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내 이웃, 조선족 미스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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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5-07-05 ㅣ No.3527

조선족 미스 김


 그날 오후 6시 무렵 퇴근시간이 가까웠을 때였다.

 며칠 동안 사무실을 비울 생각을 하며 책상을 정리하고 있을 때 평소 가까이 지내는 후배 L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배님, 내일 중국 가신다면서요?”

 “그래. 내일 아침 비행기로. 그런데 나 중국 간다는 건 자네가 어떻게 알았어?”

 “제가 누굽니까? 항상 안테나가 열려 있지 않습니까?”

 수화기 저 쪽으로 후배의 웃는 얼굴이 보이는 듯 했다.

 “역시 자네 안테나는 성능이 대단해. 그래 뭐 내게 특별히 부탁할 거라도 있나?”

 나는 그가 부탁을 할 일이 있어 전화를 한 줄로만 알았다.

 “아닙니다. 선배님께서 모처럼 해외 나들이를 하신다니 제가 여비라도 조금 보태 드려야 도리일 것 같아서요.”

 “고마워. 말씀만 들어도 고맙네. 받은 걸로 할 게.”

 나는 그렇게 인사로서 끝날 줄로 알았는데 그는 막무가내로 나를 만나야 겠다는 것이었다.

 전에도 그와 한번 만난 적이 있는 ‘까치다방’에서 만나기로 하고 내 단골인 그 다방으로 나갔다.

 카운터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던 미스 김이 반색을 하며 자리를 정해주고 냉수 한 컵을 가지고 차 주문을 받으러 왔다.

 “뭔 차를 드릴까요?”

 “뭔 차? 지프차를 주든지 화물차를 주든지 미스 김 알아서 갖고 와 봐.”

 나는 미스 김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사람들이 미스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녀가 이미 서른 살을 넘긴 나이고 미스가 아니란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후배한테서 휴대폰으로 차가 막혀서 도착시간이 좀 늦어지겠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 나는 다시 미스 김을 불렀다.

 “여기 커피 한잔 가져오고 미스 김도 마시고 싶은 차 있으면 한 잔 가져 와.”

 미스 김은 고맙다는 듯이 눈인사를 하고 돌아가 두 잔의 커피를 소반에 담아 들고 와서 설탕을 넣어 휘저은 다음 내 앞에 밀어 놓았다.

 “미스 김, 뭔 차를 드릴까요? 그런 식으로 손님한테 무뚝뚝하게 말하는 것보다는 이왕이면 ‘손님, 무슨 차를 마시겠습니까?’ 하면 손님이 듣기 좋잖아? 미스 김이 조선족이고 내 동생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내가 하는 말이니까 고깝게 듣지는 말고...”

 미스 김이 대답 대신 멋쩍은 웃음을 보이긴 했지만 나의 그 말에 미스 김이 기분을 상한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때 헐레벌떡 후배가 다방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차를 주문하자 미스 김이 자리를 잠깐 떴다가 후배가 주문한 녹차 한 잔을 가져와 다시 내 곁에 앉았다.

 “선배님. 중국 어디를 가십니까? 계림이 좋다던데 거기 가시는 것 입니까?”

 “아니.”

 “그럼?”

 “용정으로 해서 백두산을 가는 거야. 가는 날은 연길에서 자고...”

 그때였다. 우리 얘기를 듣고 있던 미스 김이 갑자기 얘기를 끊고 들어 왔다.

 “선생님, 중국 가세요?”

 “그래, 미스 김은 중국 어디야? 나는 내일 연길 가는데”

 “연길? 연길 가면 어느 호텔에서 자는 데요?”

 “청년호텔이라 그러던데...”

 “청년호텔?”

 그녀 눈이 휘둥그레 졌다.

 “왜? 청년호텔을 미스 김이 잘 알아?”

 “알구 말구요. 내 동생이 청년호텔 바로 뒤에 사는데요.”

 그녀는 마치 고향사람을 만난 듯 반가워 했다.

그러더니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가더니 느닷없이 은행통장을 내 앞에 내미는 것이었다.

 “선생님, 이 통장에 있는 이름이 내 이름이거든요.”

 “그래서?”

 “돈 보세요, 제가 해놓은 저금이 이만큼 있어요.”

 통장에 적힌 것을 얼핏 보니 약 6백만 원이 넘는 큰 돈이었다.

 “돈 많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그게 아니고 선생님 저 좀 도와 주세요”

 “?”

 “은행시간이 지나서 내가 이 돈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런데요, 내일   연길에 가시거든 선생님이 제 동생한테 돈 30만원만 주고 오세요.  돌아오시면 내가 꼭  갚을 게요."

 몇 번을 그 다방에 들려서 한 두 차례 함께 차를 마신 적은 있지만 별로 살갑게 지내지도 않는 나에게 그녀는 통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그럴 필요 없이 내일 은행에 가서 송금을 하면 간단하잖아?”

 나는 짐짓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되면 남편이 알아버리니까 그래요.”

 “남편이 안다? 그 남편이란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데?”

 그제서야 그녀는 내게 자신의 사정얘기를 설명했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를 중국에 두고 오직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나왔다고 했다.

 한국에 올 때 남편이 빚을 얻어서 보냈으며 현재 남편이 낸 빚도 마저 갚지 못하고 있는데 남편을 통해 자기 친정에 돈을 보낸다는 것은 남편한테 미안해서 못할 짓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편에 남편 모르게 친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줬으면 하는 그런 마음인 것 같았다.

 특히나 그녀에게는 한국에 나와 있는 동안에 결혼식을 올린 친정동생과 늙으신 어머니가 그 동생 집에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사정 얘기를 듣고 보니 내 가슴 언저리가 찡해서 결코 안 들어 줄 수가 없는 부탁인 것 같았다.

 “알았어, 무슨 얘긴지. 내가 30만원 주고 올께. 전화번호나 적어 줘.”

 그녀는 전화번호를 내게 적어준 뒤 곧장 중국으로 국제전화를 했다. 한국에서 가는 인편에 돈을 보냈으니 내일 저녁에는 집을 비우지 말고 잘 지키라고 당부하는 소리가 내 귀에 까지 들렸다.

 

이튿날 우리 일행이 장춘을 거쳐 연길에 도착한 것은 장춘공항의 기상악화로 인해 우리가 탄 비행기가 심양공항에 불시착했다가 다시 장춘으로 해서 연길에 닿는 바람에 예정시간 보다 다섯시간이 지난 오후 7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청년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기 무섭게 같은 건물 14층에 마련된 연회장으로 갔다.

 우리 일행을 초청해 준 용정시 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리준일 회장께서 마련하신 자리였다.

 양측의 상견례가 있은 후 만찬이 시작된 얼마 후 나는 자리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식당종업원에게 미스 김이 내게 준 전화번호를 보여주고 그쪽으로 전화를 하여 한국에서 온 손님이 이곳에서 기다린다고 연락을 해 달라고 하였다.

 10분이 채  안 되어 미스 김의 언니와 동생내외가 찾아 왔다.

 “동생이 참 착실하게 근무를 잘하고 있어요. 점잖은 사람들이 오는 식당인데 내가 다니는 천주교 성당 옆에 있거든요. 내가 어제 저녁에 우연히 들렀다가 연길에 간다고 했더니 이걸 좀 전해주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들에게 한국돈 30만원을 세어서 건냈다.

 돈을 받은 그들의 눈 가장자리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우리 언니 건강은...?”

 “심려 안 해도 돼요. 식당이니 음식도 잘 먹고 일도 크게 힘드는  일이 아니 거든요. 다만 아이들을 여기 두고왔으니 엄마로서 마음고생이 많겠죠. 혹시 아이들 사진이라도 갖다 주면 좋아할 텐데...”

 나는 가능한 한 그들을 안심시켜주고 싶은 마음이어서 그녀가 식당 일을 한다고 둘러댔다.

 “안 그래도 여기 아이들 사진하고 비디오테이프, 그리고 언니가 먹고 싶어 하는 양념을 좀 넣어왔어요. 짐이 되시겠지만 좀 갖다 주셨으면 해서리...”

 까만 비닐봉투에 담겨진 것을 내 앞에 내밀었다. 나로서는 내용물이 무엇인 지는 잘 몰라도 결코 못 가져 가겠다고 거절할 계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날 우리 일행이 청년호텔을 떠나 용정으로 자리를 옮겨서 용정시 일원의 일송정이며 용두레 우물, 두만강 삼합 조.중 국경선 등을 구경하고 난 다음에 일이 일어났다.

 그날 우리 일행은 아침 일찍 백두산을 향했고 장백폭포며 백두산 천지 등 관광을 마치고 연길공항에 나가서 장춘으로 가는 밤비행기를 타기로 돼 있었다.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호텔 방에서 내 짐을 챙기는데 아무리 찾아 봐도 하필이면 연길에서 조선족 자매가 미스 김에게 전해달라고 준 문제의 그 까만 비닐봉지가 없는 것이었다.

 분명히 내가 그날 밤 청년호텔 14층 로비에서 그것을 받아 일행 중 누군가에게 맡기면서 만찬행사가 끝나거든 내방에 갖다달라고 부탁을 한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것이었다.

 그날 밤 리준일 회장께서 베푼 환영연으로 인해 나는 준비관계로 매우 바쁜 몸이었고 그래서 함께 간 직원에게 맡긴 것 같은데 물어보았더니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 날 환영연이 끝난 후 14층 식당에서 우리 일행 것이라면서 그 비닐봉지를 주기에 봉지를 풀어서 내용물을 확인해 보니 아이들 사진과 비디오테이프, 중국음식에 들어가는 향료 등 우리 일행의 짐이 아닌 게 확실해서 임자를 찾아서 돌려주라며 그 물건을 청년호텔에 맡기고 왔다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음식에 들어가는 향료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이들 사진, 비디오테이프들을 안 가지고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노릇이었다.

 우리 일행에게 사단이 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급히 버스를 돌려서 연길에 있는 청년호텔로 향했다.

 다행히 그 물건은 거기 있었다.

 그 물건을 다시 찾으니 나로서는 잃어버린 귀중품을 다시 찾은 듯이 기뻤다.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 나는 까치다방으로 미스 김을 찾아 갔다. (실제는 송대섭 사도요한형제님네 동양광고 가게로 커피 두잔을 가지고 오라고 했었지요)

 그녀는 이미 국제전화를 통해 연길에서 내가 그의 가족과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물론 돈 30만원도 준비 해 가지고 있었다.

 “고마워요. 선생님. 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띤 채 행복해 했다.

 나는 말없이 그녀 앞에 연길에서 가지고 온 비닐봉지를 건냈다.

 “이게 뭔 데요?”

 “풀어 봐 동생내외가 미스 김 한테 보낸 거야.”

 “뭘 보냈다는 얘기는 안 하던데요.”

 “언니 놀래 주려고 일부러 얘기 안 했겠지. 얼른 열어봐.”

 그녀는 반갑게 그 봉지를 풀었다.

 아이들 사진이 나오자 그녀는 그만 훼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들과 다섯 살쯤 돼 보이는 딸아이 사진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어린 남매를 남겨 놓고 엄마(미스 김)는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 사진에 볼을 비비며 울고 있는 그녀를 보는 내 마음도 무척 쓰렸다.

 “울지 말어, 미스 김. 나도 우리 아이들이 요만한 나이었을 때 5년동안 인도네시아에 가서 돈을 벌어 왔었어. 긴 인생에 잠시 떨어져 사는 거야. 김 양이 지금 엄마로서 부끄럽게 사는 게 아니잖아. 그럼 된 거야.”

 

그랬다. 조선족 미스 김은 조선족임을 애써 숨기지도 않고 품행도  방정하며 누가 봐도 성실한 모습으로 오늘을 사는 내 이웃이고 내 동포다.

나는 진정 그녀가 고국에서 큰 돈을 벌어 아이들 곁으로 어서 돌아가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위 글은 실화로 조선족 20만이 사는 중국 용정시 '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가 한글로 출판하는 문학지 "일송정"(옛 간도 "北鄕"誌 復刊) 제 6호에 제가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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