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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1일 성 바르나바 사도♬gloria-monastic ch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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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6-10 ㅣ No.1218

 

San Barnaba Altarpiece (Madonna Enthroned with Saints)-BOTTICELLI, Sandro

1490 Tempera on wood, 268 x 280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축일: 6월 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St. Barnabas, Ap

AD 63년경 순교 키프로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훌륭한 사람"(사도 10,24)으로 극찬받은 바르나바는, 비록 그가 예수님의 직제자인 12사도에 들지는 않았어도, 사도로서 인정을 받았다.

바오로와 함께 전도 여행을 하는 등 초대 교회에서 사도의 주요 임무인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의 역할을 한 연유로 사도라고 말하곤 한다.

 

그는 원래 키프러스섬의 레위족 태생으로 요셉(사도4,36)이라 하였는데, 유대교에서 개종한 뒤에 자기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봉헌하였다.

이때 사도들이 그에게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바르나바란 이름은 ’위로의 아들’(격려자)이란 뜻입니다.

 

’격려한다’는 말은 희망을 준다는 뜻이다. 희망이 없는 세상에 희망을 준다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까? 희망은 복음이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 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로마 5,3-5)

그리스도교의 세 가지 덕행인 믿음, 희망, 사랑 중에서 희망은 우리의 현실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희망의 본질은 신뢰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감추어졌던 모든 것이 드러나면 희망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나 그 날이 오기까지는 로버트 브라우닝이 말한 것처럼 "종달새가 날며, 달팽이가 덩굴 위를 오르고,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는 한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다."라고 희망을 노래할 일이다.  

 

그는 크리스챤으로 개종한 초기 신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공동체에서 살았다.

그는 그곳의 공동체를 설득하여 바울로를 제자로 받아들이게 하였으며, 과거의 박해자와 아직도 의심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일종의 중개자로서 활동했다.

 

안티오키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바울로 사도의 동료로서 그의 제1차 전교 여행에 동행하였으며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안티오키아에서 발전하자 바르나바는 그들을 같은 양우리 안으로 끌어 들이기 위하여 예루살렘 모교회의 공식적인 대표로서 파견되었다.

이들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로 보였던 것이 분명하다.그들의 노력은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다. 리스트라의 기적 이후에 사람들은 신과 같이-바르나바는 제우스신이고 바오로는 헤르메스 라고 함-그들에게 제물을 바치려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여 여러분이 이런 헛된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려 왔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어떤 도시에서는 그들을 추방하였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되풀이 되는 할례에 관한 이단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야 했다. 또한 가장 좋은 친구였던 둘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 바오로가 그들이 복음을 전한 곳을 다시 방문하고 싶어했을 때,바르나바는 자기의 사촌이며 복음 사가인 마르코(골로4,10)를 데리고 가려했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가고 바오로는 실라를 데리고 시리아로 갔다.

유대인 예식 준수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을 때 바울로와 바르나바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회의에 참석하고, 그들의 활동 보고를 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바르나바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서 전교하였고, 키프로스 교회의 창설자로 인정받으며, 61년경에 키프로스 섬의 살라미스에서 돌을 맞고 순교하였다.

위경인 바르나바의 편지가 그에게 헌정되었으나, 현대의 학자들은 70년과 100년 사이 알렉산드리아의 신자들에게 보내진 것으로 보고있다. 바르나바의 복음서는 이탈리아의 어느 크리스챤이 기록한 듯하고, 바르나바의 행전은 요한 마르코의 업적일 것이다. ’바르나바의 편지’와 ’바르나바의 복음서’는 그의 이름으로 헌정된 것이지만 위경으로 분류된다.

7세기 로마 미사경본에도 그의 이름이 보이고, 9세기 이후 축일표에는 6월11일에 그의 이름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바르나바는 자신의 생활을 주님께 바친 사람으로 간단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그는 ’성령과 믿음으로 가득 찬’사람이었으며 그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다’고 한다.그와 바오로가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추방되었을 때에도 그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있었다.

 

바르나바는 대단히 청빈하고 목가적인 예루살렘 교회의 너그러운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그 이름이 언급되었다."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그들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앞에서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 사람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인 바르나바라고 불리는 요셉도 자기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바쳤다."(사도 4,32-37)

 

 

 

 

성 바르나바는 본래 요셉이라는 이름이었으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후부터는 동료에게 바르나바(’웅변가’라는 뜻)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키프로스 섬 출신으로서 유다교를 신봉했으나 신앙을 굳건히 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신전에서 참배하고 있을 때 우연히 예수의 설교를 듣고 매우 감동하여 드디어는 개종을 하고 27인의 제자 중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더불어 성령 강림에 참여하고 그 성스러운 은혜를 받았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실로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다. 그들은 자기의 재산을 공동의 것으로 만들고 상호 기도와 선행에 온 힘을 기울였다.

바르나바도 전부터 밭 하나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팔아 형제자매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대금을 사도들에게 제공했다.

 

그러던 중에 전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사울이 다마스커스에서 회개의 은혜를 받고 베드로를 만나러 예루살렘에 왔을 때 그의 옛 행적이 바르지 못했던 터라 아무도 그를 상대 안했지만 바르나바는 그를 신용하며 정성껏 접대하고 신자의 집회 등에도 데리고 가서 그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로 인해 그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름다운 우정이 깃들게 되었다.

 

안티오키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상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자, 사도들은 바르나바를 그들의 목자로 임명했다. 그래서 그가 즉시 부임해 본 결과 신자의 수가 예상보다 많아 혼자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바르나바는 다르소에 돌아온 사울의 힘을 빌리려고 그를 초대해 같이 신자의 지도와 교세의 발전에 진력하기를 1년, 예루살렘이 대기근(大饑饉)이란 말을 듣고 구제를 위한 기부금을 모집하고 사울과 같이 이를 가지고 그곳으로 급히 갔다.

 

다시 안티오키아에 돌아와 얼마 안 되어서의 일이다. 그들이 수명의 예언자와 교사와 같이 단식재를 지키며 미사 성제를 봉헌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예언자의 입을 빌어 말씀하시기를 바르나바와 사울을 각국에 선교사로 파견하라는 것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다시 단식과 기도로써 마음의 준비를 하고 축복을 받아 주교가 되어 선교사로서 그 곳을 향해 출발했다.

이때에 바르나바의 사촌으로서 요한 마르코도 행동을 같이 했다.

 

그들은 우선 바르나바의 출생지인 키프로스 섬을 방문해 설교로서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도 그 섬의 총독 셀지오 바오로를 회개시키고 나서 소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복음을 널리 전하는 등 곳곳에서 풍부한 수확을 거둘 수가 있었다. 이것이 바르나바와 사울 두 성인의 유명한 제 1회의 전도여행이다.

그들이 얼마나 우상교도로부터 그 인격을 칭찬받고 공경받았는가는 리스트라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읍에서 설교를 한 후 사울, 즉 바오로가 태어나면서부터 불구였던 앉은뱅이를 낫게 해 주자 사람들은 이를 보고 소리 지르기를 "저 사람들은 사람 모양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온 신들이다"(사도 13,11)하며 바르나바를 모든 신의 두목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말 잘하는 귀신 헤르메스라 부르며 이를 신관(神官)에게 알리어 많은 황소와 화관을 가지고 와서 두 사람에게 제사를 바치려고 했다.

이를 본 그들의 놀람은 어떠했을 것인가? 그들은 비통헤 싸인 나머지 자기 옷을 찢고 일심으로 상대의 오해를 풀어 올바르게 되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일단 아티오키아에 돌아오자 잠시 휴양하고 오로지 기도로써 다음의 전도여행을 준비했다.

그 때 마침 유다교에서 개종한 사람과 이교에서 개종한 사람간에 여러 문제가 일어나 두 사도는 같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공의회에 참석하고 교황 성 베드로에게 판정을 받았다.

 

전에 전교했던 곳의 교세를 시찰차 제2회 전도여행에 출발하려던 때였다. 바르나바는 이번에도 사촌인 요한 마르코를 동반하고자 했으나 바오로는 요한이 저번 여행에서 도중에 돌아와 충분히 전교에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이에 반대해 여기서 서로 의견이 달라져 각자 자기 행동을 취하게 되어 바르나바는 요한과 함께 키프로스 섬에 가서 결국 그 지방에 머무르면서 신자들을 도우며 세월을 보냈다. 그 뒤 그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의 밀라노까지 전교하러 갔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또한 그의 임종 시기도 63년부터 76년 사이라고 짐작되나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키프로스 섬의 사라미스에서 돌로 얻어맞아 순교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전승에 의하면 485년 제노 황제 시대에 그 지방에서 그의 무덤이 발견되어 이를 열자 자기 가슴위에 손수 기록한 마태오 복음의 사본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성 크로마티우스 주교의 [마태오 복음 주해]에서

(Tract. 5,1.3-4: CCL 9,405-407)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마귀가 어리석게 만든 사람들의 마음에 천상 지혜를 통하여 제 맛을 찾아 주었기 때문에 제자들을 보고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이 참되고 영원한 빛이신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들 스스로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빛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친히 정의의 태양이십니다. 주님은 찬란한 광채가 퍼져 나가듯이 제자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진리의 빛을 보여 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서 오류의 어둠을 몰아냈습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로 말미암아 빛을 받아, 바울로사도의 말씀대로, 이전에는어둠이었으나 이제 빛이 되었습니다."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 요한도 자신의 첫째 편지에서 "하느님은 빛"이시라고 말할 때하느님 자신이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하느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누구나 빛 가운데 있다고 적절히 증언해 줍니다. 따라서 오류의 어둠에서 해방된 것을 기뻐하는 우리는 빛의 자녀답게 항상 빛 안에서 거닐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빛을 내고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키십시오."라고 사도 바울로는 권고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생활에 그렇게도 유익하고 필요한 빛을 우리 불충성의 너울로 감추어 어둡게 해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그 빛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쓸모 없는 빛이 되어 모두 해를 입을 것입니다. 천상의 사업을 하려고 한 달란트를 받아 가지고 투자하여 이자를 얻기보다는 땅

속에 감추고 싶어한 사람은 응당한 벌을 받았다고 우리는 성서를 읽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함께 받은 찬란한 빛은 언제나 우리안에서 빛나야 합니다. 다윗이 말하는 대로 우리는 천상 계명과 영적 은총이라는 등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법은 내 발의 등불,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 솔로몬도 이 빛에 대하여 "주님의계명은 등불이오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율법과 신앙의 등불을 감추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의 구원이 되고 우리 자신도 진리의 빛으로 위한을 누리며 모든 믿는 이들이 그 빛을 받을 수 있도록, 언제나 교회 안에 곧 등경 위에 올려 놓아야 합니다.

 

 

 

 

♬gloria-monastic chants-christdesert(Bened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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