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한국의 103위 순교자(2)

인쇄

이경희 [jenya] 쪽지 캡슐

2000-09-09 ㅣ No.1960

 

4. 정국보 쁘로따시오, 상인(丁국보, 1799-1839), 옥사

 

정국보 쁘로따시오는 황해도 개성의 어느 양반 집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조부가 직무상 과실로 몰락하자, 부친은 가문과 신분을 숨긴 채 서울로 올라와서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정국보는 천성이 착하고 어질었는데, 나이 서른 살 때 입교하여 충실히 계명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유방제 신부는 홍살문 거리에 집을 마련하여 성사를 보기 위하여 서울로 모여드는 신자들의 숙박소를 관리토록 하였다. 그는 모든 요구들에게 한결같이 대하였고, 교우들의 일이라면 위험을 불사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지극히 가난하고 또한 병이 잦았지만 어려운 빛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는 열 네명의 자녀를 두었다가 어릴 때에 모두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뜻으로 한 마디도 원망의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고 달게 참아 받았다. 또한 성서 읽기를 즐겨하고 강론 듣기를 좋아하였다. 1839년 3월, 기해 박해의 선풍이 일어났다. 조선에 외국인 신부들이 있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져 신자들을 잡아 가두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아내와 같이 잡혀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박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되어 관리들의 감언이설과 유혹에 빠져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되었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자기 죄에 대하여  심한 가책을 느껴 침식을 잃은 채 울며 지내다가, 이웃에 사는 열심한 신자의 격려와 권고에 용기를 얻어 자수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형조의 문지기는 그가 찾아와 자기가 배교한 사실과 배교한 것을 취소하고 죽기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 "이 못난 놈아, 한번 말했으면 그만이지 못 들어간다"라고 호령하며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튿날 찾아가 다시 졸랐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흘째인 5월 12일에는 자신의 신병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들것에 실려 형조판서가 지나갈 길목에 지키고 앉아 기다렸다. 판서가 나오자 그는 길 한 가운데 엎드려 이렇게 말했다.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마음에 없는 말을 입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뉘우칩니다. 저는 천주교인입니다. 언제까지든지 그러하고자 합니다." 하고 애원하였다. 그래도 판서가 그냥 지나치려하자, 그가 하도 큰 소리로 부르짖고 애원함으로 판서는 귀찮게 여기고 그를 잡아 옥으로 끌고 가도록 명했다. 이리하여 그는 기쁘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형리들에게 끌려 옥으로 들어갔다. 갇혀 있던 다른 신자들이 그를 반가이 맞으며 "잘 했다"는 축하의 말을 하자 그의 기쁨은 한층 더 하였던 것이다. 그는 다시 불려 나가 치도곤 스물 다섯대를 맞았다. 이때 그는 장티푸스로 기력이 쇠한데다가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므로 옥에 돌아올 때는 이미 다 죽어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중인 1839년 5월 20일에 41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던 것이다. 어쨋든 그는 기해 박해의 첫 번째 순교자이다.

 

 

 

 

5. 이광헌 아우구스띠노, 회장(李光獻, 1787-1839), 참수

 

이광헌 아우구스띠노는 경기도 경주 이씨 집안 사람으로 양반대가의 후예이다. 그와 같은 해에 순교한 이광렬 요한은 동생이고, 권희 바르바라는 부인이며, 17세의 나이로 순교한 이 아가타는 딸이다. 그의 성격은 너그러웠고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지만 쾌락을 좋아하고 절제함이 부족하여 젊은 한때에는 유흥장에 드나들며 다소 방탕하게 살았다고 한다. 30세가 채 못되던 해에야 비로소 천주교에 입교하여 그의 부인 권희와 함께 입교하고, 크게 회개했던 성 아우구스띠노를 본받으려는 뜻으로 역시 본명을 아우구스띠노라고 하였다. 그는 과거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새 생활을 하던 중에 박해로 인하여 여러 차례 도망 다니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얼마 안되는 가산마저 탕진하였다. 그러나 참다운 참회정신으로 언제나 명랑하고 불평없이 살며, 냉담자들을 권면하고 외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에 있어 고생과 피로를 개의치 않았다. 그가 거처할 집조차 없게 되었을 때, 교우들은 서소문 밖에 고마창골에 집을 마련하여 공소집으로 사용하면서 집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때 그가 회장이 되었다. 그 당시 교회는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주막처럼 꾸미고 신자들이 모였는데, 1839년 4월 7일 사백주일에 어느 예비신자가 밀고하여 포졸들의 습격을 받았다. 긴 심문과 괴로운 고문은 그 이튿날부터 시작되었다, 포장은 갖가지 형벌과 회유책으로 배교를 강요하였다. "한 마디만 하면 너와 처자와 동생을 모두 놓아주고 재산도 도로 찾게 해 주마." "제가 세상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이 제 종교이니 차라리 모든 것을 잃을지언정 교는 배반치 못하겠습니다." "너는 목숨을 전혀 아끼지 않는구나. 그러나 아내와 아이들이 불쌍하지 않느냐?" "저는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마음 약한 표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형리들은 그를 땅에 엎어 놓고 온갖 형구를 다 동원하여 모진 형벌을 가하자 구경꾼들조차 얼굴을 돌려 보기를 꺼렸던 것이다. 형조판서는 "임금님께 순종한다는 말 한마디가 그리 큰 죄는 아닐 것이다. 다른 죄인들은 나보고 살려달라고 청하지만, 지금은 반대로 내가 너희들에게 살기를 원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그는 이제 고문하는데 지쳐서 좋은 말로 회유하는 정책을 쓰기 시작하자, 이틈을 이용하여 이광헌은 자기의 두 자녀를 자기에게 돌려보내 달라고 간청하였다. 판서는 "네 청을 들어주마. 그리고 네 아내와 어린 것들은 배교하지 않아도 놓아주겠다. 다만 내가 배교한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하고 대답하자, 이광헌은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사형선고를 받고, 서소문 밖에서 네 번째의 칼에 목이 떨어져 순교하니, 때는 1839년 5월 4일이요,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6. 남명혁 다미아노, 회장(南明赫, 1802-1839), 참수

 

남명혁 다미아노는 나라 안에서도 잘 알려진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젊어서는 무질서한 생활을 했고, 온갖 남봉꾼들과 어울려 지냈으며, 노름 외에는 생각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30세 때에 천주교를 알고 신자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다가 유방제 신부에게 영세하고 열심을 배가하여 신자의 본분을 지켰다. 그는 많은 외교인 친구들과 교제를 끊고, 교리연구에 몰두하여,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열성을 보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때부터 그는 가족은 물론 냉담자들과 외고인들도 마찬가지로 보살펴 주었으니, 병자들을 찾아가 위문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며, 죽을 위험을 앞둔 외교인 어린이들에게 세를 주도록 주선하는 데 힘을 기우렸다. 이렇게 변한 그를 보고, 하루는 친구 한 사람이 웃으면서 "저 세상에서 자네 이름을 무어라 부를건가?" 하고 물으니, "천주를 위하여 순교한 성의회의 남다미아노라고 불러주면 원이 없겠네" 하여 순교의 뜻을 밝혔던 것이다. 또한 그는 "천국에 가려면 아무래도 미쳐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1839년 들어서면서부터 박해의 물결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는데, 다미아노는 이광헌 아우구스띠노 회장과 같은 날 1839년 4월 7일 저녁에 서울에서 잡혔다. 이틀 전에 그는 위험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고도 자기 집을 집회장소로 빌려주어 신자들이 모이게 하였으니, 146명이 앵베르 주교께 고백성사를 받고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앵베르 주교는 자기 제의, 경본, 주교관을 다미아노 집에 맡겨 두었는데 이것마저 압수되어 서양선교사가 있음이 드러났고, 그는 더욱 모진 형벌을 받았다. 4월 21일, 많은 신자들이 출두하였는데, 형관은 그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남다미아노를 희생물로 골라 잡았다. 형관이 "너는 네 집에서 압수된 제의류와 주교관에 대해서 위증을 했다. 그 물건들은 새 것인데 어떻게 거의 40년 전에 참수 당한 주문모 신부의 것일 수 있느냐? 하며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게 하고, 팔과 갈빗대, 마지막에는 온 몸을 매질하라고 명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의식을 잃었다. "외국교를 배반하고 너와 네 처자의 목숨을 구하라." "제 종교를 외국교라 하시지만 사실은 만대만국의 종교입니다. 저는 이 종교를 알고 봉행한지 이미 8년째이며 배반할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너는 교우들을 알 터인즉 그들의 집을 대라." "천주의 계명 중에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계명이 있으니 댈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고문을 받은 후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후, 다른 감방에 잇는 자기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세상은 주막집에 지나지 않고 우리의 참된 고향은 천국이오. 천주를 위하여 죽으시오.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당신을 만나기를 바라오." 그리고 남회장은 이아우구스티노에게 이런 농담을 했다고 한다. 나는 약하니까 내 목을 베는 것은 쉽겠지만 나제 목은 그렇게 굵고 튼튼하니까 자네 목은 맡은 희광이는 고생하겠네. 마침내 5월 24일 금요일 오후 3시, 남명혁은 서소문 밖으로 끌려가 순교하니, 이때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계성출판사, 가톨릭성인사전



15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