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상담신앙상담 게시판은 비공개 게시판으로 닉네임을 사용실 수 있습니다. 답변 글 역시 닉네임으로 표기되며 댓글의 경우는 실명이 표기됩니다.

q Re:그리고..

인쇄

안성철 [221.155.255.*]

2005-07-28 ㅣ No.3593

+ 찬미 예수 +

 

마침 자매님의 사연과 비슷한 질문을 받고 작년에 상담해준 답글 입니다. 시간이 없어 급한대로 성령 홈 페이지 신앙 상담란의 글입니다.  

 

엊그제 교구 상설치유 봉사자님들의 금년 한해를 마감하며 나를 돌아보고 참회와 용서와 화해로 사랑의 결실을 다지며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드리며 더욱 열심히 사랑의 봉사자로 거듭 날것을 마음속 깊히 다짐하며 성탄을 맞기위한 피정으로 장소도 마침 공기 맑고 경개좋은 강화도 조용한 장소에 마련된 "성모 관상 봉쇄 수도원"에서 봉쇄 수녀님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할수 있는 은혜를 누리면서, 주일 저녁에 귀가한후 님을 만나게 되었군요" 만남의 축복을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리면서, 미력 하나마 성령의 안배 하심으로 믿고 님께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여, 아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침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계신 "차동엽'' 신부님의 신흥영성운동'' 피정 교육을 통해 그리고 상담시 간혹 단전호흡, 기운동등 심취되고 있는 일상적인것 같은 것을 통해 미혹되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위험에 노출되는 경향이 있어 피력해 봅니다. 전문적이고 영성적인 문제이므로 봉사자 뿐만 아니라 신부님, 수녀님들도 아직 정보가 보편화 돼 있지 않다고 보아 님이 만나셨던 봉사자를 탓하지 마시고 상처까지 입으셔서야 되겠읍니까? 오히려 그 봉사자님은 누구신지 참으로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알겠네요. 오히려 잘난체 하지않고 인지하고 있어도 설명할수 없는 영역이기에 오히려 진솔하고 단호하게 말씀 하셨기에 이렇게 상담도 되지 않습니까? 그 봉사자님을 축복해 주시고 마음으로 감사 하십시오"   저도 많은 관심을 같고 있는 분야로서 제 자신의 상담 보다는 "차동엽'' 신부님의 실제 사례를 있는 그대로 옮겨 적음으로 님, 뿐 아니라 우리 형제, 자매들의 많은 참고의 도움이 될줄 믿고 답 글로 대신 합니다. 줄이긴 했지만 내용이 깁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차분히 읽고 또 주위에도 권장 하십시요,  좀 더 필요한 부분이 있으시면 "차동엽'' 신부님께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님의 마음에 주님의 등불이 비춰 지기를 기도 합니다"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 1:



방황하는 양떼를 방관하는 목자




다윈주의 시대에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는 밴처 기업은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이다.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은 일찍이 칼.막스가 “자본주의가 갈데까지 가면, 팔아 먹을수 없는것까지 팔아먹는 시대가 올 것” 이라고 예견했던 대로 자본주의 말기에 나타난 무차별 상업주의의 소산이라고 볼수 있다. 21세기 상업주의는 마침내 인간의 종교심을 수요로 삼아 새로운 구원재(救援財)를 개발 . 공급 하면서 무한한 시장을 형성 하는데 성공 하였다. 이른바 신흥영성 시장에는, 별별 상품들이 즐비하다. 평화, 행복,  성공, 건강, (인생)상담, 문화, 웰빙 등등 품목별로 오만가지 제품들이 출시되어 호객 행위를 하고 있다. 문제는 점점 많은 기성 종교의 신앙인들이 종교적인 욕구를 더 이상 자신이 속해 있는 종교에서 충족 시키지 않고, 이들 ‘쉽고’ ‘재미있고’ ‘편리한’ 종교적 대체물(religious alternative) 또는 보이지 않는 종교(invisible religion)들로 대리 충족 시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이 최대 피해자는 가톨릭 교회이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노길명 교수는 가톨릭 언론매체를 통하여 신흥영성운동의 대표적 상품에 속하는 기 수련 참여 실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개진한다.


“이러한 기 수련에 몰입하는 사람들 중에는 개신교보다 가톨릭 신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가톨릭이 체계화된 교리와 전례 중심의 종교이다 보니 영적인 욕구와 종교체험의 욕구를 충족 시키기에는 사실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이를 수련을 통해 보상 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이 사실은 필자도 다양한 사목 현장의 교우들을 만나면서 거의 매일 확인하고 있는 내용이다. 대체로 개신교 신자들은 신앙 정체성이 분명해서 덜 휘둘린다. 또 부흥회, 사경회, 수양회, 철야기도 등 영적 메뉴가 다양해서 그리 한눈 팔 겨를도 없다. 대조적으로 가톨릭 신자들은 영적인 욕구와 신앙 체험의 갈증을 해소할 영적 프로그램의 부족을 원망하며 교회 밖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방황하기 일쑤이다. 그 위험성과 해악에 대해 특별한 경각심이 없는 정도는 약과요, 아예 심하게 매료되어 있는 경우를 자주 본다. 아래에 옮겨보는 근래에 가톨릭 언론매체에 실린 교우들의 인터뷰 내용은 이러한 현실 인식이 필자만의 주관적인 착각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 주고도 남는다.




- 일산에 사는 김 소화 데레사(59), 미국에서 살 당시에 만났던 뉴 에이지 활동가들은 느낌이 굉장히 신선하고 좋았어요‘ 내가 갖지못했던 용기를 가고 있었던 것 같고, 특히 정형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교과서적인 사고 방식을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죠.“


- 서울 대교구 0본당 신자 박 안나(27): “뉴 에이지 어때서요? 뭐가 잘못된 건가요?” 뉴 에이지라는 조지 윈스턴의 ‘겨울’이나 영화 ‘사랑과 영혼’ 등의 작품들은 좋기만 하던데요.“


- 서울 대교구 ㅅ본당 신자 이 프란치스코(47): “잘 사용하면 좋지 않아요? 요가다, 명상법 같은 건강법은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이처럼 가톨릭 신자들은 식별력이 없다. 시쳇말로 “좋은게 좋은 것‘ 이라는 정도의 좋은 마음들만 가지고 산다.


“목자들은 어떠한가? 목자들이라고 사정이 나은 것은 아니다. 필자에게는 신흥영성운동과 관련하여 많은 이들이 상담을 요청해 온다. 미국의교포 신자들에게서도 드믈지 않게 온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일차적으로 ‘본당 신부’에게 문의를 해보고 나서 여전히 답답한 것이 남아서 수소문 끝에 필자에게 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자신을 소개한다.그들은 신부님들이 그 실태에 대하여 너무 모른다고 하소연 한다. 알아도 과소평가하며 천하태평 이라고 불평한다. 또 몰으면서도 전혀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 한다. 요컨대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느 것이다. 양떼들은 방황하고 목자들이 방관 하고 있다는 것이 가톨릭 교회가 처한 평균적이며 비극적인 현실인 것이다.




▶ 피해 사례




몰라서 그렇치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은 심각한 영적 부작용을 초래한다. 필자가 직접 들은 사례의 종류들만 해도 다음과 같다.



- 초월명상 등 뉴에이지 서적에 빠저있던 청년이 악성 정신 질환자가 된 경우(다수)


- 명문대학을 다니는 수재가 대순 진리회에서 기를 받은 후 우울증에 걸려 자살한 경우,


- 전통(무속관련) 민요를 직업으로 부르다가 단 1분도 기도에 집중 할수 없는 상태가 된 경우,


- 수도자가 기와 명상에 빠져 환속 하거나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경우(다수)


- 기수련(대표적으로 ‘단월드’)을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교회를 떠난 경우(다수)


- 기 치료 받다가 우울증에 걸린 경우(다수)


- ‘마음 수련’ 하다가 정신질환자가 되고 이혼까지 한 경우,


이들은 최소한의 실례일뿐이다. 신자들은 목 말라 하고 있다. 신자들은 영적으로 불량 음식을 먹고 병들고 있다. 이는 정확한 현실이다. 결코 필자의 과민 인식이 아니다. 목자라면 다음과 같은 주님의 통탄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혀 먹히며 뿔뿔히 흩어 졌구나.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 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 졌는데 찾아 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에제키엘 34, 5- 6)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 2: ▶용어의문제(생략),  ▶가톨릭교회 내의 다윈적 반응(생략)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 3: 사례에서 배운다




어느 자매님 이야기


신영성운동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을 접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정체와 위험성에 대해서는 그간 가톨릭 언론 매체를 통하여 어느만큼 알려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목현장에서는 아직도 무지, 혼돈, 방관속에서 무대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여 먼저 사목 현장의 실태를 스캐치 해보는것도 속찬 접근법이 될 것 같다.
우리는 사례부터 출발해 보고자 한다.


- 두달쯤 전 어느 자매님으로부터 급한 전화 상담 요청이 왔다. 경황이 없는 중이었지만 한 영혼의 구원이 달린 문제라 만사를 제처놓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임했다. 자매님은 ‘단월드‘에서 단학수련을 하고있는 중이었다. 자매님은 막 ’고급수련‘을 하게되면 건강, 사업, 영성의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을수 있다는 유혹을 ’단월드‘(단학서원) 사범으로부터 받고있는 중이었다. 그만큼 성당에 대한회의와 반감이 고조되고 있던 처지에 있었다.필자는 차근 차근 문제를 짚어주고 다시금 신앙에로 돌아오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독려 하였다. 크게 갈등하던 터였지만 자매님은 놀랍게도 해냈다. 그리고 이 메일을 통해 장문의 편지를 띄워 보냈다. 이 편지에는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의 핵심 문제들이 잘 드러나 있었다. 좀 길어서 한번에 인용하는 것이 불가능 하기에 단락별로 끊어서 소개 하면서 그 시사하는 교훈을 독자들과 함께 나눠 보과 한다.




첫째, 특별한 경계심이 없다.




자매님은 이렇게 시작한다.


찬미 예수님!” 안년하세요, 신부님,


신부님께 고맙고 너무도 감사하여 저의 마음을 글로 올립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6월 14일 월요일 오후에 신부님께서 저에게 친히 전화를 주신 것은 신부님께서 말씀 하셨듯이 저에게 주신주님의 은총이었나 봅니다. 제가 참 오만 하여서 ‘하느님의 뜻’이니 ‘주님의 은총이니’ 하는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참 지혜롭지도 못하고 깨달은바도 없으면서 그런척 하고 산 사람인 듯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겪는 오류는 아마도 다 겪은 듯 합니다. 그리하여 난 헬스도 에어로빅도 할수 없어, 조용히 품위있게 ‘단전호흡’이나 하는 것이 제일 어울려‘란 착각속에 처음엔 정말 운동으로만 생각하고 단학을 시작 했습니다. 그래도 좀은 불안한 마음이 있어 보좌 신부님께 의견을 물었을때 순수한 운동의 목적이라면 해도 무방 하리라는 의견을 드렀습니다. 그리고 난 절대로 다른 사람들처럼 심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구요.“


평소 건강이 문제였던 자매님은 커다란 경각심 없이 단전호흡 수련을 받기로 결심 하였다. 그래도 혹시 잘못된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어서 자매님은 본당의 보좌신부에게 문의를 하였다. 하지만 보좌 신부는 정보의 부족으로 오히려 허락 또는 권장을 해주는 셈이 되고 말았다. 내심 불안 하기는 했던 자매님은 설사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신앙정도면 ‘심취’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일단 등록을 하였다. 이처럼 정보의 부족은 경계심을 풀어놓는 원인이 되고 있다.




둘째, 야금 야금 빠져든다.




“하지만 안개에 옷 젖듯이 젖어든 듯 합니다. 1월부터 5개월 남짓 단학을 하면서 몸은 명현(?)이라는 것으로 너무도 아팠고 마음은 무척 부대끼었습니다. 모든 것을 그냥 그렇거니 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듯 하나, 의문을 가지면 마음은 조여오고 우리 성당의본당 신부님의 강론은 귀찮케만 들리고 성서에 대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적으로 이해되고 더욱 놀라운 것은 제가 젊은 시절에 그토록 어렵게 읽었던 샤르뎅 신부님의 저서(?)들이 너무 쉽게 읽혀지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모든 책들이 마치 명오가 열리듯이 이해되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도울(김용옥)의 강의에 심취가 되기도 하고 ‘아 그래 맞아, 진리일수도 있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마음은 온갖 잠념들로 가득차서 ‘이러다 내가 미치지’ 차라리 가톨릭을 떠나 버릴까“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자매님의 예는 수련을 하다보면 야금 야금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확신이 허물어 지고 혼란에 빠진다는 사실을 잘 들어내 주고 있다. 신흥영성에 빠지면 처음에는 사제들의 강론이 시시하게 들리고, 전례가 죽은 예식처럼 여겨지고, 가톨릭 교회의 주장들이 옹졸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저들의 주장이 대단한 대안이나 비전인 것 처럼 들린다. ‘신본주의’ 대신에 ‘인본주의’ 타율영성 대신에 자율영성, 한 종파 대신에 우주적 통합 종파등을 내세우는 거창한 말들이 너무 매력있게 들리는 것이다. 신(흥)영성은 종교혼합주의적인 접근법을 쓰기 때문에 신자들에게는 거기에 통합, 통일, 완성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이 때문에 기성종교는 답답하고 고리타분하고 편협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부분’의 도용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지적하는 ‘뉴만’ 추기경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은 전체를 받아 들이던지, 아니면 전체를 거부해야 한다. 축소하면 약해지고, 절단하면 불구가 된다. 각 부분이 결합되어 전체를 이루므로, 어느 한 부분을 빼 놓고서 전체를 받아 들인다는 것은 어리석은일이다.”(뉴만 추기경,<발전에 관하여>, 레지오 교본 196쪽에서 재인용)


신흥영성운동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씩 가져다가 버무려서 ‘퓨전’ 영성을 만들어 놓는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현대적이고 매혹적일수 있다. 뭔가 갈증을 풀어줄것처럼 보인다. 상대적으로 기성종교의 구태의연한 모습은 실망을 줄 뿐이다. 식상하고 맛깔스럽지 못하게 여겨진다. 슬슬 불만이 하나, 둘 늘기 시작 하다가 마침내 ‘작별’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매력적이던 것이 결국 ‘독버섯’ 영성이었다느 것을 알아 챘을때는 더 이상 빠져 나올수 없는 수렁속에 허우적 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기 십상이다.




셋째, 하느님을 부정 하기에 이른다.




자매님은 말한다.


“하여 그들이(단학) 그토록 집요하게 요구 해 와씨만 계속 거부해 왔던 ‘심성수련’이란 것을 다녀 오겠노라고 대답을 하고 예비 수련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그리고 단학의 사상인 ‘삶의 의미’라는 이승현의 비디오를 예를 갖추고 보라 하기에 수련 시간이니까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도 그럴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워낭이 저에게 속삭였습니다. ‘도우님, 21세기와 앞으로의 세기는 ’사람이 신의 지배를 받는 시대가 아니라 사람이 신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라고.”  우리는 지금 결정적인 대목에 이르러 있다. 여기에는 단월드(단학선원)의 본색이 얼추 드러나 있다.


우선, 이승현의 비디오를 ‘예를 갖추고’ 보도록 지도 받았다는 이야기에서 심상치 않은 우상화(偶像化)의 일면을 인지하게 된다. 본인 자신도 아닌 비디오 제작물을 예(禮)를 가추고 보게 한다는 것은 이미 그가 신격화(神格化) 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해 준다. 이는 극히 일면일 따름이다. 이승현은 이미 그들에게 교주를 넘어 신적 경지로서 추앙 받고 있다.


다음으로 ‘원장’이라는 사람이 자매님에게 무슨 말을 하였던가. “도우님, 21세기와 앞으로의 세기는 ‘사람이 신의 지배를 받는 시대가 아니라 사람이 신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올바로 정신이 박힌 가톨릭 신자라면 이 말을 과연 그 원장이라는 사람이 했겠는가 하고 의문을 던져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원장은 이 말을 했다. 그가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사용하는 말에 용신(用神)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자신의 필요에 맞게 우주에 내장된 신적인 능력을 마음껏 끌어다 쓴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을 그는 대담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과 인간,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기본 질서를 파괴 하려는 발칙한 유혹이다. 따 먹기만 하면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태초에 이브를 유혹한 ’뱀‘의 음흉한 간계가 이 말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 채기에는 대부분 가톨릭 시나들의 식별이 턱없이 미흐 하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마치 무슨 최면을 거는 듯이 말입니다. 너무도 이상한 것은 그당시 아무런 저항하는 마음도 들지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저 빨려 들어가듯 그랬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거기에 대한 저항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주일 미사를 마치고 오후에 남편과 함께 ‘트로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물론 신화를 각색한 영화이지만 신이 지배하던 그 시대에 신의 아들로 태어 났다는 주이공 ‘아킬레스’가 마치 ‘신’은 없다(?)라고 절규 하듯이 사는 모습에서 일전에 단학 원장이 저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던 말이 머리가 쭈뼛하며 떠 올랐습니다.


마치 머리는 터질 것 같고 가슴은 답답하고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마음을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무섭고 두렵고 미칠 것 가타는 말 바로 자체였습니다. 이런 말로 저의 상태가 다 표현 되지 못합니다. 그 이상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자, 정신을 차려야지’ 하며 스스로를 아정 시키기 위해 모무림을 쳤습니다.“


그나마 자매님이 신앙의 기본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이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의 책자들은 인간안에 있는 무한한 영적 자매성 나아가 신성을 강조 하면서 그것을 키워 나가야하나고 부추긴다. 그러면서 슬금 슬금 창조신과 인격신을 부정한다. 마침내 신의 노예가 되지말고 스스로 신적인 존재가 되어서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을 마음껏 부리라고 감언이설로 유혹해 댄다. 어설픈 주장 가티만 “자기 인생의 창조자가 되라.” 강한 자가 되라.“라는 그럴듯한 미끼를 내 걸고 교묘하게 접근 하기엔 웬만한 사람은 어느새 넘어가고 만다. 하지만 자매님은 주님의 은총에 힘 입어 버틸수 있었다.




넷째, 집요하게 붙든다.




자매님은 도움이 필요했다. 지혜로운 결단을 내리기에는 이미 혼돈 속에서 씨름 한다는 것이 너무도 벅찬 일이었다. 자매님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래서 제가 세 번째 ‘미래사목연구소’로 전화를 했습니다. 신부님과 꼭 통화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저는 그때 그와같이 절박 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저에게 전화를 주신 것은 저에게는 신부님 말씀처럼 은총이었고 빛이었습니다. 신부님과 전화를 하고 즉시 단학에 전화로 ‘나 단학 그만 하겠노라’ 날 설득 하려 하지도 말고 ‘왜’ 라고 묻지도 말고 그냥 이름을 지워주고 회비는 환불해 달라.‘ 정말 무 자르듯 단호하게 그리 했습니다.(다음날 원장과 단판을 짓는 과정에서의 기 싸움에서는 제가 이겼습니다. 집요하게 수 시간을 설득하던 원장이 먼저 지칠만큼 제가 단호할수 있었음은 신부님께서 절 위해 기도해 주실 것 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집요하다. ‘수시간의 설득이 그것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말이 그렇지 수시간의 입씨름은 결코 만만한 대화가 아니었을 것이다. 원장은 자신이 교육받은 대로 자매님 신앙의 빈 구석을 찾으며 여기 저기 허점을 찔러 댔을 것이다. 하지만 자매님은 필자의 코치에 충실했다. “분명히 호락 호락 응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든 말려들지 말고 ’무 자르듯이 단호하게 잘라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다섯번째,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한다. 




자매님은 단호하게 유혹을 무리쳤다. 그 때의 해방감은 무어라 표현할수 없었다. 이 대목에서 자매님은 자신이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채, 신흥영성운동의 정체와 관련된 단서를 드러내 주는 언급을 하고 있다.



“전화를 끊고 너무도 답답하여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무는 순간 그게 무엇이니모르지만 머리에서 무언가 시원하게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느낌을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머리가 가벼워 지는지 난 돌아온 탕자의 모습이었고 우리를 벗어나려 했던 한 마리의 양이었습니다.



이상하리만큼 미사참례를 하는동안 머리가 어지럽고 띵 하던것도 씻은 듯 사라졌습니다. 신부님, 이 모든 것을 정확한 어떤 언어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매님은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무언가 시원하게 쭉 빠져나가는 느낌’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조금의 과장이 없는 사실이다. 주관적인 착각 현상이 아니다. 신흥영성운동을 책만 읽고서 식별 하려는이들은 이 현상이 어떤 현상인지 모른다.
 신흥영성운동의 가장 큰 피해는 이론이다. 개념에 있지않다.
문제의 핵심은 어느 틈엔가 자신을 사로잡는 알수 없는 힘, 자신도 모르게 덮 씌워진 에너지에 있다.
기 수련 또는 기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자연적인 에너지, 소위 자연지기에(自然之氣)에 섞여(또는 묻어서) 다니는 정체불명의 영기(靈氣)가 있다는 사실을 책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알 리가 없다.
이를 굳이 악령이라고 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 이는 수련자들의 몸에 배어있는 잡기(雜氣)들이다. 한의학적이 용어를 비라면, 기 수련을 하려는 이들은 대부분 건강이 좋지않은 환자들이기에 이들에게서 발산되는 에너지가 병기(病氣)요, 사기(邪氣)일 것은 당연하다. 이것들이 좁은 공간에서 함께 뒤 섞인다.
수련자 가운데 정신 질환자가 있을 경우 그에게서 정신을 혼미케 하는 탁기(濁氣)가 발산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잘 이해가 안가는 사람이 있거든 우리들이 흔히 체험하는 분위기라는 것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상하게 어느곳에 가면 ‘썰렁하고’ 어느곳에 가면 ‘살벌’한 느낌이 들고, 어느곳엘 가면 ‘아늑’하게 느껴진다. 술집엘 가면 술 생각을 넘어 ‘음란’한 마음까지 동한다. 독서실엘 가면 ‘책’이 술술 읽히고, 성당엘 가면 갑자기 ‘경건’해 지면서 기도가 잘 된다. 이는 단순히 생각 때문이 아니다. 그 공간을 지배하는 에너지 때문이다.




 



264 0댓글쓰기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