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성당 게시판

[질문과 답] 성상인가, 우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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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austin] 쪽지 캡슐

2000-11-29 ㅣ No.4520

 

멜로 제게 질문한 문제와 그에 대한 저의 부족한 답변입니다만, 많은 분들이 한 번 쯤 가져봄직한 질문이라 생각되어 질문하신 분의 동의를 얻어 게시판에 올립니다.

 

질문 하나 : 十誡命에 關한 것입니다.

출에굽기(20,4-6)과 신명기(5,8-10)에 보면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模樣)을 본따 새긴 우상(偶像)을 섬기지 못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聖母님 像을 偶像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聖書에는 어떤 것이든지 그 模樣을 본따 섬기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 天主敎에서는 聖母님 像을 모시고, 事實上 恭敬하고 있습니다.

分明 敎會에서는 이 點에 對한 分明하고도 明白한 理由가 있을 것으로 압니다만, 아직 아무도 이 點에 對한 가르침은 주지 않았습니다.

 

▶ 답변 :

우선 우상(偶像)과 성상(聖像)에 대한 구별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상(偶像)은 신앙(信仰)의 대상이지만 성상(聖像)은 신앙(信仰)의 표현이며 공경(恭敬)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像)을 만들어 그것을 하느님으로 섬긴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偶像)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오래도록 산에서 내려오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라고 졸라서 아론이 금으로 수송아지 신상을 만들고 백성들이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에집트에서 데려 내 온 우리의 신이다"(출애급기 32,4)라고 외쳤을 때, 이 금송아지는 우상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명하신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模樣)을 본따 새긴 우상(偶像)을 섬기지 못한다."(출애급기 20,4; 신명기 5,8)는 말씀은 우상(偶像)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지 일체의 상(像)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만약에 일체의 상(像)을 만드는 것을 금(禁)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여정에서 "어쩌자고 우리를 에집트에서 데려 내 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죽일 작정입니까?…"라고 불평을 하였다가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게 물려 죽게되자 백성들이 뉘우치며 모세에게 중재의 기도를 청했을 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민수기 21,8)고 명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 구리뱀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다음에도 계속 성전 안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에 그 구리뱀이 신앙(信仰)의 대상이 되어 그 구리뱀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게 되자,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 왕은 "모세가 만들었던 구리뱀을 산산조각" 내었습니다(열왕기하 18,4).

또한 모든 만들어진 상(像)이 우상(偶像)이라면 예수님께서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요한 3,14)고 우상(偶像)에 빗대어 자신의 삶을 말씀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상(聖像)을 만들어 공경하는 것은 그 성상(聖像)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다 잘 공경(恭敬)하기 위함이지 결코 그 성상(聖像)을 하느님으로서 공경(恭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나약한 인간이며 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눈으로 볼 때 더 잘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고상(十字苦像)을 만들고 성인들의 상(像)을 만드는 것은 그 상들을 통해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며 돌아가신 예수님의 수난공로(受難功勞)를 기억하고 또 예수님의 생애를 닮아 사셨던 성인들의 삶을 기억하며 그분들의 삶을 본받기 위한 수단이지 그 성상(聖像)들을 하느님으로서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상(聖像)들이 우상(偶像)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성상들을 하느님과 동일시(同一視)하며 공경(恭敬)한다면 우리는 그 성상(聖像)들을 우상(偶像)으로 만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질문 둘 : 聖母님을 때때로 "하느님의 어머님"이라고 하는 點입니다.

三位一體를 저는 聖父, 聖子 聖靈님 各其 存在하시나, 그 本質이 같다는 것으로 理解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理解하고 있는 理由는 創世記(1,26)에서 하느님께서 "우리 模襲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라고 하시어, 天地創造 때 創造主이신 하느님 外에 聖子님과 聖靈님이 계셨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또한 요한복음서(1,1)에 "한 처음 天地가 創造되기 前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고 하여, 말씀 곧 聖子님은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시지 하느님은 아니라는 뜻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創世記(28,13)에서 보면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라고 하시어 "하느님"은 곧 야훼이신 聖父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편 루가복음서(1,43)에서 보면 엘리사벳은 自己를 찾아온 聖母님을 보고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主님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主님"은 聖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聖母님을 가르켜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하시면, 하느님 卽 예수 그리스도라고 理解되고 있습니다. 이 點에 對한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 답변 :

우선 삼위일체(三位一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한 분만 계심을 믿는 것이며, 아울러 영원으로부터 동일한 신성(神性)을 소유하시면서 구별되는 세 위격(位格)이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하느님 혹은 유일한 신성이 계시다고 하는 말은 신적존재(神的 存在)가 다수(多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부(聖父)만이 하느님이시고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시지 하느님은 아니며 그저 주(主)님일 뿐이라는 생각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聖父, 聖子 聖靈께서는 비록 위격적(位格的)으로는 나뉘어 계시지만 모두 동일하신 하느님, 한 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성서에서 "주님"이라는 말은 곧 "하느님"을 지칭하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오직 하느님(ELOHIM 혹은 EL)만을 "주님"이라고 불렀고, 특히 성서를 읽을 때에는 야훼(YHWH)라는 하느님의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릴 수가 없으므로 "주님"(Adonai)이라고 바꾸어 읽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안에서 주님과 하느님을 구별하는 것은 성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성모(聖母)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게 된 배경에는 바로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초기 교부시대(敎父時代)에 교회의 우선적 필요는 가현설 이단(假現設 異端)과 그노시스파 이단(異端), 즉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인간이었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그분이 마리아에게서 인간으로서 출생하였다는 것을 부인하던 이단에 대항해서 주님의 인간성(人間性)이 실질적(實質的)이었다고 옹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4세기에 아리우스 이단(異端)이 그리스도의 신성(神聖)의 진실성을 부인하며 양자설(養子設)을 주장하였을 때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양아들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라고 하며 참으로 하느님이심을 부인하였을 때에 교회의 응답은 성모(聖母) 마리아의 역할을 좀더 분명히 이해하는 길을 열어 놓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에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 하느님을 낳은 자 혹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kos)라고 불리우기를 바랐던 네스토리우스 이단은,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전통적인 교리를 부인하는 것으로서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님이 영원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아리우스 이단의 주장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기원후 431년에 있었던 에페소 공의회는 성모님에 대하여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채택하게 됩니다.

이 교리는 451년에 열렸던 칼체돈 공의회와 553년의 제2차 콘스탄티노풀 공의회에서 좀더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특히 전례를 통하여 점점 더 전파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어머니' 교리는 강생(降生)의 신비를 향한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의 일부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는 말씀의 위격(位格) 안에서 신성(神性)과 인간성(人間性)이 결합하여 있다는 신비에 기반을 둔 교리입니다.

한 사람을 수태(受胎)하여 낳은 여인이 바로 그 사람의 어머니인 것처럼 성모(聖母)님도 진정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께 직접 창조되었다 해서 우리의 어머니를 '육체의 어머니'라고만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성모(聖母)님께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낳지 않았다고 해서 성모(聖母)님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의 어머니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하느님이심)은 성부(聖父)께로부터 영원히 낳음을 받으신 것이지만, 강생(降生)을 통해서 마리아는 성자(聖子)를 수태하고 낳았음으로 성모(聖母)님은 진정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질문 셋 : 平生童貞이신 "聖母 마리아"입니다.

저는 聖母 마리아님은 하느님으로부터 選擇을 받으셨고,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의 肉身의 어머니이시며, 예수께서 "聖子"이심을 가장 먼저 아셨고, 요한복음(2장)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順從하셨고, 그 生活이 우리 信仰人의 模範이 되기에 尊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태오복음서(13,55)에서 보면 "저 사람은 그 木手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兄弟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마태오 복음서(12,46-50), 마르코 복음서(3,31-35), 루가 복음서(8,19-21)와 사도행전(1,14)에서는 예수님의 兄弟가 있음을 證言하고 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1,19)에는 "그 때 主님의 同生 야고보 外에 다른 使徒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平生 童貞이신 聖母님"이라는 點은 저로서는 잘 理解되지 못하는 點입니다.

 

▶ 답변 :

우선 성모(聖母) 마리아의 동정성(童貞性)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모(聖母)님의 동정성(童貞性)은 하느님께 대한 오롯함입니다.

기적적인 동정녀(童貞女)의 수태(受胎)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성모(聖母)님으로 하여금 동정녀이며 동시에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성모(聖母)님의 동정성(童貞性)을 믿는다는 것은 성모(聖母)님께서 하느님의 은총을 언제나 보존하였다고 믿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성모(聖母)님의 기적적인 영원한 동정성(童貞性)은 하느님의 구원(救援) 계획을 이 측면에서 사색하게 하는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성모(聖母)님의 영원한 동정성(童貞性)은 단순한 생물학적 사실이나 문제, 표지나 의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救援)계획의 한 중대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보지 못할 때 성모(聖母)님의 동정성(童貞性)의 의미도 찾지 못할 것이며 또한 이 교리를 순수한 영신적 상징이나 신화로 해석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대한 역사적 차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모(聖母)님께서 당신 전생애를 통해서 동정녀로 계셨다는 진리는 또한 교회가 아주 처음부터 가르쳐온 신앙의 교리입니다.

성모(聖母)님의 영원한 동정성(童貞性)은 전통의 비춤을 받지 않고 신약성서로써만 분명히 입증될 수 있는 그런 계시(啓示)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교리에 관해서 성서에 함축적으로만 들어있던 것이 점차로 교회의 신앙의식(信仰意識)을 통해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4세기에 '평생(平生) 동정(童貞)이신 분'이란 말이 성모(聖母)님의 대중적 명칭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한결같이 믿은 것은 성모(聖母)님께서 매우 열렬한 동정녀(童貞女)의 사랑을 가지고 하느님에게 충실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에 대한 초기 교부들의 증언이 많이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聖)클레멘스, 니사의 성(聖)그레고리오, 성(聖)이레네오 같은 분들이 이것을 믿었으며, 4세기경에는 성(聖)암브로시오의 저서에서 성모(聖母)님의 영원한 동정성(童貞性)을 지지하는 증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성(聖)예로니모는 성모(聖母)님의 영원한 동정성을 반대하는 델비우스의 논증을 맹렬히 통박하였습니다.

세가지 점을 포함한 문항, 즉 성모(聖母)님은 '예수님을 낳으시기 전에도, 도중에도, 후에도 동정녀시었다는 것'이 성(聖)아우구스띠노, 성(聖)베드로 크리소스로고 또 성(聖)레오 교황께서 사용하시던 표준 문항이었습니다.

성모(聖母)님의 영원한 동정성(童貞性)에 대한 믿음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의 시대에는 분명히 표현되고, 16세기 개신교 종교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믿었습니다.

1555년 뜨렌또 공의회 기간 중에 선언문으로 채택된 것은 아니었으나 교황 바오로 4세는 마리아의 동정성(童貞性)에 관한 전통적인 신앙, "아기를 낳으시기 전에도, 낳으시던 동안에도, 낳으신 후에도" 동정이란 교회의 교리를 재확인하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모(聖母)님을 "영원한 동정녀(童貞女)"<교회헌장 52>라고 부르고, "구속사업에 있어서의 성모(聖母)와 성자(聖子)의 이 결합은 동정녀로서 그리스도를 잉태하실 때부터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까지 나타난다" 그리고 "이 결합은 어머니의 완전한 동정성을 감소시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성화시킨 우리 주님의 성탄 때에도 나타났다"<교회헌장 57>라고 가르칩니다.

 

성서에 예수님의 형제(兄弟)에 관한 표현은 히브리적인 어법입니다. 히브리어에는 우리와 같이 사촌형제와 친형제를 구별하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에 나타난 형제(兄弟)라는 말만으로는 우리가 이해하듯 친형제인지 사촌형제인지를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써 성서를 이해하려면 오해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당시의 표현법에 따르면 친형제를 의미할 때 "~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을 더 즐겨 사용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친형제들을 언급하고자 했다면,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마태 12,47; 마르코 3,32; 루가 8,20) 대신에 "선생님의 어머님과 그분의 아들들"이라고 했을 것이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여러 여자들과 예수의 형제들"(사도 1,14) 대신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여러 여자들과 마리아의 아들들"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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