는 걸 어찌 모르는고?”하고 천진암 주차장에 차를 갖다 세웠다.

약간 비탈길이었지만 커다란 십자가를 지나 올라가니 널따란 벌판처럼 펑퍼짐한 곳에 100년을 걸쳐 성전을 지을 터가 마련 돼 있었다. 일행 모두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놀라는 것 같아서 내 어깨가 약간 으쓱해졌다.

내가 비록 풍수에 밝지 못하여 좌청룡 우백호 같은 것은 몰라도 천진암 성당 터를 둘러싼 주위 산세가 기막히게 좋아 보였다. 커다란 반석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려니 성전건축 헌금을 넣는 스텐 함이 있었다.

“야.100년 후이면 우리 모두가 다 죽고 난 다음에 가서야 이 성당이 선다는 것 아니냐?”

“우리만 죽냐? 우리 아이들도 다 죽은 후에 성당이 이 자리에 서는 것이지”

신자도 아닌 친구가 먼저 지갑을 꺼내더니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함에 넣는 것이 아닌가?

“저 자식 과용하네. 천주교신자도 아닌 것이 왜 저러지?” 누가 그러니까

“야. 이놈들아. 생각해 봐라. 100년 뒤에나 완공할 계획으로 100년 동안 공을 들여서 이 성당을 짓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 외국 가니까 몇 백 년에 걸쳐서 지은 성당도 있던데 우리나라에도 그런 성당건물이 하나 선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 종교 따지지 말고 모두 내라 짜식들아. 저승 가서 벌 안 받고 싶으면.....”

외려 신자인 나보다 그 친구가 나서서 하다못해 5천원이라도 모두들 헌금을 하고 내려오는데 입구에서 안내하는 분이 2시에 경당에서 미사를 올린다고 했다.

하지만 일행들이 있으니 그럴 순 없고 퇴촌으로 돌아오려는데 바로 천진암 주차장 조금 내려와서 계곡 옆에 “산사랑”이란 식당이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3만 원 이상만 팔아주면 계곡 옆에 있는 원두막은 공짜로 쓰라니 인심 또한 후했다.

2020년까지 기초공사를 하고 2040년까지 골조공사, 2070년까지 조적공사. 2079년까지 마감공사를 끝내서 한국천주교회 창립 300주년에 완공된다는 천진암 성당은 좌석총수가 33,000석 1층 넓이가 약 8,100평이라니 그 규모가 가히 놀랍기만 하다.

대성당 건축에 사용될 사방 1미터 크기의 화강암 돌 하나 값이 1 백만 원 이라 했다.

“고스톱은 무슨 고 스톱이냐? 어디 가서 점심이나 먹고 그냥 돌아가자.” 2차전을 벼르던 친구가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서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자네가 왜 그래? 아까까지는 복수전을 해야 한다고 앞장을 서더니만?”하며 내가 물었더니

“너는 눈도 없냐? 더구나 너는 천주교 신자라면서?” 그가 그랬다.

“천주교 신자? 천주교신자가 어째서?” 내가 영문을 몰라 물었더니

“100년 뒤에 우리가 모두 어디 있겠냐?" 하는 것이었다.

“어디 있기는 어디 있어? 우리 모두 죽어서 없어지지”

“아니야. 땅 속에 있겠지?” 누군가 곁에서 거들며 그랬다.

“땅 속에 있는 건 썩어문드러진 우리 육신이지 그게 어째서 너냐? 나냐?”

“야. 이 짜식 왜 이러냐? 꼭 정신 나간 눔 얘기하듯 하잖아?”

모두가 웃고 말았지만 그 얘기 하다 보니 그만 모두들 동양화 공부할 생각이 머리에서 달아나 버렸다.

결국은 ‘산사랑’ 식당에 3만 5천 원짜리 한방 오리백숙을 한 마리를 시켜놓고 다시 술을 마시긴 했지만 60이 넘은 우리들의 화제는 이미 삶과 죽음, 죽음 뒤에 오는 세상. 영혼세계 등으로 심각해져만 갔다.

천진암 성전을 본 충격 탓이리라. 나도 그랬지만 표정들을 보니 모두가 자신이 죽은 후의 생각을 하는 듯 진지했다. 역시 그곳은 성지였다. 폐찰 천진암에서 몰래 숨어서 천주실의책을 가지고 이 땅에서 처음 천주학을 배우며 가르쳤던 이 벽,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승훈 등 그분들의 발자국이 어디엔가 있단 말인가? 내 친한 친구들에게 살아서 죽음을 생각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해준 천진암이 나로서는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내 아이들을 한번 데리고 와야겠어. 그때는 이 애비 이름으로 저기에 쓸 돌 하나 값을 기부하라 할 꺼다. 내 너한테 약속 하마” 그 친구가 그랬다. 그 약속이 꼭 실행되기 바라면서

자주 천진암으로 가리라. 내 살아있는 동안에............



47 3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