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계동성당 게시판

02. 성 프란치스코(Francesco)의 영성 배경

인쇄

김건호 [kgh0727] 쪽지 캡슐

2007-01-29 ㅣ No.7323

[영성주제] : 聖 프란치스코(Francesco d'Assisi )의 영성(目次)


I. 성 프란치스코(Francesco d'Assisi) 영성의 개요 및 생애


2. 프란치스꼬 성인이 받은 영향(영성 배경)
2.1 일반적 영향
2.2 중세 교회 안에서의 악습에 대한 거부


3. 성 프란치스꼬의 영성
4. 프란치스꼬 영성의 근본정신
5. 프란치스꼬 성인이 끼친 영향
6. 결론
 
 
2.

聖 프란시스코(Francesco d'Assisi) 영성의 배경 - 프란치스꼬 성인이 받은 영향


2.1 일반적 영향


앞에서도 조금 언급했듯이 프란치스코에게 영향을 준 영성이나 성인들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인은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써 당시의 사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받았을 것으로 보여지는 교육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면, 프란치스꼬는 자기 집에서 멀지 않은 아씨시의 성 제오르지오 성당 교회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그가 이 학교를 얼마나 다녔는지 혹은 그의 교사들이 얼마나 유능했는지 혹은 이 기간 동안 그가 얼마나 배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전 생애와 글에서 비추어 볼 때 그가 자신을 일컬었던 것처럼 그렇게 무식한 사람이거나 문맹자는 아니었다.


그의 글들을 보면 프란치스꼬가 성서를 폭넓게 알고 있었고 다른 책들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는 성서 구절들을 200회 이상 인용하거나 적어도 암시한다. 그는 마태오, 루가, 요한복음을 인용하였다. 더욱이 프란치스꼬는 성베네딕도의 회칙이나 다른 자료도 사용하고 있다.[참조 : 프란치스꼬회한국관구, 같은 책, 24쪽]


이 외에도 그가 받은 교육은 그 당시 아씨시와 같은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서정시인들이나 음유시인들과 접촉함으로써 보충되었다. 음유시인들은 당시의 인기있는 재담꾼들이었으며, 일반 시민들이 굶주렸던 문화의 한 형태를 전수해 주었다. 또한 프란치스꼬는 상인으로 훈련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포목상으로서 의류 제품을 거래했는데 자신의 상술은 물론 사업에 대한 애착심을 아들에게 불어넣어 주려 하였다.
이처럼 프란치스꼬는 적어도 당시의 젊은이들과 같은 충분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일단 그가 회개하고 아씨시와 이웃 지방의 젊은이들이 그의 생활양식을 따르기 시작한 후부터, 그는 오직 자신의 완덕을 성취하고 그를 따르는 이들을 완덕으로 이끄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참조 :  프란치스꼬회한국관구, “아씨시 성프란치스꼬와 성녀 글라라의 글”, 분도출판사, 1985, 22-23쪽]


2.2 중세 교회 안에서의 악습에 대한 거부


그리스도를 철저히 따르고자 했던 프란치스코의 이상은 어쩌면 성 베르나르도 이후부터 시작해서 그 당시 전 중세 영성의 특징이라 할 수 있었던 “그리스도 중심주의” Lazaro Iriarte.“작은 형제회의 역사”[참조 : 작은 형제회 한국 관구 수련소 편저. 128쪽] 의 영성적 영향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보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프란치스코가 받은 영향을 알아보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 ‘조던 오만’의 “가톨릭 전통과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언급되고 있는 부분을 발췌하여 이해해 보도록 하자.


성 프란치스꼬의 첫 전기 작가인 첼라노의 토마스는 성 도미니꼬가 성 프란치스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프란치스꼬 형제여, 나는 당신의 수도회가 우리 수도회와 하나가 되어 교회 안에서 단 하나의 생활방식을 지니기를 바랍니다.” 이런 말을 한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사실 두 탁발 수도회는 그 기원에 있어서, 특히 복음적 청빈의 실천 및 설교 사도직을 준수함에 있어서 유사한 점이 매우 많았다.


이러한 유사성의 유력한 이유로는 도미니꼬와 프란치스꼬는 동시대인으로서 둘 다 교회 안의 악습을 바로잡고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그들의 선교와 청빈을 통하여 복음서의 표준으로 복귀시키려고 노력했던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교회에서 복음은 대개 어디서나 무시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주로 사제 및 수도자의 재물과 교회 고위 성직자의 세속 권력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악습과 그로 인한 죄악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는데, 그것은 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개심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일부 개혁자들이 힘에 의지했고 - 몽포르와 브레시아의 아놀드가 그랬듯이 - 다른 이들은 극단주의자가 되어 교회에 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참조 : 조던 오만. “가톨릭 전통과 그리스도교 영성”. 이홍조․이영희 역. 분도 출판사. 1991.197쪽]


한편, 프란치스꼬 성인은 마태오복음서의 10, 9~10의 청빈에 대한 복음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애썼으며, 1209년 혹은 1210년에 11명의 제자들을 이끌고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구두 승인을 받은 생활 규칙을 보면 가난, 겸손 및 교회의 권위에 대한 완전한 복종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참조 : 조던 오먼, 같은 책. 198쪽]


프란치스꼬 성인은 고통받는 형제인 나환자들을 통해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을 만났고, 그의 형제인 그리스도는 그가, 지상선이시고 모든 선의 근원이시고 인간에게 자신을 끊임없이 선물로 내어 주시는 사랑으로 스스로를 현시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삼위일체”는 이 지음받지 않은 사랑의 큰 신비이며 이 사랑은 창조하고 구속하고 희생한다. 따라서 프란치스꼬 성인의 기도는 거의 예외없이 당신 선하심으로 모든 이를 부요케 하시는 지존하신 분에 대한 찬미와 감사와 축복의 기도이었다.


중요한 것 한가지는 사람을 죽이는 문자의 노예가 되지않고 생명을 주는 영에 순응하면서, 주님의 영과 그 거룩한 활동을 충만히 간직한 채 순수한 정신과 깨끗한 마음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프란치스꼬 성인의 태도는 자발성과 영의 자유로움으로 특징지워진다.[참조 : Lazaro Irlarte, 앞의 책, 127-128쪽]


이제 프란치스꼬 성인이 받은 영향에 대해 결론지어 요약해 보자.
프란치스꼬 성인이 가난한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영성사의 흐름에 잘 적응한 결과가 아니라, 복음이 무시되는 당시 교회의 상황에서 가난(청빈)을 통한 반향적 복음에로의 회귀를 열정적으로 실천에 옮긴 그의 이상이었기 때문이요,


지난날의 방탕한 삶을 종료하고 진실로 회심하여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이 걸친 실오라기 하나까지도 완전히 버림과 비움을 통함이었다. 이러한 프란치스꼬 성인의 삶의 모습은 당시 교회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교회를 쇄신하고 육성하는 생명의 샘이었던 것이요, 그러기에 또 하나의 위대한 영성의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http://xn--9p4b15e.kr/index.php

 

 



124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