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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티브를 치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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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 [novita] 쪽지 캡슐

2002-08-09 ㅣ No.2652

내용이 좋아서 퍼왔습니다..

 

 

 

컬처클럽 : 거실서 TV를 치웁시다

 

  

▶ 2002/8/9

 

안녕하세요. 문화부 한현우입니다. 저는 얼마 전 저희 신문에 “충격적인 TV 뉴스로부터 어린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본 ‘방송과 청소년에 관한 위원회’의 보고서 내용을 기사화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작년 9·11 테러 당시 TV 뉴스에 노출된 아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그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앞으로 충격적인 뉴스와 관련해 TV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보고서에는 테러 후 “유치원에도 비행기가 충돌할까봐 무섭다”는 반응, 장난감 블럭으로 빌딩을 만들고 그 빌딩에 뛰어드는 아이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이 기사를 쓰고 난 뒤 한 어머니께서 저에게 메일을 보내셨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나눌 가치가 있다고 여겨 그 일부를 소개할까 합니다.

 

“저는 지난 테러 때 만 4살 된 아들과 함께 미국에 있었습니다. 우리 애는 그때 대학 아동발달학과 부속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사고 뉴스가 나오자 마자 학교에서는 학부모들에게 안내문을 통해, 첫째 절대로 속단하지 말고 (아랍인들에 대한 린치 위험이 큰 상황이었기 때문에), 둘째, 아이들 앞에서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Even words can teach hate), 끝으로 제일 중요한 것이 아이들에게 자신들은 안전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이 세번째 주문은 잘 이해가 안되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지요. 뜬금없이 4살짜리한테 너는 엄마 아빠가 잘 지켜주니까 안전하다고 말하라는데 어색하기도 하구요.

 

그런데 어느날 우리 아이가 블록을 높이 쌓아 놓고는 장난감 비행기를 그 사이에 꽂아 놓고는 ’이게 plane이 building에 crash하는 거야’ 하는데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그 장면의 무지무지한 폭력성과 panic에 휩싸인 어른들 모습이 그 네살짜리에게 어떤 공포감을 주었을까를 생각하니 이 엄마의 무지가 정말 미안했습니다. 그 후에는 너는 엄마 아빠가 함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수시로 이야기해주고, TV에서는 그 장면을 보지 못하도록 했지요. 기사의 취지대로 언론매체의 역할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방송 뿐아니라 사회 전체의 의무입니다.

 

이번 월드컵 기간동안 정말 한반도가 들썩거렸었지요. 인터뷰도 참 많았었구요. 그런데 제게 제일 기억에 남는 인터뷰는 한 초등학생이 나와서, "...저는요, 우리나라가 IMF 나라고 그래서 나쁜 나라인줄 알았는데, 이번에 월드컵에서 이렇게 잘 하는 것을 보니까 다시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는 것이었죠. 지금 초등학생이니, 1997년 IMF때는 훨씬 어렸을텐데, 어쩌다가 그 IMF라는 것이 저 아이의 가슴에 저런 상처를 주었을까 싶었죠. 우리나라가 나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우리는 그 때 어른들의 슬픔과 공포가 너무 커서 우리 아이들이 겪을 슬픔과 공포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 버렸다는 생각이 드네요. 미국에서 연수하면서 그 나라 시스템에 문제가 참 많지만, 어떤 맥락에서나 아이들에 대한 배려를 꼭 집어 넣는 것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분은 “지속적으로 우리 아이들을 배려하는 기사를 써달라”고 부탁하시면서 편지를 맺었습니다. 회원 여러분 댁에 TV 한대씩은 다 갖고 계시겠지요? 어디에 두셨습니까? 아마도 95% 이상이 거실에 TV를 두고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새로 구입한 주방용 칼과 와이셔츠를 다리기 위해 달구어놓은 다리미, 화장실 묵은 때를 지우기 위해 쓰고 남은 염산은 어디에 보관하십니까. 설마 거실 한 가운데에 무방비 상태로 두시진 않았겠죠.

 

제 비유가 좀 지나친가요? 저는 우리나라 방방곡곡 가정마다 TV가 상석(上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영 못마땅합니다. 큰 아들이 외국 유학을 마치고 5년만에 집에 왔습니다. 둘째인 딸은 수험생이어서 새벽에 나갔다가 심야에 들어오더니, 결국 수능시험을 마쳤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모든 가족이 둘러앉아 보글보글 끓는 냄비와 따끈한 밥을 마주했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게 몇년 만이냐. 정말 반갑고 자랑스럽다. 어디 TV 좀 켜봐라!”

 

이런 상황, 실제 우리 가정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아이에게 젖을 먹이면서 불륜 드라마를 보는 엄마, “잠깐 나갔다 올 테니 TV 보고 있어라”고 말하는 아빠, “너 숙제 다 하면 TV 보게 해줄게”라며 부모의 권위를 아예 TV에게 양도하는 부모.... 이제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아이도 리모콘의 빨간 버튼을 눌러 TV를 켜고, 화살표 버튼으로 채널을 바꿀 줄 알지요. 한 술 더 떠, 아이의 그런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가 “아이구, 우리 아무개가 다 컸네. TV를 다 켜고!”하고 환호합니다. 엄마는 옆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실로 엽기적인 장면이 아닌가요?

 

TV를 칼 다루듯 하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칼은 아주 유용한 도구이지요. 그러나 잘못 다루면 칼 만큼 위험한 물건도 없습니다. 오늘 당장 TV를 안방으로 옮겨놓는 건 어떨까요? TV를 거실 한 가운데가 아닌, 안방 한 구석으로 옮겨놓고 TV 있던 자리에 가족 사진을 넣은 액자들을 놓으세요. 집의 얼굴이 바뀝니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많아지고, 책이 가까워지죠. 가족끼리 대화가 많고 책을 많이 읽으면, 이혼도 없고 가출도 없다고 믿습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쿵쿵따 게임에서 단어를 못댔다고 집단폭행 당하는 장면이나, 노래를 못외웠다고 쟁반으로 머리 한가운데를 정통으로 후려치는 그런 TV를 보고 있는 집, 웃음꽃이 만발하겠지만, 정말정말 행복한 가정인가요? 만약 그렇다 해도, 저는 결단코 저희 집의 행복을 개그맨들에게 저당잡히지는 않겠습니다./한현우 드림 hw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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