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음동성당 게시판

* 알아들어야 할 진실(1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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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국길 [fcan] 쪽지 캡슐

2004-11-25 ㅣ No.3779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2004-11-25)

독서 : 묵시 18,1-2. 21-23 ; 19.1-3.9ㄱ 복음 : 루가 21,20-28

*  알아들어야 할 진실  *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 도시가 파멸될 날이 멀지 않은 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가고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곳을 빠져 나가라. 그리고 시골에 있는 사람들은 성안으로 들어가지 말라. 그때가 바로 성서의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다. 이런 때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하다. 이 땅에는 무서운 재난이 닥칠 것이고 이 백성에게는 하느님의 분노가 내릴 것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질 것이며 포로가 되어 여러 나라에 잡혀갈 것이다. 이방인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예루살렘은 그들의 발 아래 짓밟힐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지상에서는 사납게 날뛰는 바다 물결에 놀라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 것이며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무서운 일을 내다보며 공포에 떨다가 기절하고 말 것이다.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
(루가 21,20-­28)

오늘 복음은 빌라도 앞에 서 계신 예수의 침묵을 떠올리게 한다. 수많은 죄목으로 고발당하면서도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셨던 예수. 그러나 빌라도는 그 침묵을 알아듣지 못했다. 빌라도는 ‘진실’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 진실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 그 자체이시고 생명을 주는 친밀함이니 이 친밀함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데도 그렇지 못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고,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서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은 반드시 내리시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그런 재앙에서 구하기 위한 말씀이다. 그러면 그런 재앙을 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지금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 곧 하느님을 배신하고 몹쓸 짓을 하고 명령과 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고,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무슨 뜻일까?
빨리 산으로 달아나라는 말은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말이다. 성서에서 산은 하느님이 계신 곳을 가리킨다. 따라서 더이상 죄를 짓는 예루살렘에 머물지 말고 이제는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는 말은 악의 구렁에서 나오라는 말씀이요,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죄짓는 악의 구렁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오늘 복음은 세상 종말에만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옛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새 예루살렘이 건설되고 있는데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죄의 구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지금은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 천상 예루살렘의 삶을 살기 위해 옛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때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복음의 말씀을 살아야 할 때라는 말씀이다.
“오, 주님. 오늘 저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온 존재가 두려움의 침략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 평화, 아무 휴식도 없이 다만 두려움만 있을 뿐입니다. 정신적 몰락, 잘못된 삶을 살아간다는 두려움, 거부와 심판의 두려움 그리고 당신에 대한 두려움뿐입니다. 오, 주님. 당신도 두려움을 아셨습니다. 당신은 깊이 번민하셨고 당신의 땀과 눈물은 당신의 두려움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 주님. 제 두려움이 당신의 두려움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 두려움이 저를 암흑이 아니라 빛으로 이끌게 하시고 당신 십자가의 희망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이끄소서.”(헨리 나웬, 「자비를 향한 외침」 중에서)

최기도 수사

- 힘이 되어 주는 사랑 -

사랑은
모든 병을 치료해 주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망에 빠져 있을때에도
그대의 말한마디
그대의 손길에 따라
나는 다시 힘을 얻고 일어나
열정을 다해
살기로 다짐을 합니다

사랑은
모든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 사랑을 위하여 그대를 만나게 된 것은
행복중의 행복입니다
홀로 이루려는 사랑보다 둘이 이루는 사랑에
아름다운 결실이 있습니다
그대가 주는 사랑은 삶에 힘이 되어주는
사랑입니다

- 용혜원의 詩중에서 -


님을 초대합니다

† 【 안나의 묵상나누기 】 †

내가 지금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
곧 하느님을 배신하고 몹쓸 짓을 하고 명령과 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바람나고 즐거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벗 님들은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앗! 저는 사람을 사귀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귀는 일이란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의 살아온 삶에 대해서 알아간다는 것
이겠지요. 또 그의 살아갈 날들에 대해서 듣게 되는 것이지요.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상대편의 삶을 통해서 삶의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모르던 삶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책보다도 더
생생하게 느껴져옵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치대고 부비며 情이 들어가는 과정중에서
만약에 진실이라는 것이 빠져버린다면/그 다음 이야기에서부터는
흥미가 잃어져갑니다. 진실이라는 양념은 그의 삶이 어떤 모습이
었던간에 그의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진실과 진실은 통하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나의 관계에서 꼭 알아들어야 할 진실이 있다면...
내가 살아왔던 죄의 생활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죄 라는 것
을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그분이 하느님
의 어린양이 되셔서 그렇게 참혹하게 떠나셔야 되었던 것을....
그 진실을...

앗! 는 알아듣는데, 앗! 는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 한국 사람이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진실은 통할
수가 없는 이국 언어로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상
대방에게 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냐 하는 것은 전교를 해 본
사람이면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내 평생 살아가면서 알아내야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
은 그분이 나의 죄 값을 지불하였기에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과,
그래서 내가 이 땅에서 그분과 함께 동거동락하면서 살아갈 수 있
다는 것. 그래서 슬픈 일도 기쁜 일도 모두가 의미가 있다는 것!
그리고 생명이 다하는 날에 하느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이 기쁜
소식이요, 이 진실입니다. 최진실이 아닙니다.^^

[2고린토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 것이 나타났습니다.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이라면 오늘 묵상 글에 나오는
구절처럼...
내가 지금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요,
곧 하느님을 배신하고 몹쓸 짓을 하고 명령과 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서야만 되는 것입니다. 돌아서지 않는다면 나에게 진실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살아왔던 방식에서 돌아서야만이 진실의 값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돌아선다는 것은 회개하는 것이겠지요. 얼만큼의
크기로 돌아서느냐에 따라서 진실의 값이 매겨질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진실을 외면하는 이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고 있습니까. 그 영혼을 얼마나 안탑깝게 생각하고 있는지요.
과월호『야곱의 우물』에는 오늘 복음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아빠(Abba), 아버지라고 가르쳤다.
우리 존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우리가 정말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고 있는 것일까? 정말 그럴까? 우리가 이미 '아들'임
에도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갓 태어난 새깨 호랑이가 염소들과 섞여 살았다.새끼 호랑이는 염소들을
따라 염소처럼 풀을 뜯고 염소처럼 소리를 질렀다. 하루는 큰 호랑이가
언덕에 올라 염소 무리를 바라보다가 새끼 호랑이를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가 염소 흉내를 내고 있다니! 호랑이는 새끼 호랑이
에게 본래의 자리를 찾아주자는 마음에서 가까이 다가갔다.어린 호랑이
와 염소들은 힘을 다해 동망치기 시작했다.

호랑이는 단걸음에 새끼 호랑이를 따라잡아 가로막고 "너는 호랑이인데
왜 염소 새끼처럼 행동하니?" 하고 물었다. 어린 호랑이는 부들부들 떨
면서 "나는 염소 새끼이니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큰 호랑이는 새끼 호랑이를 물고 호수로 갔다. 큰 호랑이가 호통을 쳤다.
"물속에 비친 네 모습을 보아라. 그리고 나를 보아라. 그리고 포효하라."
물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본 어린 호랑이는 가슴속부터 올라오는 엄청난
에너지를 느끼며 포효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나 자신이 그 속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우리는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야 한다. 염소들과 섞여 사느라 진정한 자신을
잊고 살아온 새끼 호랑이의 전설을 기억해야 한다.

혼란에 빠진 자가 누구인지를 묻고 그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살아 계신
스승을 만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로 우뚝 서야 한다.
"너희의 머리를 들라. 그리고 아들임을 자각하라."

(2002년 11월『야곱의 우물』 《매일성서묵상》에서
수원가톨릭대학교 심한구 신부님의 글입니다.


어미 호랑이가 새끼 호랑이에게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진실을
외쳤을까 가슴으로 느껴봅니다. 오늘 묵상 글의 마지막 글귀에
마음을 모두어 봅니다.

"오, 주님. 오늘 저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온 존재가 두려움의 침략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 평화,아무 휴식도 없이 다만 두려움만 있을 뿐입니다.

정신적 몰락, 잘못된 삶을 살아간다는 두려움,
거부와 심판의 두려움
그리고 당신에 대한 두려움뿐입니다.

오, 주님. 당신도 두려움을 아셨습니다.
당신은 깊이 번민하셨고
당신의 땀과 눈물은
당신의 두려움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 주님. 제 두려움이 당신의 두려움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 두려움이 저를 암흑이 아니라
빛으로 이끌게 하시고
당신 십자가의 희망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이끄소서."


머물다가는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평화를 가득히 비는...



안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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