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2동성당 자유게시판

아씨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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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아 [verona14] 쪽지 캡슐

2000-04-24 ㅣ No.353

예전에 구의동 성당에 올렸던 글입니다.

이곳 상계2동 성당이 아씨시의 성프란치스꼬의 성당이죠.

음, 인연이 많은 성당인가 봅니다.

 

 

 

예수 다음으로 그리스도교에서 유명한 인물 프란치스코 성인(1182~1226)이 태어나서 활동하고 죽은 곳은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의 농촌마을 아씨시이다. 인구 2만5000명의 이 작은 지역은 800여년 전 이곳에서 살다 간 한 위대한 종교인으로 인해 전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아씨시까지는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기차로 약 3시간이 걸렸다. 한적한 시골역에 내리니 역 뒤편 너머 산 아래에 웅장한 아씨시 대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아씨시 마을은 넓은 들판 한쪽의 산 기슭에 중세시대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종파와 교파의 벽을 넘어서 존경받는 것은 그가 종교의 공동 목표이자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청빈」과 「형제애」를 온몸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꼬는 『자루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는 신약성서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을 평생의 생활 신조로 삼았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소유하지 말고 돈을 받지 말며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했다. 그의 사랑은 나병 환자 등 당시 차별받던 사람들은 물론 동물과 무생물에까지 미쳤다. 그는 새들에게 설교했고 길가의 벌레가 발에 밟힐까 옮겨 놓았으며 나무를 벨 때는 다시 싹이 틀 수 있도록 통째로 자르지 않았다. 이같은 철저한 실천의 삶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이다.

 

아씨시 순례는 마을로 향하기 전 역 앞에 있는 「천사들의 성모 성당」에서 시작됐다. 이곳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가장 사랑했던 곳이다. 여기에는 원래 들판에 「뽀르지운꼴라」라는 작은 기도소만 있었다. 프란치스꼬는 27살때 베네딕도회 소유였던 이 기도소를 넘겨받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수도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오랜 수도생활과 전도활동으로 지친 그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로마 교황청은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난 후 순례자들이 계속 몰려들자 17세기 후반 뽀르지운꼴라를 덮는 성당을 세웠다. 성당은 너무 크다 싶을 정도였다. 성당 안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니 입구에는 지난 86년 아씨시에서 로마 교황청 주최로 열렸던 「세계종교지도자회의」 때 찍은 사진의 동판이 붙어 있었다. 지난해 10월 로마에서 또 한차례 세계종교지도자회의가 열렸을 때도 참가자들이 아씨시를 함께 둘러볼 정도로 이곳은 모든 종교인들이 와 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택시를 타고 아씨시 마을로 향했다. 먼저 도착한 곳은 성곽 입구에 위치한 「성다미안 성당」이다. 25세 무렵 프란치스코는 이곳에서 기도를 하던 중 십자가로부터 『프란치스코야, 가서 쓰러져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라』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할 일을 발견하게 된다. 그전까지 그는 놀기 좋아하는 평범한 부자집 아들이었다.

 

프란치스코는 포목상이었던 아버지와 프랑스 출신으로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들이 상인으로 성공하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그가 열다섯살이 되자 학교를 그만두고 자신의 일을 돕게 했다. 프란치스꼬 역시 활달한 성격으로 동네 젊은이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

 

프란치스코의 인생에 큰 변화는 우연한 여행 도중에 찾아왔다. 그는 환시를 통해 『프란치스꼬야, 어찌 주인을 버리고 종을 따라가고 있느냐? 내가 너에게 할 일을 가르쳐 주겠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아씨시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근처 산의 동굴과 성다미안 성당에서 지난날을 반성하며 기도했다. 그날 이후 프란치스코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 집안 물건들을 내다 가난한 사람과 교회에 나눠주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자 마침내 아들을 주교관으로 끌고 갔다. 이 자리에서 프란치스꼬는 입었던 옷까지 벗어주고『이제부터는 하느님 만을 아버지라고 부르겠다』며 산으로 들어갔다.

 

훗날 프란치스코는 죽기 바로 전해 겨울을 성다미안 성당에서 보내면서 「피조물의 노래」라는 시를 지었다. 중세 이탈리아어로 지어진 이 시는 자연 속의 모든 피조물을 통해 하느님을 찬미한 것으로 이탈리아 문학의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성다미안 성당은 또 프란치스코를 따르던 귀족 출신 처녀 글라라가 40년간 살며 수녀원을 운영하던 곳으로 그녀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오늘날 글라라관상수녀회는 프란치스코회의 자매 수도단체로 전세계에서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활동하고 있다.

 

아씨시 마을은 97년 10월 이 지역을 강타했던 지진의 흔적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프란치스코의 생가와 주교관, 글라라 성당 등 프란치스코와 관련된 주요 시설들이 모두 복구 공사 중이라서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프란치스코 성인이 묻혀 있는 아씨시 대성당은 복구에 전력을 기울여 최근 재축성식을 갖고 문을 열었다. 성당 2층은 지난 지진 때 가장 피해가 컸던 곳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생을 28장의 프레스코화에 담은 유명한 조토 (1266~1337)의 벽화는 산산조각이 났다가 간신히 다시 복원됐지만 상당부분이 시멘트로 떼워져 있어 안타까왔다.

 

이어 1층 성당으로 내려갔더니 오른쪽에 13세기 이탈리아 최고 화가 치마부에(1251~1302)가 그린 프란치스코 성인의 초상화가 있었다. 이 그림은 프란치스코를 신비화하지 않으면서 그 영성을 잘 표현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무덤은 대성당 지하에 있다. 뽀르지운꼴라에서 죽은 후 성 지오르지오 성당에 묻혔던 그의 유해는 1230년 아씨시 대성당이 완성되자 이곳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무덤은 한차례 봉쇄됐다 다시 열리는 소동을 겪었다. 인접한 강력한 도시인 페루자가 계속 성인의 유해를 요구하자 아씨시 당국이 1476년 무덤을 완전히 막아버렸던 것이다. 350년이 흐른 1818년 교황 비오 7세의 명으로 1층 중앙 제대 아래쪽을 파기 시작했고 52일 만에 프란치스꼬 성인의 관을 발견했다. 그의 주위에는 초기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4명이 함께 묻혀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들른 주차장에는 순례단을 실은 버스가 부지런히 드나들고 있었다.

 

 

어느새 아씨시는 석양에 물들고 있었다.  (-끝-)

 

 

ps. 조선일보 2000년 1월 13일자 종교기행 코너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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