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티나에는 봄이 없이 바로 여름으로 접어든다. 그러니까 나무에 꽃이 피는 것을 보면 여름이 다가온 것이다. 그것을 알려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계절이나 날짜를 지적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보증하시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다. 끝이 없이 기다릴 때 참고 견뎌낸다는 것은 어렵다. 이 약속의 진실성은 하느님께서는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어떠한 것도 믿을 만하게 만드신다는 데 있다. 기다림이 왜 행복인지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누가 누구를,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기다릴 사람이나 사건조차 없는 경우를 생각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복된 일이다. 그들에게는 오늘의 삶을 지탱해 내일로 향하게 할 원동력인 ‘기다림’이 있었다. 그것이 없을 때 사람은 스스로 절망하여 삶을 포기하거나 목숨을 끊기까지 한다. 무엇을 또는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는다. 기다림도 잘못 기다리면 오히려 인생을 망치는 수가 있다. 기다리는 사람은 ‘집’에서 기다려야 한다. 자기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만나러 길을 떠나면 그때부터 그는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찾아 나선 사람’이다.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며 집 문간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기다림은 ‘오늘’에 그 뿌리를 내리고 ‘내일’을 지향한다. 내일이 없으면 기다림도 없거니와 오늘이 없어도 기다림은 없다. 바로 이 때문에 기다림이 사람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하는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 그러니까 ‘내일’에 속한 사람을 기다리면서 몸과 마음이 지금 여기에 착실(着實)하면 그 기다림이 그를 살아 있게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다가 몸이든 마음이든 지금 여기를 떠나게 되면 삶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시므온과 안나가 메시아를 찾아 예루살렘을 떠났다면 그들은 끝내 아기 예수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기다림이란 그런 것이다. 지금 여기를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기다림이다. 그러기에 제대로 된 기다림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오늘’을 착실히 살도록 작용하지만 잘못된 기다림은 ‘오늘’을 떠나서 있지도 않은 ‘내일’을 헤매게 함으로써 삶 자체를 무너뜨린다. 시므온이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성령의 약속을 믿고 날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메시아를 제대로 기다렸다는 반증이다. 안나도 마찬가지다.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로써 섬겼다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니고 하루하루 자신의 삶을 착실히 살았다는 얘기다.”(이현주, 「기다림의 행복」) 깨어 있다는 것은 지금 자기가 무엇을 왜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렇게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면서도 태산처럼 뿌리깊은 습기 때문에 어쩌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로마 8,15) 그래서 예수님은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나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