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음동성당 게시판

* 기초(11/19) *

인쇄

박국길 [fcan]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3768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2004-11-19)

독서 : 묵시 10,8-11 복음 : 루가 19,45-48

*  기초 *

그때에 예수께서 성전 뜰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시며“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 하고 나무라셨다. 예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는데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잡아 죽일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듣느라고 그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루가 19,45-­48)

강원도 홍천 근처에 수도원을 지었다. 돈이 없어서 수사님들도 잡부 노릇을 해야만 했다. 먼저 바닥을 다지기 위해서 꽤 크고 무거운 돌들을 수도 없이 주워서 채웠다. 길이 좁아 큰 차가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며칠 동안 손으로 일일이 날라와 쌓아놓고는 마음 뿌듯해하기도 했는데 콘크리트로 그 돌들을 덮으면서 그동안의 수고와 땀이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구나 하며 서로 서운해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공사가 10여년 동안 계속되었다. 감사드려야 할 일은 그동안 산길을 오르던 차가 뒤집히거나 하는 사고의 위험도 많았지만 우리 형제들 누구도 심한 부상을 입거나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기쁨도 있었고 힘겨울 때도 있었다. 집을 짓는 과정도 어려웠지만 함께 일하면서 부딪치는 상처도 컸다. 어떤 이는 공사 과정에서 형제들과 마음을 상해서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까지 말하기도 하였다. 오랜 공사 끝에 마침내 제법 번듯한 집이 세워졌다.
수도원을 수도원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설계의 아름다움이나 공사의 완벽함도 필요하겠지만 서로에 대한 오해와 갈등, 화해와 용서, 기도와 사랑 역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이 한데 뭉쳐 기초 바닥에 들어간 호박돌처럼 집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오해와 갈등이 있었기에 화해와 용서가 더욱 절실히 다가왔고 사랑이 자라났다. 수도원은 벽돌과 콘크리트만으로 지어진 게 아니라 우리의 눈물과 한숨, 분노와 짜증 그리고 기쁨과 감사가 벽과 바닥에 고스란히 배어들어 살아 있는 우리 삶의 표지가 되었다.
하느님의 집이 되느냐, 강도들의 소굴이 되느냐 하는 것은 집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마음으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 가정의 기초는 무엇인가? 눈물과 한숨과 기쁨을 고스란히 안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수도원은 여전히 서 있다.

이정호 신부(구속주회)

-  아름다운 추억 -

이 세상에 나 혼자뿐
엉망인 외톨이라고 생각했을 때
너는 두 손을 꼭 잡아주며
우정이라는 약속을 지켜주었다.
친구야
그땐 부모보다도 네가 더 고마웠지.
모든 것이 무너진 곳에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웠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고
하나하나 새롭게 시작해 주었다.
그때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어떨까?
그때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어떨까?
자꾸만 자꾸만 달아나고만 싶던 그날
나와 함께 한없이 걸어주며
내 가슴에 우정을 따뜻하게 수놓았지.
그날 너는 나의 가슴에 날아온 천사였다.
나의 친구야
아름다운 추억의 주인공은 바로 너였다

- 용혜원의 詩중에서 -


님을 초대합니다

† 【 안나의 묵상나누기 】 †

+ 내가 성전이기에... +

주일날 교회 밖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울고 서 있는 흑인이 있었습니다.
환시중에 예수님께서 그 형제에게 나타나셔서 '왜 울고 서 있느냐?'

흑인은 말했습니다. '이사온지 얼마 안되어 예배를 드리러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데 제 피부색이 검다고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흑인형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만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나도 지금 못들어가고 있단다'

켄터키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짧은 이야기지만 많은 생각들이
스치며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야고보서 2,1-4]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가령 여러분의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왔다고 합시다.

그 때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며 "여기 윗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거기 서 있든지 밑바닥에 앉든지 하시오."
하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불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면 신교 신자들이 앗!나에게 돌맹이를
던질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냅니다. 1994년에 유럽베낭여행을
하기 전 몇 년동안 앗!제가 머물었던 신교 안에서 풀풀나는 썩은
냄새가 성전 안에 진동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라는 것이 사유재산인양...당신의 이름으로 명의가 되어 있
으니 나갈 사람은 나가라는 것입니다.또 어느 분은 당신의 개인
재산으로서 당신의 집이기에 신자가 와도 괜찮고,아니와도 괜찮
은 것입니다.하나 더 예를 든다면...주님의 양떼를 먹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양떼랄까, 당신의 고객을 모시고 있습니다.

[마태오 6,3-4]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
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말씀은 이렇게 가르치고, 교회안에서의 움직여지는 모든 행사들
은 다릅니다. 헌금을 한 사람들의 명단과 액수가 번듯이 주보에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하라는 것입니까! 가난한형제
들도 그리 내라는 것인지...아니면! 자랑을 하고 싶은 것인지..
점점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눈에 보였습니다.

켄터키에서의 일어난 일은 흑인과 백인의 문제였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흑백의 문제가 아니라 유전유무로 인한 차별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그런 차별을 받고 있지는 않나요.

베낭여행을 통해서 천주교로 개종(?)할 수 있는 삶의 커다란 획
이 하나 그어졌지만 워낙 어두운 영혼이기에 3년이란 긴긴 세월
을 거쳐서 1997년에 예비자 교리반에 입교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주교안에서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밖에서 바
라볼 때는 너무나 완벽주의자(?)들 같았고 딱딱해보였지만../그
안에는 상당히 자유분방한 모습들이 많았습니다.

일단,성가대에 봉사하는 것에도 '세례를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없었으며, 십일조라는 거액(!)을 바치지 않아도~
부담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교무금이라는 것이 있지만,/액수로
따지자면 십일조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봉헌할 때보면 천원짜리 지폐가 더 많이 보입니다. '천원짜리는
구교신자들을 위해서, 만원짜리는 신교신자들을 위해서, 십만원
짜리 자기앞수표는 불교신자들을 위해서..'라는 말이 있습디다.

제가 다녔던 성당은 주보에 금액과 봉헌한 교우들의 명단이 올라
온적이 없었습니다.더구나 반 모임에서 있었던 일은 신선한 충격
이었습니다. 반모임에서 가장 가난한 이를 기준으로 해서 회비가
정해진다는 것입니다.또 어느 집에서 너무 거나하게 음식을 대접
하면 다른 이가 부담이 될까봐서 서로가 절제를 한다더군요.*^^*

천주교로 입교해서 교우들의 신앙생활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나는
탁월한 선택을 했노라고 긍지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동료
들에게 주님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하나씩 비교해서 말했습니다.
제가 신교 안에서 머물 때보다 짧은 시간안에 많은이들에게 전교
할 수 있었던 것은 보여진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언제나 가난한 이웃을 도우려는 모습이 진지했습니다. 북한 땅에
있는 동포들에게 쌀 한 줌 보내기 운동은 참으로 눈물겨웠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한 수저들이 모여서 한 항아리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앗! 나가 제일 가난하다고 생각하였기에 남을 돕는다는
것은 우선 머리속에서만 맴맴돌았습니다.그러나 '신앙생활이 곧
나눔'
이라는 것을 하나씩 배워가기 시작했습니다.

하하, [안나]가 세상에서 가장 부자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눌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그것을 일깨워준 것은 주임신부님의 강론
과 바로 『야곱의 우물』이라는 책속에 들어있는 매일성서묵상
내용의 살아가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집이 되느냐, 강도들의 소굴이 되느냐 하는 것은
집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어떤 마음으로 그 안에
서 살아가는지에 달려 있다.


오늘 묵상글에서 신부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모이는 성전!/성당을
하느님의 집으로 만드느냐../ 강도들의 소굴이 되느냐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성전
안에서 미사를 드리는지, 봉사를 하는지...우리의 살아가는 모습
이 바로 성전을 거룩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1고린3,17]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또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씀
하신 주님께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되는 것은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며
앗! 나 (우리)가 바로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라는 명목이 없을 뿐이지 십일조 이상으로 가난한 이웃을
도와가며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어느 한 부분을 드리
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드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도 성전이 되기를 두려워하지않고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어느 성당에 앉아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길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차 안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어느 곳에서나 기도
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루가 19.46]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주님의 말씀이 나즈막히 들립니다. 성전 안에서도 기도하지만...
삶으로 기도합니다. '삶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전이기에...

두서없는 글을 날마다 읽어주시는 벗 님들께 감사드리는...



안나가요*^^*

 


8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