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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7주 강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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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혁 [bezart] 쪽지 캡슐

2001-02-18 ㅣ No.716

연중 제 7 주일 (01/2/18)

(1사무 26,2.7-9.12-13.22-23; 1고린 15,45-49; 루가 6,27-38)

 

요즘 우리 안에 유행하고 있는 대중 매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 사이의 이해관계에 대해 옛 구약의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것 같습니다. 신명기 19장 21절의 내용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아라."

이 말씀은 당한대로, 그대로 갚아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드라마에서는 버림받은 여인이 자신을 버린 남자에게 복수를 계획하고 실현시키는 것을 재미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을 보는 시청자들은 주인공이 어서 복수를 이루길 학수고대합니다. 가요 역시 "날 버리면 없애버릴거야"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그런데 ’눈은 눈, 이는 이’라고 하는 구약 시대의 율법은 신약을 통하여 예수님에 의해 이렇게 바뀌게 됩니다.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마태 5,38-40)."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당신의 권위로 과거의 율법을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복음과도 연관됩니다. 오늘 복음 역시 같은 내용을 다루면서 전체적으로 ’용서’에 대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참으로 어려운 가르침이지요.

 

제가 화곡동에서 교사 피정을 지도할 때의 일입니다. 그때 무슨 주제로 피정을 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그동안 읽고 있던 책의 내용인 용서를 주제로 잡았습니다. 강의 준비도 하고, 묵상 준비도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프로그램을 짰는데, 막상 피정이 시작되고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자 많은 분들이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럴까 의아해 했었지만 금방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묵상 후 나눔 시간이었는데 한 어머니 교사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처음 오늘 피정 주제가 ’용서’라는 것을 알았을 때 왜 하필이면 용서일까 생각했어요. 그러지 않아도 피하고 싶은 주제였거든요."

그 선생님은 마음 속에 품어둔 미움의 감정을 드러내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어머니 선생님은 계속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묵상 시간이 되자 하느님의 뜻인 걸 알았어요. 제가 마주 하고 싶지 않았던 주제였지만 이것을 통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시려는 것이죠. 전 묵상하면서 제가 얼마나 마음이 굳어있는지 알게 되었어요. 전 마음 안에 증오의 감정을 가득 품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선생님은 이어서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미워하고 있었던 사람을 차츰 용서할 수 있도록 기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문화 안에 왜 이토록 증오의 감정이 만연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복수로 물들여진 중국 무협물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한(恨)이 많은 민족이라 그런 것일까요? 그건 아마도 최근 우리나라의 역사와 관련이 깊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근대사를 살펴보면 조선 말기 동학 운동이 시작될 무렵부터 시작해서 정의가 제대로 빛을 본 경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일제 시대의 친일파들이 해방 이후에도 계속 권력을 잡고 있었고, 6?25를 통하여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통해 한을 품고 살아야 했습니다. 또 군부 독재 동안에는 억울한 사정을 가진 사람이 속출했고, 광주 민주화 항쟁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속절없이 저 세상으로 가야 했습니다. 요즘에는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버림받은 사람이 자꾸만 늘어, 이 추운 겨울에도 거리에는 노숙자가 늘어가기만 합니다.

결국 우리는 그저 어쩔 수 없이 아픔을 감내하고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해보지 못한 복수를 대중 매체를 통해 대리 만족하려는 것 같습니다. 인간적으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이런 고통에 묶여 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치유책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되로 받은 걸 말로 퍼주고 싶지만, 그 치졸한 인간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만, 언제까지나 이 굴레에 갇혀 나 자신을 피폐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나를 위해 우린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이것이 매우 어렵다는 걸 잘 압니다. 저 자신도 용서란 말에 낯이 뜨거운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내가 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통해 용서를 대신 해주십니다. 우린 그냥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동의만 하면 됩니다.

용서는 나 자신과 화해하는 일입니다.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상처입은 나를 위로하는 일입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울고 있는 나 자신의 손을 따뜻이 감싸안는 것입니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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