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갈매못 성지 다녀 오다.. |
---|
레지오에서 아침 일찍 신부님의 강복을 받고
도착하자마자 미사를 드렸다.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기위해 치명하신 일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 옛날 신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느라 피흘렸다는 이곳 성지....
이곳의 내력은 이러하다.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해변에 있는 조선후기의 천주교인들의 순교지인 갈매못은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장주기 등 다섯 명과 5백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오천은 충청도 수영(水營)이 있던 곳으로 박해기에 국사범으로 체포된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수영이 있던 곳에서 바닷가로 더 나가면 갈매못이 있다. 1845년 입국한 다블뤼 신부는 조선교구 4대 교구장이었던 베르뇌의 순교로 1866년 3월 제5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박해가 시작되어 신자들이 마구 잡혀 처형되자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한 뒤 다른 선교사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후 3월 11일 그의 복사였던 황석두와 함께 내포지방에서 붙잡혔다. 다블뤼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도 자진해서 잡혀 서울로 압송됐다.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게 되고 국혼(國婚)도 가까운 시기여서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못한 징조라 하여 이들을 보령수영으로 옮겨 처형하기로 했다. 1866년 3월 30일 5명은 갈매못에서 처형되었다. 5인의 순교자 중 황석두의 유해는 가족들이 거두어 연풍에 안장했고, 나머지 네 명의 유해는 사흘 뒤 사형장 부근에 매장됐다가 홍산으로 옮겨졌고, 일본 나가사키로 이장되었다가 1900년에 명동 대성당, 1960년대에 시성 시복운동이 전개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장됐다. 그 뒤에도 병인양요와 오페르트도굴사건에 관련된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는데, 《치명일기》에는 1866년 6명, 1868년 3명, 1871년 1명 등 10명이 처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보령시 향토지 《내고장 보령》에는 한양부근에서 잡힌 신자들이 배에 태워져 서해를 거쳐 항구 밖 해변가 자갈밭에서 참수되었는데, 500여명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갈매못은 1975년 대천 성당의 정응택 신부가 순교 당시의 위치를 확인하고 병인박해시 순교한 5명의 약력과 순교사실을 기록한 순교복자비를 세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