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음동성당 게시판

* 비유의 인생(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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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국길 [fcan]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3771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2004-11-20)

독서 : 묵시 11,4-12 복음 : 루가 20,27-40

*  비유의 인생 *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 몇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정해준 법에는 형이 결혼했다가 자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칠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내를 얻어 살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둘째가 형수와 살고 다음에 셋째가 또 형수와 살고 이렇게 하여 일곱 형제가 다 형수를 데리고 살았는데 모두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나중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이렇게 칠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었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죽는 일도 없다.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모세도 가시덤불 이야기에서 주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이것으로 모세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은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였고 감히 그 이상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루가 20,27-­40)

요즘 귀가 잘 안 들린다. 병원에 가 봤지만 특별한 이유없이 청력이 떨어지고 있단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도 하고 우스운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말소리는 어느 정도 들리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것이겠거니 하고 알아듣는다. 그야말로 불 가져오라면 물 가져가는 식이다. 우리는 무엇인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체험과 기억을 총동원해서 이리저리 조합해 보기도 하고, 어떤 이미지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기도 한다. 결국 내가 가진 것을 통해서 모르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아는 것을 통해서만 알게 된다. 그만큼 한계와 오류의 위험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와 부활을 결혼이라는 일상생활의 체험을 통해 이해하려고 한다. 우리의 일상을 통해 예견되는 결과를 보고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를 단정지으려고 한다. 조금이나마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 기억과 체험이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결코 그것이 하느님을 모두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우리가 알고 만나는 하느님은 늘 한편에 여백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현실 안에 ‘깃들어 있고’, ‘배어 있는’ 하느님의 신비 가운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이다. 현실에서나 죽음 이후에도 변함없고 끊임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확신시켜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부활이요, 부활을 통해 살아 있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우리의 인생은 하느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살아가는 비유다. 탄생에서부터 죽음에까지, 아니 그후에도 우리가 겪는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환희, 고통과 괴로움의 경험을 통해 하느님은 당신 사랑을 비춰 보이신다.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배우기 위해 오늘도 비유의 삶을 산다.

이정호 신부(구속주회)

-  봄 꽃 피던 날 -

겨우내내 무엇을 속삭였기에
온 세상에 웃음꽃이 가득할까?

이 봄에 여인네들이
나물을 캐듯이
우리들의 사랑도 캘 수 있을까?

이 봄에
누군가가 까닭없이 그리워지는 듯해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 만나면
온 세상이 떠나가도록 웃어나 볼까나

이 봄엔 누구에게나 자랑하고픈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그대가 만약 끝내 사랑한다 말하지 않으면
그대 가슴에 꽃이라도 되어 피어나고 싶다.

- 용혜원의 詩중에서 -


님을 초대합니다

† 【 안나의 묵상나누기 】 †

+ 안나는 살아있는 者! +

우리의 인생은
하느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살아가는 비유다.


두 아들의 비유,포도원 소작인의 비유,혼인 잔치의 비유,등불의 비유,
무화과나무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자라나는 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겨자씨의 비유,가라지 비유...
앗!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신 예화들이 많습니다.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성서에서 해답을 찾아내기로 했습니다.*^^*

★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

[마태오 13,10-17]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일찍이,'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고,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리라.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
이니,그렇지만 읺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서서 마침내 나 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마르코 4,10-12]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열 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의 뜻을 물었다. 예수계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게해 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들려 준다.그것은 그들이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
보고 알아 듣기만 한다면 나에게 돌아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

[루가8,9-10]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예수께 묻자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게 해 주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하려고 비유로 말하는
것이다."

말씀을 찾아서 읽어내려가다보니...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말로다 표현 할 수 없는 감사가 내 안에 넘쳐 흐릅니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얼마나 감사한지요.../알아듣게 하시사 고침을 받게 하셨으며 거저 용서
받게 하셨으니 그저 '은혜로소이다'라는 말씀만이 입에서 나올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또 떠올랐습니다.

[1고린토서에서... ]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성서에도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 버리고 똑똑하다는 자들의 식견을 물리치리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
로운 경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이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
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
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이 세상 통치자들은 아무도 이 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에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
여 마련해 주셨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루 종일 타자로 쳐서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말씀들이 이어집니다만
묵상글로 돌아갑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서 장성하여 그가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그리고 또 아이를 낳아서 기를 때면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
하게 된다고 하더군요. 저는 안낳라서 그 마음 다 이해는 못하겠지만..
친정어머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성모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헤아립니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얼만큼 아느냐에 따라서 이해하는
깊이와 폭이 달라질 것입니다.하루의 삶을 열어가면서 모든 사건속에서
또는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아니면 순간순간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
이라 말씀하고 계시는지...무슨 비유로 이 사람을 만나게 하시며, 무슨
비유로 이 사건이, 이 어려움이, 이 기쁨과 슬픔이 놓여져있는지/ 靈眼
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빨리 이해하고 빨리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야곱의 우물』 편집부에서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법으로 지난 11월 7일에 올려주신 글을 다시 나눠봅니다.*^^*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부활에 관한 이 토론에서
모세의 말을 들어 호소하신다. 불타는 가시덤불의 이야기에서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출애 3,6)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더 깊은 의미로 이해하셨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선조들의 하느님으로 숭배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였다. 따라서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하느님을 숭배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느님은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조차도 살아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서 산다.오직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데 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이 목적을 위하여 살도록
부르신다. 사람들이 영원히 살기를 원하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어떻게 계속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죽음과 부활 중간시기의 삶이나 또는 인간의 불멸이
어디에 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삶이 어떻게 해서 죽음 이후까지 계속되는지에 관해서나 또는
부활에 관해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예수께서는 단지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살아 있다는 말씀만 하실
뿐이다.우리가 하느님을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이
다. 하느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참으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참으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다.
죽은 사람조차도 살아 있는 것이다.


살아있기에 오늘도 배웁니다. 산 자이기에 오늘도 느낍니다....
나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배우며
하느님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하느님 앞에서 살아 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신 하느님! 살아 있는 우리들의 하느님! 하느님! 하느님!
감.사.드.립.니.다...

앗!!! 나(우리)는 살아있다!고 외치는...



안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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