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내 마음의 은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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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07-24 ㅣ No.5154

 

지난해 뉴욕에 갔을 때, 나는 택시를 탔었다. 그런데 그 택시 운전자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 있지 않았다. 그에게는 마음의 평화와 미소가 없었다. 운전을 하는 동안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이 그의 운전하는 방식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서둘러 무엇인가를 하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일과 하나가 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마음은 평화롭지 않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어느 곳인가에 가 있다. 과거나 미래에 가 있고, 분노와 좌절감, 희망과 꿈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 있지 않다. 우리는 마치 유령처럼 떠돌아 다닌다. 사랑하는 이가 그대에게 미소를 지어도 그대는 그를 진정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면 사랑하는 이 역시 그대를 진정으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이라는 소설에서, 사형을 며칠 남겨 놓지 않은 한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독방에 홀로 앉아 있던 그 남자는 천장의 채광판을 통해 손바닥만한 푸른 하늘을 바라 보다가 갑자기 진정한 삶과 만나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의 살아있음을 깊이 체험한 것이다. 그는 남아 있는 날들을 깨어있는 마음으로 보내고, 매 순간을 충분히 느끼며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며칠을 지냈다.

사형 집행을 불과 세 시간 앞두고, 신부가 고해성사를 받고 마지막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 그의 독방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 남자는 홀로 있기를 원했다. 그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신부를 방에서 내보내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뜻대로 신부가 밖으로 나가자, 남자는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죽은 것처럼 살아 있어."

그 신부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살아 있다는 것이다. 남자는 자신을 구원해 주러 온 그 사람이 곧 사형을 당할 자기보다 살아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정으로 살아 있지 않다. 왜냐하면 지금 이순간의 삶과 만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카뮈가 말한 대로 우리는 마치 ’죽은 사람들처럼 살아가고’있는 것이다.

여기 그대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들고, 그대를 지금 이순간의 삶 속으로 돌아오게 하는 몇 가지 길이 있다. 그 첫번째는 자신의 호흡을 자각하는 일이다. 이것은 인간이 지난 수천 년 동안 행해 온 명상법 중 하나다.

숨을 들이 쉬면서, 자신이 지금 숨을 들이쉬고 있음을 자각하라. 그리고 숨을 내쉬면서, 자신이 숨을 내쉬고 있음을 자각하라. 그때 그대는 그대 안에, 그리고 그대 주위에 수많은 행복의 요소들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진정으로 숨쉬는 일을 즐길 수 있고,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삶은 오직, 지금 이 순간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우리가 이 사실을 축하하기 위해 축제의 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많은 의미있는 기념일들을 갖고 있다. 크리스마스, 새해 첫날, 어버이날, 심지어 지구의 날까지 있다. 그런데 지금 이순간 속에 행복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는 날을 축하하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나는 그날을 ’오늘의 날’이라고 선언하고 싶다. 대지와 접촉하고, 하늘을 만나고, 나무를 느끼고, 지금 이 순간 속의 평화를 느끼는 날!

10년 전, 나는 내 오두막 앞에 세 그루의 아름다운 히말라야 삼나무를 심었다. 그 나무들 곁을 지날 때마다 나는 인사를 하고, 나무껍질에 가만히 빰을 대고, 나무를 껴안아 본다. 그리고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면서, 그 나무의 가지들과 아름다운 이파리들을 올려다본다. 나무를 껴안음으로써 나는 깊은 마음의 평화와 많은 생명력을 얻는다.

한 그루의 나무를 껴안는 것은 그대와 나무 모두에게 큰 기쁨을 선사하는 일이다. 그리고 대지와 자기 자신의 삶 모두를 신뢰하는 일이다.

나무는 아름답고, 신선하고, 대지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우리가 나무를 껴안으려 다가갈 때, 나무는 결코 우리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대는 언제든지 나무에게로 가서 의지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게 명상을 배우러 온 사람들에게 나무를 껴안는 수행을 가르친 것도 있다.

자두마을에는 매년 여름 수백명의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기쁨을 주는 아름다운 보리수가 한 그루 서 있다. 몇 해 전, 큰 폭풍이 몰아쳐 가지가 많이 부러지면서 나무는 거의 죽게 되었다. 폭풍이 지나간 뒤 보리수나무를 보았을 때, 나는 정말 울고 싶었다. 나는 그 나무를 껴안을 필요를 느꼈다. 하지만 아무리 나무를 껴안아도 큰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나무가 고통받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 나무를 도와 줄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다행히 우리의 친구인 스코트 메이어 씨가 나무를 치로하는 의사여서 보리수를 정성껏 보살펴 준 덕분에 지금 그 나무는 어느때보다도 건간하고 아름답다. 만일 그 나무가 없다면 자두 마을은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나무 둥치를 어루만지면서 나무를 깊이 느낀다.

나는 또 사람들에게 껴안는 명상을 가르친다. 내가 처음 껴안는 법을 배운 것은 여러 해 전 미국의 애틀랜타 공항에서였다. 한 여류 시인이 나를 공항까지 태워다 주고 나서 내게 물었다.

"불교 승려인 당신을 껴안아도 될까요?"

내가 태어난 동양에서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표현을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난 생각했다.

’난 일반적인 승려가 아니라 선수행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렇게 하는 것도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 여류 시인에게 말했다.

"안 될 거야 없겠죠?"

그러자 그녀는 구 팔로 나를 껴안았고, 나는 금방 나무 막대기처럼 뻣뻣해졌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결심했다. 서양 친구들과 함께 일을 하려면 무엇보다 껴안는 법부터 배워야겠다고. 내가 껴안는 명상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명상을 하려면, 무엇보다 그대가 껴안는 그 사람을 진정으로 껴안아야만 한다. 그대의 두 팔 안에서 그 사람을 진정으로 느껴야만 한다. 겉으로 보이기 위해 대충 껴안을 수는 없다. 자신이 진정으로 느끼고 있다는 듯 상대방의 등을 두세 번 두들겨 주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해서도 안 된다. 그대는 진정으로 그 순간에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꾸밀 필요가 전혀 없어야 한다. 껴안는 동안 자신의 깊은 호흡을 자각하면서, 온몸과 마음으로, 그대의 전존재로 그를 껴안아야만 한다.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내 두 팔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음을, 숨을 내쉬면서 나는 안다. 그가 내게 너무도 소중한 사람임을’.

그대가 세 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그를 껴안고 있는 동안, 그는 그대의 두 팔 안에서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그리고 그대 역시 진정한 인간으로 변화하는 걸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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