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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의 미리 쓰는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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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희 [imsunghee] 쪽지 캡슐

2009-01-10 ㅣ No.10552

                                           [어느 분의 미리 쓰는 유서]
                  

 

 

[어느 분의 미리 쓰는 유서] ●『준비됐습니다, 하느님』 ●『40代 중반 암선고를 받고 나는 알았다. 바로 이 지구가 천국이었다는 사실을….』 ●『나도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사랑하는 내 아들 그리고 딸아. 쨍쨍한 청춘의 여름날이 언제나 계속 될 것 같더니 어느새 눈 덮인 겨울이 왔구나. 얼어붙은 산길 저편을 죽음이라고 한다면 그 뒤에는 무엇이 있을지 불안하기도 하구나. 아버지는 동면하는 짐승처럼 옷깃을 여미고 「준비됐습니다, 하느님」 하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한단다. 아빠는 어린 시절 너희 증조부의 죽음을 봤단다. 저녁을 잡수시고 조용히 누우셨는데 점차로 생명력이 빠져나가더라. 며느리인 어머니가 『연락해서 식구들 다 부를까요』 하고 물으니까 『놔둬라』 하시더라. 그리고는 조용히 혼자 저세상으로 가셨지. 너희 증조부는 평생 나그네셨지. 만주, 시베리아 그리고 강원도의 깊은 산골을 구름같이 흐르다가 본향으로 가셨지. 손자인 아버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 권력 근처에는 가지 말라고 하셨어. 그 끝은 감옥과 처벌이라고. 나는 또 너희 할아버지의 임종도 지켰단다. 할아버지는 죽음을 직감하자 아들인 나에게 『나도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하고 말씀하시더라. 순간적인 당황 같았어. 그렇지만 돌아가시기 30분 전쯤 아들인 나에게 『야, 저기 좋은 세상이 있는 걸 난 봤다. 그런데 의사들이 자꾸만 주사바늘을 찔러 못 가게 하는구나』 라고 말씀하시는 거야. 그리고 너희 할아버지는 구석에서 눈치 보는 할머니를 손짓으로 불렀어. 그리고는 이별의 악수를 하자고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야. 『당신 43년 동안 나하고 사느라고 고생 많았어. 그동안 내가 무섭게 해서 미안해. 미워해서 그런 게 아니야. 사랑했지. 잘 살다가 와』 그 한마디에 수십 년 응어리졌던 할머니의 한이 풀리는 것 같더라. 통곡하는 할머니의 진한 눈물은 모든 게 씻겨 나가는 용서더라.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제 다들 가 봐라』 하면서 잠자듯 눈을 감으시더라. 이게 아버지가 배운 의연한 죽음의 모습이었단다. 그런데 이 유서를 쓰고 있는 아버지는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너희에게 보일까 봐 두렵단다. 죽음이 있으니까 그 이전을 삶이라고 표현하는지도 몰라. 한없이 산다면 죽음도 삶도 없겠지. 너희들은 짧은 인생을 축복같이 즐겁게 살았으면 한다. 그러면 아버지가 전하고 싶은 몇 가지를 말해 볼게. ●고독이란 가난보다 더한 고통 중학교 시절의 아주 추운 겨울 어느 날이었단다. 아버지는 냉기 도는 방안에 앉아 쏟아지는 함박눈을 보면서 울고 있었단다. 너무 외롭고 마음마저 얼어붙었기 때문이지. 맞벌이 부부의 외아들인 아버지는 항상 혼자였지. 몇 푼의 용돈조차 없었지만 고독이란 가난보다도 더한 고통이었단다. 그때 내 앞에 펼쳐져 있던 건 「원형의 전설」이란 장용학의 소설이었단다. 회사원인 할아버지의 문학 전집 외에 지겹게도 길던 소년 시절의 고독한 시간을 때울 방법은 별로 없었단다. 가난과 고독이라는 시련은 책을 읽게 하고 그 수많은 저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인생을 어렴풋이 배웠단다. 하느님은 책만 가지고 안 되는 부분은 현실의 고통을 통해서도 가르치시더라. 요즈음 같으면 학교폭력의 일환인데 아버지는 잠시 일탈한 생활을 하다가 동급생의 칼에 맞기도 했지. 얼굴에 서른 바늘을 꿰매는 상처면 요즈음도 중상에 속하지. 학생 때는 싸울 수도 있단다. 그런데 문제는 말이지 그 후의 처벌이었단다. 아버지는 피해자였는데 그 형태가 거꾸로 둔갑을 했단다. 어느 날 선생님 한 분이 학생이던 나를 불러 일종의 양심선언을 하더라. 재벌집인 가해자 쪽에서 배심원인 전 선생님들에게 양복 한 벌과 금일봉을 주었다고. 자기는 그걸 거절 못 하고 교무회의에서 그냥 흐름에 따랐다고 말이지. 아버지는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걸 알고 그때부터 현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였단다. 어떻게 목성과 해왕성의 크기가 다르다고 불평할 수 있겠니. 재벌 아들과 가난한 회사원의 아들인 나는 같은 교복을 입었어도 같을 수 없는 거야. ●아들ㆍ딸아, 소처럼 묵묵히 걸어가거라 너희들은 살아가면서 절대로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의 마음에 매듭을 짓는 일은 하지 말기를 바란다. 가난하고, 그렇다고 재능도 없는 아버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했단다. 아빠는 느려도 소처럼 한발 한발 내 식대로 가기로 했어. 느릿한 소걸음으로 산을 못 올라 입에 거품을 물고 고통스러워할 때면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이 나의 고삐를 끌고 산 위로 데려다 놓는 거야.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고시에 합격하고 변호사 자격을 얻었단다. 하나만 자랑하자. 머리가 나쁜 아버지가 그래도 고시에서는 최상위권에 들었단다. 소걸음으로도 頂上을 간다는 牛進主義(우진주의)를 실현한 셈이지. 너희들은 남과 비교하지 말고 항상 묵묵히 한발 한발 자기 앞만 보고 걸어갔으면 한단다. 아버지는 아주 작은 꿈을 가졌단다. 여직원 한 명 정도 지키는 남향의 사무실 한쪽 벽에, 읽고 싶은 책을 꽉 채우고 살면 행복하겠다는 것이었어. 집도 작은 아파트에 소박한 승용차 한 대면 만족하겠다고 생각했지. 욕심 그릇을 작게 해야 행복을 쉽게 채울 수 있거든. 회사원인 너희 할아버지가 이렇게 가르쳤었지.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그 말씀이 귀한 진리인 걸 깨달았지. 그래서 아버지는 법률사무소를 개설하고 목표를 정했단다. 최고의 독서가, 진실을 밝히는 글 쓰는 변호사, 그리고 영화 속의 빠삐용 같은 억울한 인물을 자유로 인도하는 뱃사공 변호사가 그거였어. 그런데 현실의 세상은 그런 낭만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험악한 지옥이더라. 만나는 사람의 상당수가 철저한 악마적 속물성을 가지고 있었지. 유흥비나 성욕을 위해 남을 해치는 범죄인 자체가 극단적 이기주의자였지. 재물을 놓고 눈이 확 돌아 법정투쟁을 하는 사람의 본질은 더러운 욕심 그 자체였지. 이 세상은 몇 겹의 베일을 쓰느냐가 문제지 다 비슷한 것 같더라. 착한 사람들은 그런 욕심과 악마들의 먹이가 되는 사슴이나 토끼 같은 존재더라. 한번은 돈 많은 부인한테 고소를 당해 피고로 법정에 섰단다. 남편을 잔인하게 파멸시켜 달라는 걸 거절했었지. 엄청난 공격이 오더라. 조작된 증인, 치밀한 모략, 용병 변호사, 무관심한 재판장의 눈길을 경험했지. 선악보다 승부욕만 남고 누군가는 증오를 해야 하는 사람 같았어. 거기에 걸린 거지. 피고로 법정에 서는 순간 혈관이 터질 것 같은 분노가 솟아올랐지. 아버지는 문득 사람마다 받아 마셔야 할 일정량의 고통의 잔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더라. 하루를 살아도 그날 하루분의 말썽과 고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시련을 피하지 마라 너희들도 시련이 오면 두 팔 벌리고 받아들이기 바란다. 시련을 피하지 말고 고통을 통해 그걸 극복해야 한단다. 40代 중반 암이라는 선고를 받았었지. 의사가 어쩌면 6개월 정도가 남은 생명이라고 했어. 죽음은 남의 일 같았고, 지금이 아닌 언젠가 나중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주변정리를 하나하나 했단다. 그런데 늙은 너희 할머니가 문제였어. 아버지는 수술 전 먼저 죽게 돼서 죄송하다고 할머니께 사과를 드렸지. 그리고 내가 죽은 후에는 양로원에 가시라고 했어. 아직 젊은 너희 엄마에게 짐을 지게 하기 싫었단다. 걱정 말라는 너희 할머니의 뺨에 또 한 번 진한 눈물이 흘러내리더라. 수술하러 병원으로 가는 길에 아버지는 엄청난 발견을 하나 했단다. 봄비에 촉촉이 젖은 연녹색의 잎들이 너무 아름다운 거야.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흰구름을 보면서 바로 이 지구가 천국이었다는 걸 알았지. 그걸 정말 몰랐었다니까. 아버지는 수술대에 올라 의식을 잃기 전에 이렇게 마지막 기도를 했단다. 「하느님,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잘 살다 갑니다」 순간 평생 살아온 장면이 파노라마같이 펼쳐지더라. 후회가 되더라. 진실한 사랑을 심어둔 것도 아니고 선행을 한 것도 없고 즐기지도 못하고…. 「만약 살아난다면 이제부터는 다르게 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천장이 두 개로 확 쪼개지면서 난 깊은 어둠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갔단다. 여섯 시간의 수술 끝에 다행히 아버지는 깨어났단다. 이번에도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어 줬어. 암이 아니고 큰 폴립이었대. 그때부터 아버지는 가을의 투명한 계곡물, 고드름 속의 오색영롱한 빛깔들만 봐도 행복했어. 행복은 별게 아니란다. 그냥 그걸 보는 눈이 열리면 되는 거야. 마음이 푸근한 사람과 차 한 잔을 마시는 것도 행복이지. 수술 후 아버지는 돈에 대한 인식도 바뀌게 됐단다. 아무리 비싼 빌딩도 내 뱃속에 있는 조그만 암 덩어리보다 가치가 없더라. 사랑하는 내 아들·딸아, 저 세상에서 영혼들이 모이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다고 한단다.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가지고 세상에서 쇼를 했다고 말이다. 너희들은 남은 인생을 하루하루 축복같이 즐겁게 살다 오너라. [월간 조선의 기획특집에서 이용한 글입니다.] 배경음악:♬남몰래 흘리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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