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계동성당 게시판

01.聖프란치스꼬의 시대적 배경 및 생애

인쇄

김건호 [kgh0727] 쪽지 캡슐

2007-01-26 ㅣ No.7317

[영성주제] : 聖 프란치스코(Francesco d'Assisi )의 영성(目次)


I. 성 프란치스코(Francesco d'Assisi) 영성의 개요 및 생애


1.1 시대적 배경
1.2 프란치스꼬 성인의 생애


2. 프란치스꼬 성인이 받은 영향
2.1 일반적 영향
2.2 중세 교회 안에서의 악습에 대한 거부


3. 성 프란치스꼬의 영성


3.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길 (제 1회칙 1,1)
3.1.1 가난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성 프란치스꼬에게 계시되셨다.
3.1.2 “거룩한 복음의 양식을 따라 산다는 것"(유언)
3.1.3 육화의 겸손과 수난의 사랑 (1첼라노 84)
3.1.4 성체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성자의 현존


3.2 사랑이신 하느님
3.2.1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3.2.2 사랑이신 하느님
3.2.3 주님의 영과 그 거룩한 작용
3.2.4 영의 자유


3.3 주 하느님을 깨끗한 마음과 순수한 정신으로 사랑하는 길(제 1회칙 22,26)
3.3.1 프란치스칸 기도
3.3.2 정결하게 산다


3.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
3.4.1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제 2회칙 6,3)
3.4.2 소유 없는 생활
3.4.3 이 세상에서 순례자나 나그네 같이 (제 2회칙 6장)
3.4.4 가난하고 겸손하게 주님을 섬기는 작은 형제 (Minoritas)
3.4.5 가난과 노동
3.4.6 주님의 식탁
3.4.7 하늘나라의 상속자와 왕이 되게 하는 가난의 탁월성


3.5 단순성과 기쁨의 길
3.5.1 순수하고 거룩한 단순성
3.5.2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


3.6 모든 피조물에게 열려 있는 마음


4. 프란치스꼬 영성의 근본정신


4.1 가난
4.1.1 가난의 동기
4.1.2 가난에 대한 성인의 이해
4.2 겸손 - 가난의 자매
4.3 단순성 - 가난한 자의 지혜
4.4 기쁨 - 가난의 열매
4.5 노동과 애긍 - 가난한 자의 생활 양식
4.6 순명 - 내적 가난의 극치
4.7 가난과 사랑 - 하느님의 속성
4.8 가난 이해의 탁월함에 대한 결론


5. 프란치스꼬 성인이 끼친 영향


5.1 프란치스칸
5.2 프란치스꼬의 글
5.3 수도회 : 글라라회와 프란치스꼬
5.4 일반 평신도들


6. 결론
 
 
1. 聖 프란시스코(Francesco d'Assisi) 영성의 개요


1. 시대적 배경과 성인의 생애


1.1 시대적 배경 참조:[(주석-1) : 김성태, 세계 가톨릭 교회사(750-1990)(교내 강의록), 가톨릭대, 26-82]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를 언급하기 전에 먼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간략하게 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성인은 종교개혁 이전, 즉 교회사에서 중세후기(1050-1300) 시대에 살았으며, 당시는 교회 내부에서 이미 많은 개혁의 물결이 일던 시기이다.


특히 '교회의 자유를 획득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는 클뤼니 수도회의 개혁과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1073-1085)의 개혁이 11세기의 개혁을 주도하였다. 당시 교황들의 개혁이 다분히 정치적인 것에 반해, 수도회의 개혁 활동은 가난과 자아 포기의 사도적 생활에로 나아가기 위한 영성 생활에 있어서의 개혁이었다. 따라서 모든 계층의 많은 경건한 신앙인이 수도회에 들어갔고 또 많은 수도회들이 창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1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세 도시가 발전하게 되어 시민 계급의 영향력은 모든 분야에서 강화되었고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교회의 평신도들은 종교 문제에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더욱이 평신도들은 그리스도교 신심에 깊은 관심을 갖고 개인 성화에 주력하게 되었다. 또한 십자군 운동은 서구 세계가 동방 교회의 수도원과 접촉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청빈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신심 운동의 결과로 ‘탁발 수도회’가 탄생하였다. 탁발 수도회로는 ‘프란치스꼬회’, ‘도미니꼬회’, ‘성 아우구스띠누스 은수자회’, ‘가르멜회’가 있었는데 이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청빈의 이상대로 생활하면서 부유한 사람을 무조건 힐책하거나 재산 자체를 죄악시하지 않고 재산을 소유하면서 동시에 포기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 수도회들은 신심 운동 외에 유명한 신학자들을 배출함으로써 중세 문화에도 공헌하였고 여자 수도회와 재속 3회도 설립하였다.


[(주석-1): 김성태, [세계 가톨릭 교회사(750-1990)](대내용 강의록),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26-82]


1.2 프란치스꼬 성인의 생애


성인은 1182년 이탈리아의 아씨시에서 부유한 포목상 베드로 디 베르나르도네와 요안나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요안나는 프로방스 출신으로 피카 부인이라 불리었다. 베드로는 장사일로 자주 프랑스에 갔었고 그 곳에서 그녀와 결혼하였다.
맏아들은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그 이름을 프랑스에 대한 정 때문에 프란치스꼬(프랑스인)로 바꾸었다.[(주석-2) : C. 테스카롤리,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만민의 형제-, 성염 역, 성바오로 출판사, 5]


젊은 프란치스꼬는 신분에 알맞은 교육을 받아 많은 지식을 가졌고 라틴어와 프랑스어 등을 배웠다. 그는 매우 활발하여 동네 청년들로부터 두목으로 지명되기도 하였으며, 돈을 낭비하는 등 방종한 생활을 하였는데 아버지는 그의 이런 행동을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프란치스꼬에게는 타고난 인정심과 관대한 마음이 있어 가난한 이들에게 자주 애긍을 하였다고 한다. [(주석-3)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 가톨릭 출판사, 410-411; (‘1.2.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에서 별도의 각주 표시가 없는 것은 위의 책을 참조한 것임)]


그러던 어느 날 프란치스꼬는 싸움터에서 적에게 잡히고 중병으로 눕게 되었다. 그 때 마음에 일대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거액의 애긍을 하였고 자주 기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느날 황폐한 성 다미아노 소성당에서 주님께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성당의 큰 십자 고상으로부터 “프란치스꼬야,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 집이 곧 그가 있는 소성당이라는 것을 알고, 집에서 귀중품을 가져다가 팔아서 그 성당의 신부에게 내놓았다. 이 사실은 안 아버지는 프란치스꼬를 좁은 방에 가두고 성당에 가서 그 돈을 찾아왔다.


그 후로도 프란치스꼬가 뜻을 굽히지 않으므로 아버지는 주교에게 프란치스꼬를 끌고 가서 아들의 모든 소유권을 자기에게 포기토록하고 아들이 지닌 것은 무엇이건 돌려 받으려고 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이 일을 거부하지 않았을뿐 아니라 크게 기뻐하였다. 그래서 그는 즉시 자기 옷까지 완전히 벌거벗어 아버지께 드렸다. 그러자 주교는 크게 감탄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 안고 입고 있던 외투로 그를 덮어 주었다. [(주석-4) : 토마스 첼라노, [아씨시 성프란치스코의 생애],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분도, 65-66]


프란치스꼬가 청빈을 귀하게 여기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는 재산이라고 이름 붙은 것은 아무 것도 갖기를 원치 않고 꼭 필요한 의복도 되도록 남루한 것을 걸치었다.
특히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의 미사 참례 때 마태오 10, 9-10[(주석-5) : 마태 10,9-10 (200주년 성서) : “여러분의 전대에 금도 은도 동전도 지니지 마시오. 길을 떠날 때에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시오. 사실 일꾼은 마땅히 제 양식을 얻을 만합니다.”] 의 말씀을 듣고는 더욱 더 청빈에 마음을 기울였으며, 몸에는 단지 회색 의복 하나만을 걸치고 줄곧 빈곤 중에 살았다.


그해 그의 제자가 되어 청빈 생활을 같이 하겠다고 지원한 사람이 세 명 있었으니 뀐따바레의 벨라노라는 상인, 에지디오라는 순박한 사람, 그리고 까따니의 베드로라는 법학자가 그들이었다. 그 후 그를 찾아오는 이가 늘어 프란치스꼬는 로마에 가서 교황의 인가를 청하였다.


너무 엄격한 생활 양식에 놀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처음에 주저하였으나 꿈에 프란치스꼬가 쓰러져가는 교회를 받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 회칙을 구두로 인준하고 그들에게 강론할 사명까지 맡기었다. 그들은 베네딕도회로부터 아씨시 근처에 있는 뽈치운꾸라 소성당과 토지를 얻어 ‘작은 형제회’라는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작은 형제회는 날로 그 수가 늘어나서 분원이 생겼고 그들의 청빈한 생활은 많은 이의 감탄을 사게 되었다. 그중에서 아씨시의 명문 출신인 글라라는 프란치스꼬의 설교에 깊이 감명 받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였다. 그래서 프란치스꼬는 성 다미아노 성당 곁의 한 채의 집을 글라라에게 주었다. 얼마 후 글라라의 동생 아녜스도 언니의 뒤를 따라 오고 다른 여성들도 들어와 글라라는 그 회의 초대 수도원장이 되었다. 이렇게 프란치스꼬가 세운 제2회는 ‘글라라회’라고 불리웠다.


그러나 세상에는 프란치스꼬의 정신을 가지면서도 그들과 같이 완전한 청빈 생활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프란치스꼬는 이들을 위해 제3회를 설립하여 재속 중 어느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도 지킬 수 있는 회칙을 세웠다. 이 회는 교황, 학자 등을 포함하여 빈부 귀천에 관계 없이 많은 회원을 갖게 되었다.


1216년 프란치스꼬는 회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 수도회를 몇 개의 관구를 나누고, 외국에도 형제들을 파견하여 회의 설치와 설교를 맡겼다. 그 역시 회교도를 회두시키기 위해 에집트에서 순교의 영광을 열망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1223년 교황 호노리오는 성대한 예식으로 프란치스꼬회의 규율을 인가하였는데 당시 프란치스꼬의 나이는 불과 41세였다. 그러나 매일의 엄격한 고행과 끊임없는 묵상에 필요한 마음의 긴장과 병 때문에 나이보다 빨리 쇠약해졌다.


1224년 어느 날이었다. 그는 베르나 산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있었는데, 예수 친히 양손, 양발, 늑방에다 오상을 박아 주셨다. 그것은 큰 은혜임에 틀림 없었으나 한편으로는 그 고통의 심함에 어려운 시련이기도 하였다. 그의 유명한 ‘태양의 찬가’도 이 당시(1225년) 지은 것이다.[(주석-6) : C. 테스카롤리, 같은 책, 41-45]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꼬는 설교를 계속하였고 그럴수록 몸은 날로 쇠약해졌으며, 1226년 9월에 이르러서는 자신도 자신의 최후가 가까이 다가온 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머물고 있던 아씨시에서 뽈치운꾸라에 옮겨 주기를 부탁하였다. 그 곳에 도착한지 2,3일 후인 10월 3일 저녁 때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맨땅 위에 눕혀달라고 하였다. 그것은 십자가상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한 가난 중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예수 수난 구절을 낭독시키고 그것이 끝나자 시편 141편[(주석-7) : 시편 141(MT:142)편 (구약성서 새번역) : “…… 제가 당신 이름을 찬송하도록 감옥에서 저를 빼내주소서. 당신께서 제게 선을 베푸실 제 의인들이 저를 둘러싸리이다.”]을 읊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피조물에게 권유하며 하느님을 찬미하였고, 그가 지은 ‘태양의 찬가’를 빌어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열심히 일깨웠다.


이어 그는 죽음을 찬미하도록 하였고 죽음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하여 자기 안에 죽음이 머물도록 초대하였다. “나의 자매 죽음이여, 어서 오십시오.” [(주석-8) : 토마스 첼레노, 같은 책, 418-419]
그의 빛나는 성덕과, 생전에 행한 불가사의한 일과 사후 계속 일어나는 기적 때문에 그는 그렇게 죽음을 초대한 후 3년이 지난 1229년에 시성의 영광을 받았다.


프란치스꼬는 가난을 살아감으로서 그 결과 교회를 쇄신시켰고 복음적 완덕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였다. 실상 교회안에서 성 프란치스꼬 만큼 가난과 직결된 성인도 없었고, 그래서 ‘가난’하면 성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통념이다. 그렇지만 성인이 가난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갔는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드물 뿐더러 소개된 문헌도 거의 없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성인은 가난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에 계속)


http://xn--9p4b15e.kr/index.php 펌

39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