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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목사님의 목사 개론[犬論]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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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15 ㅣ No.3137

 

 

목사 개[犬]론 - 한 성 수 목사

 

한성수 목사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감신대, 예일대 신학부,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뉴욕주 Port Jefferson UMC 담임목사이다.  

 

 벌써 30여 년 전, 1960년대에 한국에서 상아탑(象牙塔)인가 우골탑(牛骨塔)인가 하고 불렸던 대학교 교정을 서성이며 드나들던 때, 내게 제일 골치 아프고 종잡을 수 없던 과목들은, 대개 교양 과정에 속하는 무슨 무슨 "개론(槪論)"들이었다고 기억된다. 철학 개론, 종교학 개론, 심리학 개론, 사회학 개론 등등. 영어로는 흔히 Survey니 혹은 Introduction이니 하고 번역하는 모양인데, 대충 두루뭉수리로 예 집적 제 집적, 게으른 사람이 처삼촌(妻三寸) 무덤에 벌초하듯이 건성으로 훑어 가고는, 학기말에 시험을 볼 때가 되면, 아는 게 뭔지 모르는 게 뭔지 분간이 안 되었다. 아는 것도 별로 없거니와 그렇다고 모르는 것도 없는 듯이 떠들어 보는 허영의 뒤안길에는, 매우 한심스런 수준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꽤나 속상하게 만드는 거, 그게 바로 "개론"이라는 것들이었다.

 

한국을 떠난 지 꽤 오래되어, 섣불리 미국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기가 무척 거북한 기분이 들기는 하는데, 하여간 요즘은 어떤지 모르나, 오래 전 한국의 대학이라는 데서는 "개론(槪論)"은 주로 분필 잡는 세월이 아직 오래지 않은 풋내기 강사들 차지이고, "각론(各論)"쯤 되어야 고명하신 교수님들이 강의를 맡으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미국에서는 "개론"일수록 저명하신 교수들이 맡아서 강의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요컨대 숲을 보느냐 나무를 보느냐의 차이인데, 하기사 젊고 팔팔한 사람이라야 발빠른 걸음으로 이 나무 저 나무 숲속을 헤집고 다닐 것이요, 늙고 흐느적거리는 다리로야 그저 한 나무에 기대어 서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일이겠지....

 

각설하고, 지금부터 15년 전 내가 펼쳤던 "목사 개론"을 이제라도 뒤늦게 다시 한 번 강론하게 되니, 진실로 감개무량한 기분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처음 "목사 개론"을 펼 때는 나는 아직도 노상 배알이 꼴리는 이른바 평신도 시절이었기에, 홧김에 내뱉은 것이려니 여기고, 이제는 나도 목사랍시고 안수를 받고 설교단에 서서 감히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얼굴 가죽의 두께를 늘인 세월이 이러구러 12년이나 되었으니, 옛날의 철없이 떠들었던 "목사 개론"을 철회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스스로 회개하고 싶은 기분도 또한 안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지금도 그때 떠들어댄 "목사 개론"은 세월이 흘러도 시퍼렇게 살아서 내 가슴을 때리는 각성의 메시지로 다가 오기에, 오늘에 이르러 이를 철회할 생각이 별로 없어, 이렇게 개진하는 터이다.

 

때는 1981년 12월 31일, 한국에서 어떤 목사님(L 목사님이라고 해 두자)이 마침 뉴욕의 내 집에 오셔서 자그마치 한 달을 머무시면서, 노상 맨해튼(Manhattan)의 Metropolitan Museum이나 아니면 Greenwich Village Soho 거리를 헤매고자 매일 기차로 출근을 하시던 때라, 섣달 그믐날 나와 내 아내와 L 목사님과 세 사람이 밤새워 1일 부흥회(?)를 하였것다. L 목사님은 본시 식품가공학을 전공하셨다던가, 각종 술을 빚는 기술이 전문가의 경지에 도달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나고, 언제나 밝고 넉넉하신 인품이 그 대머리만큼이나 시원하신 분이다.

 

어쩌다 그의 고단하신 젊은 신세가 그만 신학교 문전에서 멈추어서, 옛날에는 "주(酒)님을 마셨고", 나중에는 "주(主)님을 모셨으니", "마" 다르고 "모" 다른 세월의 지혜를 잘도 겸비하신 분이었다. 세 사람이 다들 한때는 서대문 찬샘물(冷泉)을 조이 마셔 댄 이력이 있기에, 화제는 종횡무진하여, 옛 스승들 일화에서부터 현대 신학과 각종 목사 흉내에 이르기까지, 웃기도 하고 울분도 토하면서, 그 긴 밤을 거의 새다시피 "주님을 마시고 주님을 모시면서" 얻어낸 결론이, 그게 곧 "목사 개론"이다. 여기 "개론"은 내 1960년대의 골치 아팠던 각종 "개론(槪論)"이 아니라, "개(犬, dog)"에 대한 논의를 뜻하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목사는 개다!"라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행여 이 글을 읽는 분 가운데 목사님이 계시면, 여기쯤에서 벌써 속이 슬금슬금 끓어 오르실텐데, "목사놈이 글을 쓰면서, 목사는 개라고 주장하면, 그게 드러누워서 하늘에 침 뱉기지... 목사의 품위를 목사가 스스로 깍아내려 점잖지 못한 자기비하(自己卑下)를 하면, 이미 그 순간 목사 안수 받을 때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주신 권위에 스스로 똥칠을 하는 거야. 그렇게 개(犬)가 되고 싶으면, 제 혼자나 되지 왜 남까지 도매금에 끌어넣자고 나서. 고얀 놈!" 마음을 넉넉히 가지십시오. 여러 종류의 목사들이 낙동강 하구 울숙도의 철새들만큼이나 들끓는데, 나 같은 괴물 하나 더한들, 뭣이 그리 해롭겠습니까?

 

본시 "목사는 개다!"라고 주장하고 나서게 된 동기는, 하도 목사들이 평신도들을 "양떼"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면서, 자기들 목사들은 "목자(牧者)"라고 불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양(羊, sheep, 촌)과 목자(牧者, shepherd, 로이)의 관계는 유비(喩比)적인 표현이라, 옛 이스라엘의 히브리 성경에서도 툭하면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그려낸 오랜 전통이 있어 왔으니, 뭐 새삼스럽게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먹이지 않아도, 사람들의 골수에 깊이 박힌 관념으로 정착한 것이 어찌 오늘만의 문제랴. 교회 문전은 그만두고, 기독교인 장례식에 몇 번만 다녀와도 이내 익숙해지는 저 유명한 시편 23편도 이렇게 시작하지 않던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개역성경: 나는 이 번역문에 대하여 약간의 불만이 있지만). 본시 "목자(히브리어 로이)"라는 말이 성경에 처음 나오기는, 이미 창세기 46장, 특히 49장 24절,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라고, 곧 다가올 운명을 앞둔 야곱이 이른바 그의 열두 자식들을 축복하는 가운데, 신세를 많이 진 아들 요셉을 두고 유달리 흠뻑 복을 쏟아 붓는 장면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자, 그런데 목사들은 왜 평신도들을 양떼라고 부르기를 좋아할까? 그거야 물론 자기들은 성직자(聖職者)요, 기름 부음을 받은 하느님의 종이요, 교회라는 목장에서 양떼를 기르는 목양자(牧羊者)요, 그러니 아무래도 양떼들과는 격이 다른 고상한 위치에 있는 것을 끊임없이 자기 최면을 걸면서 살아야 직성이 풀리게 된 것 아닐까? 양떼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결국은 짐승떼요, 목자는 짐승이 아닌 사람이니, 평신도와 목사를 갈라놓는 가장 차별적인 관계, 즉 한 쪽은 끌려 다니고, 먹여지고, 길들여지고, 심하면 잡혀 먹히는 쪽이요, 다른 쪽은 인도하고, 먹이고, 때로는 잡아먹는 쪽이 되는데, 이러고도 고분고분 교회에 나가는 평신도는 도대체 뭔가? 요한복음 맨 끝 부분에 실려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더불어 주고받으신 저 유명한 대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이 모든 것들 보다 더) 사랑하느냐?" 세 번 거푸 물으시고, 세 번 거푸 당부하신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신 것이 바로 오늘의 목사들을 베드로의 후계자들로, 그리하여 양을 치는 목자로 인정케 한 든든한 근거가 된 것이나 아닌지?

 

좀더 세밀하게 읽어보면, 신약성경에서 "목자(牧者, shepherd, 포이멘)"란 단어는 모두 17번 나오는데(마태 3번, 마가 2번, 누가 4번, 요한 5번, 히 1번, 벧전 2번), 그 중 예수님을 목자에 비유한 곳이 마태 25:32, 26:31, 마가 14:27, 히브리 13:20, 벧전 5:4, 그리고 특히 요한 10:2, 11, 12, 14, 16에 있다. 매우 아름다운 축도(祝禱, Benediction)로 끝내는 히브리 13:20은 예수님을 "양(羊)의 큰 목자(the great shepherd of the sheep)"로 고백하는 초기 교회의 흔적이나, 흔히들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의 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요한복음 10장에 집중적으로 예수님 당신 자신의 입을 빌어, "나는 선한 목자이니..."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크리스천들의 관계를 읽고, 누가 감동하지 않겠는가? 구약성경 에스겔 34장에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을 질타하면서, 하느님 당신 자신을 선한 목자로 선포하시는 절절한 뜻은, 신약성경 요한복음 10장과 더불어 쌍벽(雙璧)을 이루어, 가장 연민에 가득 찬 목자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뒤에 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저 유명한 길 잃은 양의 이야기(누가 15, 마태 18) 또한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아, 예나 이제나 우리를 찾고 계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그려내려고 한 비유가 아니겠는가?

 

훗날 베드로 전서 5장에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利, sordid gain)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主掌, lord over)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초기 교회의 이른바 장로(長老, elder, 프레스뷔테로스)가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목자의 역할을 위임받고 있음을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장(牧者長, the chief shepherd, 아르키포이메노스)"으로, 그리고 장로들(오늘의 목사들)을 목자로 명명(命名)하는 교회의 질서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다른 곳에 나오는 감독(監督, Bishop, 에피스코포스)과 더불어 장로(長老)는 초기 교회의 목자들을 일컫는 직위인데, 이 전통이 발전하여 후일 로마 교황에 이르기까지 장황한 교회 직제를 편성케 한 것을 어찌 부인할 수야 있으리요?

 

다만, 이 비유를 그대로 믿고 이른바 양무리를 치는 오늘의 목사상, 또는 목자상이 어쩐지 으시시한 느낌이 드는 것이 문제다. "양무리를 친다"는 게, 양떼를 "두드려 팬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계신 듯한 목사님들이 꽤 있어서(실제, 나는 "교인과 땅콩은 달달 볶을수록 맛이 난다"라고 강조하는 한심스런 분도 만났다), "나는 ’친다’는 게 아니고 ’먹이고 기르고 돌본다’는 뜻인 줄 알고 있노라"고 자신 있게 다짐하시는 분들께서는 좀 언짢으시겠지만, 요즈음 "성숙(成熟)한 평신도(平信徒)" 타령을 열심히 하면서도, 속으로는 "정숙(靜肅)한 병신도(病身徒)"를 만들기에 여념이 없으신 목사님들을 뭐라고 부르면 좋겠는가? 이른바 "영력이 넘치시는" 목사로 인정받는 분들은 어이하여 한결같이 목줄기에 힘이 잔뜩 들어 그 위세가 기고만장(氣高萬丈)하고, 큰 교회의 "당회장(堂會長)"으로 불리기를 즐겨하는, 그리하여 제왕(帝王) 같은 권위를 잡고 서 있는 목사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저 시골구석에 처박힌, 그리고 저 바닷가에 거니는 쫄때기 전도사 나부랭이들은 허구한 날 고작해야 궁항(窮巷)의 무지랭이들 뒷치닥거리나 할까, 무슨 영력(靈力)이 있으리요? 하기사, 일구월심(日久月深) 기도하고 호소하고 열망하기를, 언젠가는 나도 서울의 초대형 교회의 강단에 서서 사자후(獅子吼)를 토해 내어, 연예인 뺨칠 인기 있는 명설교자가 될 날만 학수고대(鶴首苦待) 하는 자라면, 그런 말 들어 싸지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당회장(堂會長)"이라는 칭호는, 내가 알기로는 본시 장로교회의 "당회(堂會, Session)"를 주재하는 사회자를 이름이다.

 

장로교회도 아닌 교회들에서 웬 전통에도 없던 장로 제도를 도입하여서, 장로 1명에 목사 1명 있는 교회에서도 이른바 "당회"를 구성하고는, 목사님께서 떠억하니 "당회장"에 취임하고, 이어서 명함에도 "당회장 아무개 목사"라고 박아 넣어 다니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보아주어도 권력(power)에 환장(換腸)한 인상을 주는 걸 어쩌랴. 사실 "당회장"이야 교회 내부용 명칭이 아니던가? 당연히 "담임 목사"라는 명칭이 전 교인을 상대로 목회하는 직분이요, "당회장"이야 고작 장로 몇 명과 목사가 구성하는 소수의 그룹을 회의 주재한다는 뜻밖에 더 되랴. 그런데 왜 "담임 목사"라는 칭호보다는 "당회장"이란 칭호를 한결같이 선호하는 것일까?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주무르는 큰 회사의 "사장" "회장"들이 부럽기는 하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절묘한 수를 내기로 한다. 세속에서 아무리 높으신 "사장님, 회장님"도 거룩한 교회에 오면 그 칭호는 모두 무효, 그 대신 신령직이란 허울을 씌워 "장로"로 임명하면, 자동적으로 당회장의 권위 아래 굴복하게 되는 것, 그러니 "사장" 위에 "회장" 있고, "회장" 위에 "당회장" 있음을 만천하에 으시대고 싶은 것이리라. 아니면, 도대체 "당회장, 아무개 목사"가 왜 필요한가? 가장 거룩한 것을 빙자하여 가장 세속적인 권위를 배우려는 교회가 오늘의 교회다. 당회원이 10명이면, 교인은 적어도 300명 이상이란 뜻인데, 왜 나머지 290명 교인들은 팽개쳐 버리고, 구태여 10명 당회원들의 장(長)이 되기를 원한단 말인고? 한국에 다녀오신 어느 병신도 아닌 평신도가 내게 들려준 말이 가슴에 찔린다. 자기 동창들 가운데 큰 회사의 사장이나 이사를 하는 사람들 사무실과 몇 교회 목사님 사무실, 이른바 당회장실을 다녀온 경험을 비교하면서, 그는 말하기를 "그 굉장한 규모나 사치함, 그 면담 절차의 복잡함으로는 한국 교회의 당회장실을 능가할 곳이 없다!"고 했다. 바꾸어 생각해 보면 그렇게라도 해서 명예와 권력에 대한 대리 충족을 느껴 보려는 목사님들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쫀쫀하고 측은하고 가엾은가?

 

영어로 목자(牧者)를 shepherd라고 하는 것도, sheep herd(양떼를 돌본다는 뜻에서)와 연관되겠거니와, 흔히 한국말로 독일산 큼직한 개를 "쎄빠트"라고 불렀던 기억과 더불어, 목자와 개(dog)는 아무래도 긴밀한 연상을 이루게 한다. German shepherd dog(Deutscher Schaeferhund)이라는 긴 영어를 줄여, 결국은 "쎄빠트"라고 강하고 세게 발음하여 불렀던, 그 몸통이 큼직하고 귀가 날카롭게 하늘로 뻗쳐 있는 개는, 사실 보기만 해도 은근히 겁이 나는 것이 내 어릴 적의 기억 속에 아직도 남이 있다.

 

그러나 내가 "목사는 개다!"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 무섭던 사냥개를 겨냥한 것은 물론 아니다. 만일 평신도들을 양떼로 본다면, 교회는 당연히 목장, 또는 이른바 푸른 초장일 것이요, 목자는 아무래도 예수님 자신이 되셔야겠고, 아무리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한다고 하지만 목사들이 감히 예수님과 동격으로 자신들을 내세우지 않으려면, 어느 목장에나 흔히 있는 목장견(牧場犬, sheep dog) 정도로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목장견(牧場犬)이 할 임무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잘 짖어야 한다. 저 언덕 위에 지팡이를 짚고 들판에 흩어져 있는 양떼를 굽어보고 우뚝 서 있는 목자의 모습은 아무래도 예수님께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간혹 제 갈 길을 가는 양들을 잘 짖어서, "딴 데로 가지 말로, 저기 저 언덕 위에 서 계신 목자를 따르라!"고 하는 것이, 개가 해야 할 첫째 중요한 임무요, 또한 교회의 목사의 설교라는 게 결국은 이 소리에 다름 아니다. 개가 잘 짖어야 하듯이, 목사도 잘 가르쳐야 한다. 목사인 나를 따르라는 것을 설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라!"고 짖는 것, 그것이 설교이다.

 

둘째는, 잘 뛰어야 한다! 목장의 개가 다리 병신이 되어, 흩어져 달아나는 양들이나 또는 야생 동물들의 공격을 받아 위험에 처한 양들을 신속히 쫓아가 돌보지 못하면, 그건 목장의 개가 될 자격이 없다. 사실 평신도들의 삶의 처소에 수시로 달려가는 목사의 심방이 그래서 중요한 게 아닌가? 현란한 입술과 정교한 혀를 지닌 목사라도 발이 느려서 거동이 굼뜨면 평신도들이 목사의 도움을 필요로 호소할 때 결국 가까이 할 수 없는 종교 귀족이 되고 만다. 부지런히 뛰어 다니는 것은 개와 목사가 지닌 공통점이다.

 

셋째, 잘 느껴야 한다! 양떼들이 노니는 목장에는 언제나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뜻밖의 변화가 일어난다. 병들어서 건강을 지탱하지 못하는 양이나 양의 가죽을 쓰고 살며시 스며들어서 이 양, 저 양의 다리를 물고 다니는 늑대를 첫눈에 알아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귀로 들어도 보아서, 이를 발견해 내는 감각이 발달해야 한다. 평신도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눈치코치 없는 둔감한 목사, 세상 돌아가는 것이 도대체 어는 방향으로 가는지 깜깜한 목사는, 그래서 언덕 위의 목자를 향하여 양떼를 몰고가는 것이 아니라, 벼랑 끝을 향하여 인도하는 격이 된다. 목사는 사태의 변화에 대한 판단과 관측에 민감해야 한다. 둔감한 목사는 병든 개다.

 

넷째, 잘 몰아야 한다! 아무리 눈이 밝아서 양의 탈을 쓴 이리와 늑대를 대뜸 알아보았다고 해도, 이를 일격에 물어서 물리침으로써 양떼들을 보호할 날카로운 이빨이 없으면, 그런 개는 툭하면 꼬리를 샅에 끼고, 오히려 늑대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일로 변신하고 만다. 세상을 현혹하고 사람을 착취 억압하는 일에 앞장선 목사가 되는 일은, 늑대를 물어 죽이기엔 이빨이 약하고, 겨우 양떼를 물어 해칠 이빨 정도밖에 없는 목사가 흔히 하는 짓이다. 높은 권력자들 앞에서는 가증스런 아양을 떨고, 노상 ’조찬 기도회’라나 무어라나 열어 주기에 바쁘고, 낮고 천한 사람들 앞에서는 거드름을 개기름으로 흘리는 그런 무리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양떼들을 먹이고 치라고 하신 말씀 하나 믿고, 감히 목사 길에 나선 사람들은, 자신이 뭐 굉장한 출세와 영달에 이른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노라고 자랑하는 투로 나설 것이 아니라, 양떼들의 목자이신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양들의 개가 되는 것도 마다 않고 나선 길이라고 각오하는 겸손이 우선 앞서야 한다.

 

예수 잘 믿었더니, 옛날에는 피죽 한 그릇도 먹기 힘들었던 내가, 지금은 냉장고 4개 가진 목사관에, 교인 몇만 명 가진 교회 당회장이 됐다고 자랑하고 다니다가, 드디어 무슨 교단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노라고 목에 힘을 주는 종님(?)은, 단연코 개가 아니다. 그는 개보다 훨씬 힘센 늑대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어놓겠노라고 자못 순교자적인 소명을 자랑할 수 있기 이전에, 주님을 위해서라면 개가 하는 짓이라도 기쁨으로 나서겠다는 각오, 그게 참된 목사의 길이 아닌가? 모두들 더욱 높아지지 못해서 안달들인데, 세상에는 스스로를 더욱 낮추는 것이 하늘의 뜻을 드러내는 길이라고 친히 가르치신 분을 따라, 나도 낮아지되 주님의 개(shepherd dog) 또는 양들의 개(sheep dog)가 되겠다는 이런 결단은 사실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명문 대학을 나왔다는 젊은이들이 신학교로 몰려들 온다니, 기쁜 현상이기는 하나, 그게 정말 개가 되어 보겠다는 갸륵한 소명감 때문일까?

 

하루의 고단한 일과가 끝나면, 양떼들은 자기들의 우리로 몰려가 저희들끼리 뭉쳐서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며 잠든다. 개는 목자이신 주인이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개야!" 하고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면 그만 감격해서 꼬리를 흔들고 좋아서 야단을 떨지만, 잘 못하면 주인의 꾸중과 발길질을 당하고 마당에서 쫓겨나 어둠 속에 혼자 웅크리고 외롭게 서럽게 잠들어야 한다. 차라리 양이 되어 양 틈에 잠드는 것을 부러워할 일이다. 요사이는 개를 끌어들여서 침대에서 같이 자고, 고급 식품으로 주인과 한 식탁에서 먹고, 온통 사람보다 더 호사스러운 대접을 받는 애완용 개들이 지천으로 늘어난 세상이지만, 목장의 개야 어디 그런 대접을 감히 생각하고 하루 종일 뛰고 짖고 하겠는가? 그저 고작 바라기는, 목자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같은 상에서 부스러기나마 먹게 하고, 밤 깊어 목자가 자는 침상 아래에 잠드신 목자를 곁에 느끼며 더불어 쉴 수만 있다면, 하루의 고단함이 아무런들 어떠랴? 그때 숲속의 늑대는 어둠 속에 이를 갈며 추위에 떨며 끊임없이 방황하게 되리라.

 

목사가 된 사람이 철저히 깨달아야 할 것은, 평신도들과 어울려서 허물없이 지내는 자유스러움에 칭찬 받고 너무 기분 좋아하지 말고, 언젠가는 평신도들은 목사 쏙 빼놓고 자기들끼리 놀아야 할 시간이 있음을 미리 알아서, 개는 어디까지나 개지, 양들과 어울려 쉴 수 없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뜻에서도, 목사가 된다는 것은 목자가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개(dog)가 되어야 할 것을 거꾸로 하느님(God)이 되어 보겠다는 이른바 영력이 넘치신다는 분들을 보게 되는데, 영어의 스펠링이 절묘하게도 이 점을 깨우치고 있다. 목자이신 하느님(God)을 바로 믿지 않고 거꾸로 잘못 믿으면, 그만 개(dog)인 목사를 믿고 마는 한심스러운 병신도가 되고 마는 것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하느님을 dog로 만들고, 자신이 God이 되기를 바라는 놀라운 설교자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되는 사태가 오늘의 사태가 아닌가?

 

이사야 56:10-11에는 듣기에 차마 민망한 표현들이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두고 퍼부은 말씀이어서, 오늘도 나 같은 목사는 어느 총명한 평신도들이 이걸 볼까 봐 겁이 날 정도다.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silent dog)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shepherd)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든지 자기 이(利)만 도모하며...." 그러니까 나는 좋은 뜻으로 목사는 목장의 개 같아야 하며, 너무 오만하게 목자로 자처하기보다는 목장견쯤으로 스스로의 임무를 다짐하는 것이 좋겠다는 정도였거늘, 일찍이 제3 이사야는 이토록 준엄한 경고를 통하여, 부패한 종교 지도자는 짖지 못하는 개라고 일갈해 버린 지 이미 2,500년이 넘었다.

 

밤 새워 "목사 개론"을 펴고, 히히덕거리던 우리들 세 사람은, 밝는 날 새해 1982년 1월 1일 정초를 당하여, 근처에 계신 C 목사님 댁에 세배를 갔다. C 목사님은 당시 뉴욕 지역에서는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인 모 교회의 당회장님이셨다. 마침 동행한 L 목사님과 또 전도사들인 우리 내외를 만나, 평신도들이 듣지 않으니까 마음놓고 격의 없이 하시는 첫 말씀이, "교인들이란 그저 개(dog)야!"였다. 무슨 일이 그 교회에서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가 막힌 우리 셋은 서로 눈을 맞추며 소리 없이 웃었다. 밤새워 지껄인 "목사 개론"이 졸지에 "교인 개론" 앞에 무색해졌기도 했지만, 그 C 목사님이 교인(평신도)들은 곧 개들 같다고 갈파하신 뜻은 결코 우리들이 펴낸 "목사 개론"의 개와 같은 뜻이 전혀 아니었음을 모두가 재빨리 알아차린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성경에는 개(dog, 히브리어로는 켈레브, 헬라어로는 퀴온, 퀴리온)를 좋게 본 곳이 별로 없다. 송장의 살을 뜯어먹거나(왕상 14, 16, 21, 22, 왕하 9, 시 68, 렘 15), 멸시의 대상이거나(삼상 17, 왕하 8), 사악한 것들이거나(사 56, 빌 3, 계 22), 심지어는 성전 남창(男娼)을 가리키는 말(신 23)로 사용되고 있어서, 감히 목사를 이런 종류의 개에 비유한다는 것은, 목사 자신들은 물론 목사를 하늘같이 우러러보려는 평신도들의 정서에도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오죽하면 나 자신도 목사인데, "목사는 개다!" 하고 나서겠는가? 쓸데없는 목사 개론을 펴다 보니, 결국 나 자신만 개가 되고만 기분이 들어서, 글이고 나발이고 다 개판이 되고 말았다는 느낌이다. 혹시 동물 애호가들이 이 글을 읽게 되는 날에는, "이런, 어디 너희들 목사들이 감히 우리들 개에다 비교하는 거야? 개보다 훨씬 못한 놈!"하지 않겠는가?

 

이른바 영성이 뛰어나고, 구령열(救靈熱)에 불타서 나섰다는 어떤 목사님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교회에만 헌신하기에는 너무 능력이 넘쳐서, 아예 미국에 있는 한국계 일간지에까지 5단 광고로 5대양 6대주에 연중 부흥회 일정을 깨알같이 박아 놓고 있다. 그 정도로 몰아치려면, 사실 몸인들 오죽이나 피곤하겠는가? 예수님의 사역은 고작 갈릴리 바다 근처를 한 3년 헤매어 보셨지만, 이토록 부지런한 목사들에 비하면 새 발에 피다. 더러는 듣자 하니, 부흥회입네 하고 헌금 받아 일정 비율로 분할하여 챙기고, 말씀에 홀딱 반하고 은혜를 주체 못할 만큼 넘치게 받으신 여성 평신도께서, 저녁이면 피곤하신 하느님의 종님(?)의 몸을 자근자근 마사지도 해 주고, 아마 다리도 주물러 주겠지. 그리고 또... 사실 이런 정도면 개들이 감히 엄두도 못 낼 것이니, 이런 분들께는 "개보다 뛰어난 분!"이라고 해야 하리라.

 

종교 지도자들에게 대한 하느님의 진노의 음성은 에스겔 34장에도 나온다. "주 야훼가 말한다. 망하리라. 양들을 돌아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구어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 주어야 하며, 상처 입은 것은 싸매 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그들을 다만 못살게 굴었을 뿐이다.... 목자라는 것들은 나의 눈밖에 났다." 아, 이 몸도 이민 교회 목사 노릇 잘하고, 황혼이 지고 나서, 나중에 목자의 손에 머리 쓰다듬키는 개만큼만 인정받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내게 꼬리가 없으니, 온몸이라도 흐드러지게 흔들며 기뻐하고 싶은데....

 

 

글로리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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