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6월19일 성 로무알도 아빠스♬5,agnus dei-monastic ch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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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6-18 ㅣ No.1230

 

축일: 6월 19일

성 로무알도 아빠스

St. Romualdus, Abbas

(950 ? -1027년) 창설자 이탈리아

 

로무알도는 950년경 이탈리아 라벤나의 오네스띠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양친의 생활은 비그리스도교적이어서 아들 로무알도도 부모와 같이 무질서한 생활을 했으나 신앙만은 여전히 보존하고 있었다.

그는 종종 말을 타고 인기척 없는 고요한 곳에 가서 교회에 위반되지 않은 생활을 하고 싶다든가 혹은 성인과 같은 완덕의 생활을 하고 싶다든가 하는 충동을 받은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 타락한 구덩이에서 여간해서는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무서운 사건이 일어났고, 그 기회에 하느님의 은총은 그의 회개를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건이란 것은 그의 부친 세르키오가 사소한 일로 친척 한 사람과 불목이 되어 결국 결투로서 그를 찔러 죽인 일이다.

그때 청년이었던 로무알도는 동반인으로 부친과 같이 가게 되어 상대자의 비참한 죽음을 보자 마음 깊이 충격을 받고  클라세의 산 아폴리나레 수도원에 가서 40일간 살인죄를 범한 부친과 그리고 그곳에 참석한 자기를 위해 속죄의 고행을 하기 시작했다.

 

속죄가 끝나 마음이 진정된 후 로무알도는 다시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가려고 하니 한 수사는 그를 온전히 회개시키려는 결심을 하고 열심히 수도원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는 들으려 하지 않으므로 그 수사는 마지막으로 "그러면 우리의 교회의 보호자인 성 아폴리나리오를 만나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좋습니다. 그와 같이 하면 수사가 되리다." 하고 약속했다.

 

그 날 밤 로무알도는 수사에게 인도되어 교회에 갔다. 그리고 기도하고 있으려니까 과연 성인이 발현하셔서 몇 개나 되는 제대를 하나 하나 돌아본 후 다시 자기 무덤으로 사라졌다.

다음 날 밤도, 그 다음 날 밤도 똑같았다. 이와 같이 하여 로무알도는 완전히 개심하고 수도원에 들어갈 것을 결심하게 되엇다.

 

수도원에 들어갈 때 그는 겨우 21세였지만 처음부터 모든 일을 정성껏 행하며 특히 기도와 극기를 좋아햇다.

그러나 이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그리 열심하지 않았으므로 로무알도는 여러 차례 이를 충고하였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그를 미워하게 되고 그 중에는 그를 죽이려고 한 사람까지도 있었다.

다행히 하느님의 보호로 그는 더욱 엄격한 생활을 하려고 스스로 자원하여 그 수도원을 떠나 베니스 교외에 살던 마리노라 부르는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

 

978년경, 베니스 공화국 총독 베드로 오르세올로는 마리노와 로무알도를 꾹사로 데리고 와서 베네딕띤이 되게 하자, 이들은 수도원 가까운 곳에 은둔소를 짓고,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은수자로 살았다.그 후 그는 부친이 회개하여 수도자가 되었음을 알고 만나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갔으며, 이때 오토 3세 황제는 그를 산 아폴리나레의 원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2년 뒤에 사임하고는 페레움 교외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 당시 타락한 생활을 하던 많은 수도자들을 거슬러 용감히 투쟁하였고 덕행을 실천함으로써 완덕의 길로 정진하였다.

그는 그 후 30년간을 수도원과 은수자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온 이탈리아를 돌아다녔다.  여러 개의 작은 수도원을 세웠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순교로써 자신의 생명을 그리스도께 바치기를 갈망한 그는 교황의 허락을 받아 헝가리에 복음을 전하러 갔다.

그러나 그는 도착하자마자 병에 걸렸으며 그 병은 그가 선교 활동을 하려고 애를 쓸 때마다 재발하였고,헝가리의 마지아르족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강제로 쫓겨나기도 하였다.

또 어떤 때는 지독한 영적 무미 건조함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시편 23편 "나는 너를 가르쳐 네 갈길을 배우게 하고 너를 눈여겨보며 이끌어 주리라."(8절)는 구절을 읽으며 기도하던 중

놀라운 빛과 영감을 얻게 되었는데 이것은 평생 그를 떠나지 않았다.

 

또한 그에게 위로가 된 것은 수명의 제자들의 열심한 생활이었다.

그 중에서도 후에 러시아에서 전교하다가 순교한 보니파시오와, 헝가리에서 전교하다가 동시에 순교한 요한과 베네딕토 이 3인은 특별히 뛰어났다.

보니파시오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로무알도는 그곳으로 급히 가려고까지 생각햇으나 그때 마침 중병으로 누워 있었으므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성 보니파시오boniface(축일:6월19일)1009년.주교,순교. 케르푸르트

 

색손의 귀족 가문 출신인 그는 게르마니아의 케르푸르트에서 태어나, 브루노라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막데부르그에서 공부하여, 오토 3세의 궁중으로 들어가, 궁중 사제가 되었으며, 998년에는 황제의 수행원으로서 로마로 갔다. 여기서 그는 까말돌리 수도자가 되었으며, 이때 그의 이름을 보니파시오로 하였다.

 

다음 해에 그는 오토가 세운 페레움 수도원에 갔는데, 그곳의 두 수도자인 베네딕또와 요한, 그리고 3명의 동료들이 1003년에 순교하게 되므로써, 그는 게르마니아 선교길에 올랐다. 후일, 그는 선교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아갸르족들에게 설교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키에브까지 가서 그곳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프러씨아인들을 복음화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수행하다가, 자신과 18명의 동료들이 폴란드의 브라운스베르그 근교에서 러시아인들로부터 학살당하였다.

그는 또한 "케르 푸르트의 브루노." 또는 "프러씨아 제 2의 사도"라고 흔히 불린다.

 

로무알도는 시도리오 산상에도 한 수도원을 설립했는데 그곳에 방탕한 생활을 한 귀족 출신의 한 청년이 들어왓다.

이 청년은 회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스스의 권면과 책망에 대해 원망하며 로무알도도 자기와 같이 남몰래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없는 사실을 들어 나쁜 소문을 퍼뜨렸다. 놀랍게도 그의 동료 수사들은 그 고발을 사실로 믿고 대노하여 로무알도를 교수형에 처하든가 혹은 그의 초막을 태워버리든가 하라고 모두 흥분했다.

그는 엄격한 참회 행위를 해야 했고 미사를 드리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공동체에서 격리되었다.

로무알도는 묵묵히 그러 수치를 인내하며 이에 순종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하느님 친히 발현하셔서 미사를 지내라고 까지 하셨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에게는 수도원 생활이 너무 엄격했음이지 오래지 않아서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려고 햇다. 그것을 안 로무알도는 급히 이탈리아의 아버지에게 돌아와 정성을 다해 위로하고 권면하여 인내로써 수도원에 머무를 것을 간곡히 애원했다. 부친도 그의 말에 순응하여 세속에 돌아갈 것을 단념하고 수도 생활을 계속하다가 오래지 않아 선종했다고 한다.

 

그가 세운 수도원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토스카나에 있는 카말돌리(주인의 이름인 Campus Maldoli를 따서)수도원이다.

로무알도는 어떤 부자에게서 한적한 토지를 기부 받아 그곳에 제자들을 위한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공동체와 은수 생활을 결합시켜 카말돌리의 베네딕토 수도회를 세웠다.이 수도원은 오늘날까지 계속 그 엄격한 생활양식을 지켜오고 있다.

 

그는 나이가 많아 임종이 가까운 줄을 알았다. 그래서 하루는 홀로 있고 싶다며 수도자들을 모두 내보냈다.

평소 고독을 즐겼던 그는 임종 때에도 하느님과 홀로 임종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그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제자들이 방에 가서 보니 스승은 이미 고요히 임종한 상태였다고 한다.

1027년 6월 19일 파비아노 교외의 발디 까스뜨로에서 서거했다.

 

 

성 로무알도의 일생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무한하다는 것과 죄인이라 해도 진실로 통회하고

은총의 인도하심에 잘 따른다면 얼마든지 완덕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표시해 주는 좋은 예이다.

 

그리스도는 훌륭한 지도자로서 우리를 완전한 성덕으로 부르신다.

지금 이 순간 남자와 여자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절대적인 헌신과 활력에 넘치는 영성, 철저한 회개에 도전하라고 촉구한다.

우리가 그들의 생활을 본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특수한 상황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개방하라는 그 부르심에로 돌아서지 않기 때문이다.

 

로무알도가 살고 있던 수도원에 폴란드의 한 공작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대신하여 멋진 말 한 필을 로무알도에게 선사했다.

그러나 로무알도는 그 말을 나귀와 바꾸더니 자기는 나귀에 타는 것이 그리스도와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성 베드로 다미아노가 쓴 [성 로무알도의 생애]에서

(Cap. 31 et 69: PL 144, 982-983. 1005-1006)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자기를 버렸다

 

로무알도는 파렌초시 근처에서 3년간 살았다. 첫해에 수도원을 세우고 아빠스를 두는 공동체를 설립했다. 남은 2년동안 은수 생활을 했다.

여기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그를 높은 완덕의 경지로 올려 성령의 감도하에 미래에 생길 여러가지 일들을 예견하고 지성의 빛으로써 신구약의 많은 숨은 신비들을 깊히 파고 들어갔다. 그는 자주 하느님을 관상하는 중에 탈혼에 빠져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느님께 대한 표현할 수 없는 불타는 열정으로 여러가지 짧은 기도를 부르짖곤 했다.

 

"사랑하는 예수여, 꿀보다 더 달콤한 주님이시여, 표현할 수 없는 나의 갈망이시여,성인들의 기쁨이시여, 천사들의 즐거움이이여."

성령의 감도를 받아 순수한 기쁨 가운데 그가 부르짖는 애원은 우리 인간의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성인은 어디에 거처하려 할 때마다 자기 방에다 제대와 함께 작은 기도소를 만들고 두문 불출하면서 아무도 거기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여러 은수처에서 거처한 후 이제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발디카스트로에 세웠던 수도원으로 되돌아갔다.

그 곳에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아무 두려움 없이 기다리는 동안 작은 기도소가 딸린 방을 따로 만들고서 거기에 들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자 했다.

 

은수처가 만들어져 그 곳에 들어가 은거하려 할 때, 그는 점점 심해지는 육신의 고통으로 괴로움 당하기 시작하고 병으로 인한 것보다는 연로한 탓으로 기력이 쇠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모든 기력을 잃고 고통이 더욱 심해지며 호흡이 가빠졌다.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할 때, 함께 있던 두 형제를 보고 밖으로 나가 방문을 닫으라고 말한 후 새벽에 아침기도를 바치려 갈 때 다시 들리도록 했다. 형제들은 마지 못해 나가기는 나갔지만 성인의 병세가 걱정이 되어 잠자리로 들지 않고 그들의 스승이 갑자기 세상을 떠날까 염려하여 몰래 방 가까이에서 지켜 보았다.

 

얼마동안 거기에 숨어 있은 후 문에다 귀를 기울여 들어 보았으나 몸이 움직이는 소리도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으므로 성인께 죽음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문을 열어 젖히고 급히 뛰어들어갔다. 불을 켰을 때 이미 그의 복된 영혼은 천상으로 이끌려 올라간 채 누워 있는 거룩한 시신을 보게 되었다.

이 진주는 이제 위대한 임금님의 궁전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채우고 있다.

 

 

 

 

♬5,agnus dei - monastic chants-christdesert(Benedict)

 

★아빠스’란 무슨 뜻인가? 게시판945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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