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6월22일 성 요한 피셔 주교와 성 토마스 모어순교자♬8.Vider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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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6-23 ㅣ No.1237

 

축일 :6월 22일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St. Thomas More, M

San Tommaso Moro Martire

Born:1478 at London, England

Died:beheaded in 1535; head kept in the Roper Vault, Saint Dunstan’s church, Canterbury, England;

body at Saint Peter ad Vincula, Tower of London, England

Canonized:1935 by Pope Pius XI

Tommaso = gemello, dall’ebraico

Ordo Franciscanus Saecularis

 

 

법률가의 수호자인 성 토마스 모어는 1478년 런던에서 법률학자이자 판사이던 요한 모어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는 12세 때에 켄터버리 대주교인 요한 머턴의 조수 생활을 하다가, 옥스포드로 가서 볍률을 공부했으며, 1501년에 법조계에 진출했다.

1504년에 그는 영국 의회에 진출했으며, 카르투시오 회원이 되려는 꿈을 포기하고는 1505년에 제인 홀트와 결혼하였다.

그들이 집은 잉글랜드의 문예부흥 및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니, 당대의 석학들과 지성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기지는 만인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잉글랜드 인본주의자들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최고 석학이었다.

 

그는 시, 역사를 비롯하여 프로테스탄트를 반대하는 논문, 신심서적과 기도문 등을 저술했고, 고전 번역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유토피아"는(1515-16) 이성이 지배하는 이상 사회를 묘사한 것으로 세계의 고전이 되었다.

또 "루터를 배격하는 헨리의 변명"(1523)은 그가 가르쳤던 헨리 8세에 대한 강력한 옹호가 담긴 서적이다.

1510년, 그는 런던의 주장관 대리가 되었고, 1511년에는 아내와 사별한 뒤에 과부이던 엘리스 미들톤과 재혼하였다.

헨리가 왕으로 등극하면서부터 그는 프랑스와 플란데르의 외교 사절로 활약했고, 1517년에는 추밀원에 진출했으며, 1521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523년에 하원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529년에는 월시 추기경 후임으로 재상이 되었다.

 

모어는 이때 왕의 이혼에 대하여 강력한 어조로 반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상으로 기용된 것이다.

그 후 헨리8세가 카타리나 왕비와의 이혼 허가를 교황청에 제출하는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자, 국왕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또 교회를 반격하는 일련의 서류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후, 모어는 재상직을 사임하고, 1532년에 첼시의 집으로 돌아왔다.

또한 그는 헨리와 앤 보렌과의 자식에게 후계 지위를 양도한다는 소위 왕위 계승 문서에 서명을 거부하므로써, 왕에게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그는 1534년에 체포되어 런던 탑에 갇혔고, 15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 중에도 수장령의 서명을 요청하는 크롬웰에게 침묵권을 행사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일부터 꼭 닷새째 되는 날인 7월 6일에 그는 참수형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그러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1935년에 시성되었고, 법률가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는다.

 

평신도 지도자는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관할권을 가질 수 없다고 한 토마스 모어는 자기 믿음의 대가로 생명을 바쳤다.

’4계절의 사나이’라고 불린 모어는 문학자이며 뛰어난 법률가로서, 신사였으며 네 아이의 아버지로 영국의 수상이었다.

 

훌륭한 영적 인물이었던 그는 앤 볼레인과 결혼하기 위하여 아라곤의 카타리나와 이혼한 왕의 처사를 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로마 교회와 관계를 끊고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는 헨리 8세를 영국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로 인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반역죄로 재판을 기다리면서 런던탑에 갇혀 있었다. 그 반역죄란 계승 법령과 영국 왕이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내용의 문서에 서약하지 않은 것이었다.

토마스 모어는 확신을 가지고 "나는 모든 그리스도교계의 공의회를 알고 있지만 자기 양심의 판단에 따르지 않은 것은 오직 한나라의 공의회뿐"이라고 단언했다.

 

 

400년 후인 1935년에 토마스 모어는 하느님의 거룩한 인물인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몇몇 성인들은 20세기에 와서 더욱 두드러진다.

최고의 외교관이며 조언자였던 그는 왕을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윤리적 가치관과 타협하지는 않았다.

권위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것이 권위에 대한 진정한 충절은 아님을 알았던 것이다.

헨리8세 자신도 이것을 잘 알았다. 그는 토마스 모어란 인물이 신중한 사람이며 그의 인격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수상인 그를 자기 편에 두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헨리 8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두 가지 문제를 인정할 수 없었던

토마스가 수상직을 사임하자 헨리 8세는 그를 없애 버린 것이다.

 

 

사형 집행인이 토마스 모어에게 눈가리개를 하려고 하자 그는 자기 스스로 그것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처형대의 받침 위에서-그것은 단순한 나무토막이었다-자기 머리를 쳐 들고 잠깐만 기다리라는 신호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 농담을 했다.

나무토막 위에 놓여 있는 자기 수염을 치우고 싶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것(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거운 도끼가 천천히 들려 올라가서 잠깐 동안 공중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테오도르 메이나르, ’영웅 인문주의자’)

 

 

성 토마스 모어가 옥중에서 자기 딸 마르가리따에게 보낸 편지에서

(The English Works of Sir Thomas More, London, 1557, p.1454)

 

하느님께 내 모든 희망을 걸고 내 전부를 맡기겠다

 

내 사랑하는 마르가리따야, 내 지난 날의 죄를 볼 때 나는 하느님께로 부터 마땅히 버림받아야 할 몸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다 내 신뢰를 걸고 또 마음을 다하여 희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하느님의 거룩한 은총은 나를 굳세게 해주시어 나로 하여금 양심을 거슬러 서약하는 것보다 기쁜 마음으로 재물과 토지와 생명마저 잃을 수 있게 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또 국왕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그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주시어 아직은 나에게서 자유만을 빼앗도록 하셨다.

이 자유를 나에게서 거두실 때 하느님께서는 이제까지 내 신앙을 북돋아 주시고자 그토록 허다하게 베풀어 주신 당신의 커다한 영적 은혜들 가운데서

내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 가장 큰 은혜라고 생각토록 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불신할 수없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국왕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를 대하게 하시어 그가 나에게 아무 해를 입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의 죄 때문에 응당히 받아야 할것 이상으로 고통받게 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분의 은총이 나로 하여금 인내의 마음으로 그리고 어쩌면 기쁜 마음으로까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을 주실 것이리라고 확신한다.

내가 고통을 잘 참아 낸다면 이것을 내 인내심의 공로를 훨씬 초월하는 주님의 쓰라린 수난의 공로와 결합시키시어,

내가 연옥에서 당할 고통을 줄여 주시고 천상에서 받을 상급을 늘려 주실 것이다.

 

마르가리따야, 내 비록 허약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느끼고 있지만, 절대로 하느님을 불신하지 않겠다.

나를 쓰러뜨릴 정도의 두려움을 내가 느끼어 되어도 성 베드로에게 생긴 일을 기억하겠다.

돌풍이 일자 약한 믿음 때문에 물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한 그가 그리스도를 부르면서 도움을 간구한 것처럼 나도 그를 본받아 그리스도께 간구하겠다.

그때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손을 뻗치시어 폭풍에 휩싸인 이 바다에서 나를 붙들어 올리시어 물에 빠져 들지 않게 하시리라.

그런데 내가 베드로를 답습하여 나도 그처럼 유혹에 넘어져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하게 된다면,

(하느님의 자비는 내가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고 혹시라도 빠진다면 유익보다는 해가 되게 해주기를)

그때에도 베드로를 인자하게 굽어보신 것처럼 나도 연민에 찬 시선으로 굽어보시고 다시 일으키시어 내 양심의 진실을 다시금 고백하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내 잘못에 대한 수치와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도록 해주실 것입니다.여하튼 나는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마르가리따야, 하느님께서는 내 잘못이 아니라면 결코 버림받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을 허락치 않으실것이다.

나는 하느님께 내 희망을 걸고 내 전부를 그분께 맡기겠다.

그러나 내 잘못 때문에 버림받은 자 된다 해도 이것은 하느님의 정의와 찬미와 영광이 될 것이다.

마르가리따야, 하느님이 너그러우신 자비는 이 불쌍한 영혼을 구하시고 내가 그 자비를 찬미할 수 있게 해주시리라 굳게 믿으며 이를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내 사랑하는 딸아, 이 세상에서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걱정하지 말아라. 하느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 어떠한 일도 생길 수 없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겉보기에 그것이 나쁜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참으로 가장 좋은 것이 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같이 국왕의 총애를 받은 토마스는 신(臣)과 민(民)으로서의 모든 영예를 다 지녔다고 볼 수 있지만,

그는 결코 국왕의 비도(非道)에 대하여 묵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즉 헨리 8세가 안나 볼레인과 결혼하기 위해 본처인 황후와 이혼하고자 모어에게 동의를 청한 때이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헨리 8세의 사건이다.

 

이로 말미암아 오늘의 영국 성공회가 시작된 것이지만, 가톨릭적 결혼관은 "주님께서 맺어주신 바를 사라미 능히 이를 풀지 못하느니라"하신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혼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토마스는 국왕에게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권유하려 했으나

국왕이 도저히 이를 들어주지 않았기때문에 마침내 사표를 내게 되었다. 물론 왕은 이를 수리하지 않았다. 토마스의 고민은 날로 커져만 갔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정적들은 때를 이용하여 여러 자기 모략으로 토마스에게 역적의 죄목을 씌웠다.

토마스의 충성은 세인이 다 알기 때문에, 그런 죄목에 대한 혐의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다만 신조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일보도 양보치 않을 것은 분명했던 것이다.

 

이것이 국왕의 비위에 거슬리게 되어 그는 즉시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재산까지도 몰수당했다.

그는 최후 판결을 받는 날 눈물겨운 심정으로 고해 영성체하고 미사 참여를 마친 후 일단 신자들에게 이별의 인사를 고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몸이 되고 말았다.

 

재감 1년간, 정적들은 수차에 걸쳐 그의 배교와 번의 (飜意)를 꾀했다. 심지어는 그의 사랑하는 딸 마르가리타를 보내

’피셔 주교님도 국왕의 이혼을 승낙하셨는데 아버지도 마음을 돌리세요"라고 말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죄를 지을 수는 없다"하며 끝까지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다음은 사랑하는 아내 알리스가 와서 애걸했다. 남편이 없는 가정이란 말할 수 없는 형편이라는 등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눈물로써 토마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토마스는 "알리스, 내가 양심을 어겨서 국왕의 비행에 동의하고 형벌을 면한다 합시다. 우리가 앞으로 얼마동안 더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며 살 수 있겠소?"

 

"한 20년쯤은.."

 

"뭐 20년쯤? 그래 그것 더 살려고 죽어서 영원한 지옥 불을 당해도 좋단 말이오? 그건 너무나 미련한 짓일 뿐이오" 하는 대답뿐이었다.

토마스의 옥중 생활을 편지를 쓰거나 저서를 저술하는 것 등이었다. ’신앙을 위한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등은 재감 중에 저술한 서적이다.

얼마 후 그는 펜과 잉크까지도 압수당했다. 이렇게 되자, 그는 기도를 드리는 것 외에는 위로를 삼을 길이 없게 되었고,

가끔 종이 조각에다 숯 부스러기로 편지를 써서 처자에게 소식을 전하곤 했다.

 

1535년 7월 1일에 토마스에게 추상같은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형 집행은 6일이었다.

그가 단두대에 섰을 때,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기는 무수한 군중들에게 전래대로 고별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그것마저 인심을 소란케 한다는 이유로 금지 당하고 말았다.

"나는 가톨릭 신앙을 위해 죽는다"는 간단한 한 마디와 십자가를 손에 꼭 쥐고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베푸소서"를 외쳤다.

 

변천 무상함은 세상의 상사인지라, 한때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었던 대 재상이 지금은 역적의누명을 쓰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려는 찰나에 아무리 심장이 강철같은 집행인일지라도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본 토마스는 침착한 발걸음으로 그들 앞으로 가까이 가서 등을 두드리며

"걱정할 것 없어. 지금은 당신들이 나의 가장 고마운 친구들이야"하며 오히려 격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잠깐동안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고스스로 단두대에 머리를 눕혀 형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그러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의 머리는 가장 번화한 거리인 런던 다리 위에 매달아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도록 했다 한다.

 

그러나 정의를 위해서는 어떠한 권력에도 굽힐 줄 모르는 철석같은 신앙은 마침내 상급을 받았으니,

즉 1934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토마스는 요한 피셔와 더불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오늘날 가장 근대적인 성인으로 전세계 신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축일 : 6월 22일

성 요한 피셔 주교 순교자

St. Joannes Fisher. E. M

1469-1535년 영국

 

완벽한 설교가요 저술가로 알려진 요한 피셔는 영국의 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22세에 사제가 된후 황후의 고백신부로 활동하였으며 케임브리지 대학장, 추기경 등을 지내면서 이단을 반박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고수하는 등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였다. 헨리 8세의 이혼과 그의 영국교회 최고 책임자라는 주장을 완강히 거부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법과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자 했던 요한 피셔는 1535년 참수형으로 순교 하였다.

 

요한 피셔는 보통 에라스무스,토마스 모어, 그리고 다른 문예 부흥기의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언급된다.

따라서 그의 생애는 일부 성인들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겉보기에도 그리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당시의 지성인들이나 정치가들과 교제한 학자였다. 그는 당시의 문화에 관심을 가졌으며 나중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그는 35세에 로체스터의 주교가 되었으며 엄격한 생활을 했고 탁월한 사목자가 되어 신자들을 자주 방문했다.그의 특별한 관심 중의 하나는 영국의 설교 수준을 높이는 것이었다.

 

피셔 자신은 완벽한 설교가였고 저술가였다. 참회 시편에 관한 그의 설교는 그가 죽기 전에 일곱 번이나 재판에 회부되었다.

루터파의 등장과 더불어 그는 이단과의 논쟁에 휩싸였다. 그가 이단을 반박하기 위해 쓴 8권의 책은 그로 하여금 유럽 신학자들사이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갖게 해주었다.

 

1527년에 그는 헨리 8세와의 이혼과 재혼을 반대하고 그리고 후에는 헨리 8세가 영국 교회의 최고 책임자라는 주장을 거부함으로써 헨리8세의 분노를 샀다.

그를 제거하기 위한 첫 시도로 헨리 8세는 켄트의 수녀인 엘리사벳 바튼의 ’계시’를 모두 보고하지 않았다고 그를 고발하였다.

몹시 허약해진 그는 새로운 계승 문서에 서약하도록 소환되었다.

 

그와 토마스 모어는, 이 문서와 다른 내용들이 헨리 8세의 이혼이 합법적이라는 것과 헨리 8세가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주장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 서약을 거부했다.

그들은 런던탑으로 보내졌고 피셔는 그곳에서 재판도 받지 않고 14개월 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그들은 결국 종신형을 언도받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 두 사람은 더 많은 심문에 소환되었으나 계속 침묵을 지켰다.

피셔는 한 사람의 사제로서 사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는 계교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왕은 영국 교회의 최고 책임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교황 바울로 3세가 옥중의 피셔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자 더욱 화가 난 왕은 그를 반역죄로 재판에 부쳤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으며 그의 몸은 하루 종일 처형대에 뉘어 있었고 그의 머리는 런던 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토마스 모어는 그로부터 2주 일 후에 처형되었다.요한 피셔 주교는 6월 22일, 그리고 토마스 모어는 7월 6일에 참수형을 받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사제들이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요한 피셔는 주교로서 자기 소명에 충실했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고수하였다. 그가 순교한 이유는 바로 로마 교황청에 대한 그의 충성심 때문이었다.

그는 그 시대의 문화적 계몽 단체나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에 모두 참여하였다. 이러한 참여는 그로 하여금 그 나라 지도자의 윤리적 행동에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인간의 기본 권리나 인류의 구원 그 자체에 필요하다면 교회가 사회적,국가적,국제적 차원에서 정의를 선포하고 불의한 일들을 고발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

(1971년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세상에서의 정의’)

 

에라스무스는 요한 피셔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정직한 생활,뛰어난 학문,위대한 영혼에 관한 한 이 시대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469년 요크샤 주의 베라리이 마을에서 태어나 유명한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해 신학을 배워 1501년 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그 즉시 그 대학 주사(主事)로 뽑혔다. 그는 한편 사제가 되어 많은 사람들과 특히 상류의 인사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헨리 7세 왕의 고문으로 취임해 달라는 요청을 받을 정도로 신임을 받고있었다. 그의 직무에 대한 열의에는 황태후도 매우 감동되어 이에 보답하는 뜻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 2학부를 증설할 비용과 수많은 학생에 대한 보조비 등을 하사할 정도 였다. 그리고 국왕은 또한 그의 공로를 생각해 1504년 로체스터의 주교좌를 그에게 주셨던 것이다. 헨리 8세가 즉위했는데, 그도 자녀가 부모를 따르듯이 피셔를 경애하며 "유럽이 넓다 해도 우리 로체스터 주교처럼 학덕 겸비한 위대한 인물은 다른데에는 없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이라 부르며 가톨릭 전래의 교회와 성사등을 다수 폐지하자, 헨리 8세는 호교의 펜을 들어 ’일곱의 거룩한 성사’라는 서적을 저술했는데, 이에도 주로 피셔 주교의 권고와 조력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를 위해 진력한 헨리 8세가 돌연 마음이 변해 교회를 배반하게 된 이유는 누구나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안나 보레인이라 하는 궁녀에 대한 사욕(邪慾)에서 발단한 것이었다. 왕은 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왕후 가타리나와의 결혼이 무효였다는 것을 피셔 주교나 토마스 모어 재상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했으나 이 두 사람은 모두 정의에 강한 분이었으므로 왕의 부정한 요구를 거절하고 성심성의로 그에게 간(諫)했다. 그러나 사욕에 눈이 어두워진 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두 사람을 미워하며 드디어 그들을 런던 탑의 감옥에 가두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이미 67세의 고령에 달했던 피셔는 옥중의 고통을 인내하기를 1년, 체력이 몹시 쇠약해져 재판 받으러 나갈때에도 걸을 수가 없어 테임즈 강 위를 배로 운반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였다. 그러나 정신은 조금도 쇠퇴하지 않고 고난이 심하면 심할 수록 그만큼 마음에는 열렬한 신앙의 뜨거운 불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죄목은 국왕에 대한 배반이란 것이었다. 재판관이 "그대는 그 죄를 인정하는가?"하고 물으니 피셔는 정색을 하고 나서서 "나는 반성을 해 보아도 국왕에게 대해 불경한 행동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하고 명백히 단언하며 일일이 논고를 변박했다. 그런데 그를 사형에 처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재판은 다만 형식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피셔의 변론이 모두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사형의 선고는 드디어 그에게 내려진 것이다.

 

사형 집행의 명령은 1535년 6월 21일이 밤에 내렷으나 다음 날 아침 5시에야 비로소 그 뜻을 전하였던 바 피셔는 태연한 태도로 ’그렇소, 고맙구려"하고 대답하고는 집행의 시간이 오전 9시라는 것을 듣자 "그러면 아직 두시간 가량 더 쉬게 해 주시오"하고 말하면서 다시 침상에 누웠다.

 

일곱 시에 눈을 뜨자 주교는 몸에 걸치고 있던 고복을 호화스러운 의복으로 갈아입고 형리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관리들이 모시러 오자, 그는 성호를 긋고, 복음성서를 들고 서서히 감옥을 나왔다. 사형장에 가는 도중 그 성서를 펼쳐 보니, 눈에 띈 것은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 3)라는 한 구절이었다. 그는 그것이 얼마나 자기의 현 처지에 적합한 말씀인가 생각하며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노(老)주교께서 사형대에 서게 되자 형 집행인은 옆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다. 이에 대해 그는 온순한 말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형제여,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용서합니다. 나는 죽음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으니 결코 근심을 말아주시오"라고.

 

그리고 나서 피셔는 단(壇)위에서 그의 덕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최후의 설교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함을 듣고 나서는 다만 자기가 신심을 위하여 죽는다는 취지만을 간단히 말하고 조국과 국왕을 위해 기도를 바치고 군중에게 고별 인사를 하고 나서 소리높이 떼 데움을 읊고 "주여, 우리는 당신을 신뢰하오니 영원히 멸망치 말게 하소서" 하고 기도를 마치자 하늘을 우러러보며 팔을 벌리고 이어 참수 순교했다. 때는 1535년 6월 22일 이었다. 피셔 주교는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바오로 3세에 의해 로마 교회의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요한 피셔는 토마스 모어와 함께 1886년 12월 20일 시복되고, 1934년의 성령 강림 축일에 시성되어 영원한 영광을 획득하게 되었다.

 

 

 

 

 

 

♬8.Viderunt Omnes - monastic chants-christdesert(Benedict)

 

 

 

 

 

 

 

 

 

 

 

 

 

 

 

 

THOMAS MORE

 

Memorial

22 June

Profile

Studied at London and Oxford. Page for the Archbishop of Canterbury. Lawyer. Twice married, father of one son and three daughters, and a devoted family man. Writer. Friend of King Henry VIII. Lord Chancellor of England, a position of power second only to the king. Opposed the king on the matter of royal divorce, and refused to swear the Oath of Supremacy which declared the king the head of the Church in England. Resigned the Chancellorship, and was imprisoned in the Tower of London. Martyred for his refusal to bend his religious beliefs to the king’s political needs.

Born

1478 at London, England

Died

beheaded in 1535; head kept in the Roper Vault, Saint Dunstan’s church, Canterbury, England; body at Saint Peter ad Vincula, Tower of London, England

Canonized

1935 by Pope Pius XI

Patronage

adopted children, diocese of Arlington Virginia, civil servants, court clerks, difficult marriages, large families, lawyers, diocese of Pensacola-Tallahassee Florida, politicians, politicos, statesmen, step-parents, widowers

Representation

English Lord Chancellor carrying a book; English Lord Chancellor carrying an axe

Writings

Treatise On The Blessed Sacrament

Utopia

 

Readings

What does it avail to know that there is a God, which you not only believe by Faith, but also know by reason: what does it avail that you know Him if you think little of Him?

 

- Saint Thomas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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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men call fame is, after all, but a very windy thing. A man things that many are praising him, and talking of him alone, and yet they spend but a very small part of the day thinking of him, being occupied with things of their own.

 

- Saint Thomas More Although I know well, Margaret, that because of my past wickedness I deserve to be abandoned by God, I cannot but trust in his merciful goodness. His grace has strengthened me until now and made me content to lose goods, land, and life as well, rather than to swear against my conscience. God’s grace has given the king a gracious frame of mind toward me, so that as yet he has taken from me nothing but my liberty. In doing this His Majesty has done me such great good with respect to spiritual profit that I trust that among all the great benefits he has heaped so abundantly upon me I count my imprisonment the very greatest. I cannot, therefore, mistrust the grace of God.

 

By the merits of his bitter passion joined to mine and far surpassing in merit for me all that I can suffer myself, his bounteous goodness shall release me from the pains of purgatory and shall increase my reward in heaven besides.

 

I will not mistrust him, Meg, though I shall feel myself weakening and on the verge of being overcome with fear. I shall remember how Saint Peter at a blast of wind began to sink because of his lack of faith, and I shall do as he did: call upon Christ and pray to him for help. And then I trust he shall place his holy hand on me and in the stormy seas hold me up from drowning.

 

And finally, Margaret, I know this well: that without my fault he will not let me be lost. I shall, therefore, with good hope commit myself wholly to him. And if he permits me to perish for my faults, then I shall serve as praise for his justice. But in good faith, Meg, I trust that his tender pity shall keep my poor soul safe and make me commend his mercy.

 

And, therefore, my own good daughter, do not let you mind be troubled over anything that shall happen to me in this world. Nothing can come but what God wills. And I am very sure that whatever that be, however bad it may seem, it shall indeed be the best.

- from a letter written by Saint Thomas More from prison to his daughter Margaret

 

 

 

 

San Tommaso Moro Martire

 

22 giugno - Memoria Facoltativa

Londra, 1478 - 6 luglio 1535

 

Cancelliere del re e umanista di acutissimo ingegno, nella famiglia e nella politica espresse una rara sintesi di sensibilita umana e di sapienza cristiana.

Giovanni Fisher e Tommaso More furono eminenti personalita della Chiesa e della societa inglese, al tempo in cui Enrico VIII dopo il divorzio aveva iniziato il processo di separazione dalla Chiesa di Roma. Morirono martiri testimoniando insieme l’indissolubilita del matrimonio e l’unita della Chiesa. (Mess. Rom.)

 

Patronato:Avvocati

Etimologia: Tommaso = gemello, dall’ebraico

Emblema: Palma

 

Dicono che tutti gli uccelli di Chelsea (all’epoca sobborgo rurale di Londra) scendano a sfamarsi nel suo tranquillo giardino. Un indice della sua fama di uomo sereno e accogliente. Thomas More (questo il nome inglese), figlio di magistrato, e via via avvocato famoso, amministratore di giustizia nella City, membro del Parlamento. Dalla moglie Jane Colt ha avuto tre figlie e un figlio; alla sua morte, si risposa con Alice Middleton.

Ha imparato a Oxford l’amore per i classici antichi e lo condivide con Erasmo da Rotterdam, spesso ospite in casa sua. Scrive la vita dell’umanista italiano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ma sara piu famoso il suo dialogo Utopia, col disegno di una societa ideale, governata dalla giustizia e dalla liberta. E’ un umanista che porta il cilicio, che studia i Padri della Chiesa e vive la fede con fermezza e gioia. Quando Lutero inizia la sua lotta contro Roma, il re Enrico VIII d’Inghilterra scrive un trattato in difesa della dottrina cattolica sui sacramenti, ricevendo lodi da papa Leone X e accuse da Lutero. A queste risponde Tommaso Moro, che Enrico stima per la cultura e l’integrita. Spesso lo consulta, gli affida missioni importanti all’estero. E nel 1529 lo nomina Lord Cancelliere, al vertice dell’ordinamento giudiziario. Un posto altissimo, ma pericoloso.

Siamo infatti alla famosa crisi: Enrico ripudia Caterina d’Aragona (moglie e poi vedova di suo fratello Arturo), sposa Anna Bolena, e giunge poi a staccare da Roma la Chiesa inglese, di cui si proclama unico capo. Per Tommaso Moro, la fedelta esige la sincerita assoluta col re: anche a costo di irritarlo, pur di non mentirgli. E cosi si comporta. La fede gli vieta di accettare quel divorzio e la supremazia del re nelle cose di fede. Lo pensa, lo dice, perde il posto e si lascia condannare a morte senza piegarsi.

Incoraggia i familiari che lo visitano nella prigione della Torre di Londra e scrive cose bellissime in latino a un amico italiano che vive a Londra, il mercante lucchese Antonio Bonvisi: "Amico mio, piu di ogni altro fedelissimo e dilettissimo... Cristo conservi sana la tua famiglia". Bonvisi gli manda in prigione cibi, vini e un abito nuovo per il giorno dell’esecuzione (ma non glielo lasceranno indossare). Davanti al patibolo, e cordiale anche col boia che dovra decapitarlo: "Su, amico, fatti animo; ma guarda che ho il collo piuttosto corto", e gli regala una moneta d’oro. Poi, venuto il momento, dice alcune parole. "Poche", gli hanno raccomandato: e poche sono. Tommaso Moro invita a pregare per Enrico VIII, "e dichiaro che moriva da suddito fedele al re, ma innanzitutto a Dio".

Quindici giorni prima, per le stesse ragioni, e stato decapitato il suo amico John Fisher, vescovo di Rochester, che sara canonizzato insieme a lui da Pio XI nel 1931. Ora la Chiesa li ricorda entrambi nello stesso giorno.

Autore: Domenico Ag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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