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집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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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04-19 ㅣ No.4778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어느 집배원 이야기

 

편지는 참으로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섭섭한 마음을 사르르 녹아 내리게 만들고, 사랑하는

마음을 더욱 뜨겁게 만들고, 와로운 마음을 가만가만

달래 주니까요.

물론 전화나 이메일도 그렇긴 합니다만 편지를 받았을

때의 설렘과 펼쳐 읽을 때 느껴지는 따스한 정감에 견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건 아마도 편지라는 게 글은

손으로 직접 또박또박 쓰고, 우표를 붙이고, 우편함에

넣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정성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기에 그렇겠지요.

그런데 요즘은 편지를 보기가 드뭅니다.

집배원들의 가방에도 편지보다는 온갖 청구서와 고지서,

알림장 같은것들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여기 편지를 쓰던 그 정성을 헤아리는 집배원이

있습니다.

강원도 평창군에서도 최고로 악명 높은 산골 마을들에

우편배달을 하는 윤산옥 님(48세)이 바로 그 사람입니

다.

그녀가 이 곳에 우편 배달을 시작한 건 8년 전입니다.

워낙 길이 험한 오지에 배달을 하다 보니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오토바이 타는 것도 포기하고, 두 발로

걸어 다니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힘든 곳을 자청하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게다가 힘들여 가 봤자 좋은 소리는 커녕 고생했다고

물을 떠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산 속에 살면서 외로운 노인들이 방문도 마음의 문도

꽁꽁 닫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에 좋은 사람이 어디 있어? 텔레비젼에

나오는 것 좀봐 봐. 돈 안 준다고 어미고 아비고 때려

잡잖아. 나쁜 놈들."

그래서 그녀가 그 곳을 맡기 전에는 말도 탈도 많았습

니다. 하지만 그녀가 맡고 난 이후로는 단 한 건의 민원

도 들어온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는 그녀의 배달 가방을 보면 바로 드러납니다.

가방 안에는 배달할 편지와 갖가지 고지서 외에도 호미,

파 한단, 배터리등 낯선 물건들이 한가득 들어 있습니다.

"노인 분들이 힘들어서 나오기가 힘들잖아요. 그래서

제가 대신 시장 심부름을 해 드리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그녀의 가방은 늘 무겁습니다.

그러나 오지 마을에서 외롭게 사는 노인분들이 남 같지

않고 부모님 같다는 그녀는 그 일을 자청해서 합니다.

때론 생활 형편이 너무 어려운 분들에게는 무료로 사다

드리기도 합니다. 게다가 우편 배달을 나갔다가 가방을

제쳐놓고 청소를 해주고, 빨래감을 거둬다 다음 배달 때

갖다 주기도 합니다.

고지서에 얼마나 찍혀 나왔는지도 모르는 노인들에게

일일이 가르쳐 주는 것도 그녀의 몫입니다.

그처럼 마을의 궂은 일을도맡아 하다 보니 어느새 그녀는

할아버지들에게는 ’딸’이라고, 할머니 들에게는

’며느리’라고 불립니다.

외로운 이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어느새 그들과 가족이

되어 버린 집배원 윤산옥 님.

그러니 우체국에 우편 배달이 잘못되었다느니, 안 왔다

느니 하는 민원이 들어 올 턱이 있겠습니까.

남편은 그녀에게 사서 고생한다며 가끔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말들에 동요될 그녀가 아닙니다.

오히려 윤산옥 님은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발

걸음을 재촉하기 바쁩니다.

 

오늘은 초등학교 2학년인 한 아이의 엄마 노릇까지 하려

합니다.

엄마가 있긴 한데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서 시장도 못

나가고 전혀 바깥 출입을 못합니다. 그래서 며칠 뒤

소풍을 가야 하는 데 챙겨 줄 사람이 없습니다.

"학교 갔다 왔어? 오늘 빨리 끝났네."

또래보다 키가 작은 그 아이는 소풍에 대한 기대는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과자와 새 옷을 받아 들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녀가 유독 그 아이에게 신경을 쓰는 것은 자신의

아픈 과거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 잘 배우지도 못했을 뿐

더러 일찍 어머니를 잃어 정에 굶주렸습니다.

그래서 일찍 결혼했지만 남편이 그만 ’뇌낙농충’이란

몹쓸 병에 걸리는 바람에 그녀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집배원 일을 하기 전까지 보따리 장사를 시작으로

벽돌 쌓기, 식당 일, 파출부 등 안해 본 일이 없습

니다.

그런 그녀에게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은 결코 남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더 그들이 걸어 잠근 마음의

빗장을 열어 아픈 마음의 자리에 따뜻함을 채워

주고 싶다는 그녀입니다.

산을 깎아 길을 만들어 이젠 못 하는 곳 없는 세상.

하지만 사람들 마음속으로 가는 길은 그녀가 우편

배달을 가는 길 만큼이나 점점 험해집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길이 아무리 험해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도 윤산옥 님은 마음의 문 을 똑똑 두드립니다.

 

"계세요? 편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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