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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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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백 [sblee2] 쪽지 캡슐

2005-09-08 ㅣ No.4341

고창을 다녀와서

- 고색(古色) 창연(蒼然)한 고창(高敞)을 고창(高唱)하며 -

  

 찬미 예수님!

 

   7월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3일)이 들어있는 달이자 1995년 한국 가톨릭 주교회의가 정한 농민주일(7월 18일~7월 23일 셋째 주일)이 있는 달입니다.

 

   폭정에 항거하며 동학 농민반란을 일으킨 녹두장군 전봉준 장군의 얼이 살아 숨쉬는 곳 전라북도 고창 땅! 그곳에는 현대인의 지친 마음을 다스려 주는 곳 선운사가 있고, 국제연합 교육, 과학, 문화기구(UNESCO, UN Education, Science, Culture Organization)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거석(巨石)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이자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인돌(400개 이상) 이 있을 정도로 수천년 전에 융성했던 곳이자 현대 시인의 거장 미당 고(故) 서정주 선생의 기념관이 있는 곳 고창에 우리 아파트 입주(2001. 6)시부터 작년까지 구역일을 맡아 수고하셨고 지금은 현대구역 교우회장(현 구역장이 위촉장 제1호로 위촉)인 황우순(요한) 형제님의 자당(慈堂)이 홀로 계시는 상하면 석남리 601번지 아담한 농가를 현대구역 교우, 자녀 28명이 2박 3일 일정으로 지난 7월 22일(금요일) 밤을 기하여 2003년 여름철에 이어 두번째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성당사목 위원회에서 불철주야 수고하시는 김창화(프로렌시오) 형제님을 비롯한 4명의 사목 형제위원들과 그 배우자(자매)님들이 참여하지 못한 가운데 현대구역 양들의 목자(木子/李)임을 자처하며 구역일을 맡고 있는 본인을 비롯해서 예비자 형제 세 가족을 포함한 9명의 형제와 8분의 자매님들, 그리고 월드컵 4강 신화로 온 국민이 들떠있던 2002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태어나 구역의 귀염둥이, 마스코트로 사랑받으며 잘 커가고 있는 황혜정(비비나)를 비롯해서 위로는 중2학년생, 유치(대학)원생(교육비가 대학수준과 거의 맞먹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11마리의 어린 양들은 저마다의 (가정) 형편에 따라 금, 토요일로 나누어 현대구역 교우들의 영원한 엄마(할머니)이신 노순덕 여사님 댁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7월 22일(금요일) 오후!

   여장을 풀자마자 농가 마당에는 11마리 어린 양들을 위하여 2개의 텐트를 친 다음 어두움이 서서히 깔리며 시원한 바람이 일 즈음 먼저 도착한 6명의 형제들은 숙소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교우회장의 모교인 석남 초등학교로 달려가 평소 동네 배드민턴 경기장에서처럼 소띠 대(vs) 돼지 띠 위주로 3명씩 편을 갈라 친선 족구시합을 가졌습니다. 어두움이 짓게 깔려 공이 잘 보이지 않게 되자 음력 일이레의 귀퉁이가 잘려 나간 달빛을 벗삼고, 두대의 차를 코트 옆에 세워 마치 야간공사라도 하듯 조명을 밝힌 채 첫날의 건강관리 프로그램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저녁식사는 황회장 모친께서 저희 10여명의 양들 부부를 위하여 미리 준비해 놓으신 맛깔스런 시골 반찬으로 해결하였고, 2부 파티로는 고창가는 길에 부안군 곰소 바닷가에 들러 준비한 푸짐하고 싱싱한 조개류들을 숯불어 굽고 나무불로 삶아서 소/맥(주)을 곁들이고 옥수수 하모니카도 불며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지요. 교우들은 저마다 어렸을 적 옛 이야기를 지줄대거나, 올해 피서의 본격적인 막이 오르는 주말(7월 23일/토요일) 직전에 우리가 첫 테이프를 끊은 얘기로부터 서울 현대구역 아파트 단지 찜통안에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서울 탈출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교우들을 아쉬워하며, 마음으로나마 위로를 핸드폰 전파로 전하기도 하면서 도란도란 얘기 꽃을 피워댈 때의 교우들의 기분은 이나라 최고시인 중의 한 분이자 고창 출신인 미당 서정주 시인께서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늦은밤 잠자리에 들 때는 알바(아르바이트)로 야간열차(?)를 운행(?)하는 일부 형제들의 '코 기적'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누구는 마당 텐트에서 어느 교우는 안방에서 자매님들은 문간방에서 아무개는 거실에서 각기 나름대로 저마다의 잠자리 위치를 찾아 누워 그날의 그 순간들을 있게 해준 데 대하여 교우회장 엄친께 그리고 예수님께 꿈속에서 감사 기도를 드리며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7월 23일 토요일! 아침(햇살)이 밝았습니다. 서울 같았으면 아침부터 (옥수수) 푹푹 삶았을 텐데도 고창땅은 고색(古色)이 창연(蒼然)한 가운데 농촌의 풋풋한 향기와 바닷가 갯벌 내음이 조화로히 품어내는 향내는 약간은 과장(?)이겠지만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랑콤(?) 화장품이나 20세기 세계 최고의 미녀 마릴린 몬로가 즐겨 썼다는 샤넬5 (No.5) 수준은 비교될 바가 아니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대강 끝낸 우리들은 오전 9시 20분경 21세기 주인공들인 어린양 10마리는 2마리의 애비 형제 양들을 보호자로 대동하고 지난 1970~1980년대 우리나라 농촌의 중요한 교통수단의 하나이자 농촌기계화의 선도적 일꾼이었던 경운기 짐칸에 몸을 싣고 마치 이스라엘 특공대인양 드넓은 갯벌에 널려 있는 조개 사냥을 위해 갯벌로 향하였고 나머지 성인양(형제, 자매교우)들은 석남 부락에 사는 황회장 선배님의 배려로 마련된 1톤 프런티어(Frontier) 트럭에 몸을 의지한 채 약 10분의 기나긴(?) 여정 끝에 갯벌에 도착하여 9시 반부터 한손에는 개혁(?/갯벌뒤집기)을 위한 호미를, 또 한손에는 비닐 주머니를 들고 저 멀리 퇴각하고 있는 파도를 향하여 걸펀하게 펼쳐진 갯벌로 어린 양들을 앞세우고 나아갔지요.

 

   그 사이 목자는 일부 형제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우리를 알리는 현수막

「??(십자고상) 천주교 창4동 성당 현대구역

    (성당엠블럼)     믿음 · 소망 · 사랑

    Since Sept. 1999~                                  형제·자매」

을 가져다가 갯벌 가운데 골고다 언덕 십자가(?)처럼 일렬로 박혀 있는 나무등걸에 군대 깃발처럼 내걸어 천주교 홍보는 물론 현대구역 교우들의 다정한 공동체의 참면모를 갯벌의 소란스러움(?조개류들의 먹이 사슬식 사냥 등)을 평정하러 오신 인근 농어민 · 아낙네들께 보여드리고자 했습니다.

 

   그 길로 20여명의 양들을 쫓아 갯벌에서 합류한 가운데 조개류들의 토벌에 나서자 파도는 패잔병들을 포기한냥 저멀리서 출렁이며 사자효에서 갈매기 울음소리로 변하며 퇴각하는 가운데, 갯벌은 우리의 어린 양들에게 속살을 드러내며 어머니 품안처럼 포근하게 안고 있었을 골뱅이랑 고재며 피조개(고막)에 새끼게들에 이르기까지 어린 생명들을 고스란히 양떼들 앞에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고사리 손에 호밋자루를 든 어린양들의 기세는 처음에는 움츠러 드는 듯 하다가 조금 있으니려니 한 생명씩 주워 올리게 되자 이내 기세가 등등해지며 골뱅이, 소라, 조개 등이 비닐주머니 속으로 체포되는 듯 하더니 환호성이 여기저기 터져 나오며 교우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은 결코 카메라에 담지 않을 수 없는 「순간 포착의 순간들」이었기에 이를 놓칠세라 우리구역 홍보(PR) 회장직을 맡고 있는 김익진(안토니오) 형제의 카메라 다루는 손놀림이 바빠지기도 했고 그때의 즐거움은 우리 교우 모두에게 먼 훗날에 이르기까지 소중한 추억의 자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동(식)물인들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판국에 호락호락 당할 생물(동물+식물)이 어디 있겠어요? 하느님께서도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이 너희(동·식물)들을 취하고자 할 때에는 군말(?)말고 순순히 목숨을 내놓으라고 분부(?)하셨다는 구절은 목자가 성격지식이 과문한 지는 모르겠으나 성경(The Bible)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사실입니다.

 

   목자는 평소 성가 중 18번의 노래인 "61번,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는 없네"를 흥겨워 부르면서 엄지 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새끼 게를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생포했더니 그 우악(?)스런 집게로 엄지 손가락을 죽을 힘을 다해 꽉 무는 게 아니겠어요?

 

   그 때에 20여명의 양들과 함께 한 목자는 얼마나 아팠던지 그렇잖아도 목소리 크다는 목자가 아야!하고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으나 주변에 양들과 동네 사람들이 없어 천만다행이었지만, 물론 엄지 손가락 손톱옆 얇은 피부에서는 붉은 피가 삐쭈름히 보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생존(生存)은 경쟁이자 전쟁」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목자는 그 순간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면서 결코 만만한 상대는 세상 어디에도 없구나 하는 사실을 뻐져리게(?) 느끼며 역시 목자와 양들은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예수님은 노랫말처럼 무엇과도 바꿀 수 없구나!하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요?

 

   갯벌에서 서울 창4동 양들의 '뒤집기+체포작전' (Dig & Catch Operation)을 펼친지도 어언 80여분. 목자는 오전 11시가 거의 다되어 20여 명의 양들 아니 소수정예 해병대원들을 수송에 편리하게 한 곳으로 집결시키는 가운데 예수(성모)님의 직할 부대 깃발인 우리 현수막을 앞세우고 저멀리 서쪽으로 서쪽으로 서서히 퇴각하고 있는 파도를 배경으로 한 기념(작품) 촬영을 할 것을 생각하며 그 준비를 서두르려는데 나무등걸에 걸어두었던 우리의 현수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옛날옛날 폭정에 거세게 항거하기는 했지만 이곳 순박한 고창 농어민 후예의 어느 형제 자매가 걷어가지는 않았을테고….

 

   이곳 고창벌의 터줏대감 황회장이 어린양들을 태울 경운기를 몰고 갯벌로 들어가면서 현수막을 걷어가지고 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린양들을 경운기에 태운채 숙소를 향해 출발 직전인 데다가 성인양들이 타고갈 트럭에도 모든 양들이 탑승을 완료한 가운데 목자가 현수막을 앞세우고 파도과 퇴각하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단체 기념(작품) 촬영을 위해 어린양들을 포함 모두 하차할 것을 명령(?)하자 구역 총무인 정요셉 형제가 조금전까지 갯벌 현장에서 독사진, 가족사진 일부단체 사진 등 끼리끼리 사진 다 찍었는데 뭐하러 귀찮게 또 다 (차에서) 내려서 사진 찍냐고 하면서 반기를 든 데다가 교우회장까지 동조하는 마당에 화가난 목자는 태생이 소(牛/Bull)인지라 구역장직을 걸고 스페인의 투우로 변할까, 고향 농촌의 말없이 주인 위해 일만하는 얼룩베기 황소로 그냥 남을까 망설이다 코수(코드+수준)가 맞지 않은 간부(?)들을 탓(?)하기 보다 열두제자 중 베드로 같은 제자도 두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사진 촬영을 포기하고 트럭 앞좌석에 몸을 싣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못내 아쉬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수년내 아니면 반편생 있을 것 같지 않은 소중한 작품사진을 놓친 것 같아서 말입니다.

 

   갯벌 사연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점심식사를 위해 숙소로 돌아온 우리를 반기는 분(것)은 황회장 노모님은 물론이요, 어머님께서 홀로 벗삼아 애지중지 키우시던 거시기가 저희 인간 양들의 보신을 위해 희생양으로 삼아 신토불이 여름철 건강종합 보양식품으로 변하여 점심식사 주메뉴로 등장한 것 아니겠습니까?

 

   대도시에 사는 우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자식들은 고향 농촌을 지키며 살아가시는 우리의 부모님들보다 사는 수준만 높았지 베푸는 면에서는 한사코 고향 부모님들의 의식수준과 행동에 크게 못미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의 현실 속에 우리는 또다시 교우회장 가친(家親)께 2년전에 이어 두 번째로 폐를 끼치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의 자랑이자 세계적인 (육체파) 여배우였던 브리지드 바르도 할머니가 가장 싫어한 음식인 반면 북한의 김일석 주석이 가장 좋아한 단고기(연맛 나는 고기)이자, 중국의 등소평이 즐겨했던 향육(향기나는 고기)이지만 2000년동안 백의 민족의 전통 보양식품인 것을 잘 알고 있는 정부에서조차 여지껏 간여하지 않다가 드디어 금년에야 정부(농림부)에서 식품위생면에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거시기 고기로 인하여 점심은 더할 수 없는 성찬이 되었고, 목자는 자매님들에 대한 배려의 표시로 설거지를 도맡아 하며 형제교우들에 모범을 보이자, 형제들 중 인기짱(?)이기도 하였습니다. 구역내 마사회장(마누라를 사랑하는 모임 회장)이자 몰(Mall)짱인 김 미카엘 형제가 목자의 설거지 모습을 보았더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거시기 고기에 소주를 곁들어 얼큰한 분위기 속에 교우들간 이야기 꽃은 만개해 가는 가운데 어린양들의 바닷가 구경에 대한 불만이 높아갈 무렵인 오후 3시반 경 자외선 차단 크림 등으로 무장(?)한 채 목자를 비롯한 모든 양들은 숙소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구시포 해수욕장으로 향했습니다.

 

   본격적인 피서 휴가철이 아니라서 그런지 아니면 서울(경기)에서 멀리 떨어진 해수욕장이라 그런지 인파는 우리가 어린양들을 돌보며 해수욕을 즐기기에는 적당한 만큼의 1인당 쾌적함을 느낄 수준의 면적을 확보할 수 있는 상태일 정도로 알맞은 수준으로 적었습니다. 어린양 11명은 보트 2대에다 원형튜브, 구명조끼 등의 장비를 동원 바닷물에 풀어놓으니 어린 해병대원들의 표정은 육지에 포로로 있던 물고기가 물만났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지요. 거기에 영어의 형용사(Adjective)를 덧붙이면 그것을 사족(巳足: 뱀의 발)이라고 하지요.

 

   어리고, 젊고, 성(性)별구분없는 양들의 해방감은 약 두시간 동안의 「해변의 낭만」속에, 가져온 휴대용 테이블 주변에 오순도순 둘러앉아 오가는 생맥주 술잔 속에 싹트는 신앙심(?)이랄까, 서로의 「서울탈출기」와 불가피하게 함께 서울 탈출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파트 단지에 머물고 있는 교우들에 대한 동정론은 인구(人口)의 회자(      )에서 빠질 수 없는 메뉴였습니다.

 

오후 5시 15분경.

   양들은 정열과 열정의 7월 바다를 아쉬운 듯 뒤로 하고 숙소로 이동해서 자매들은 저녁준비와 어린 양들의 해수욕장 다녀온 뒷마무리로 바쁜 가운데 형제 9명 중 저녁메뉴 준비를 거들어야 하는 황요한(회장) 형제를 제외한 8명의 전사(戰士)들은 엊저녁 무렵과 같이 한 학년이 1개반 뿐이라는 석남초등학교 운동장으로 4명씩 나누어 주전자물로 코트라인을 그은 후 오후 6시 경부터 족구시합을 벌였습니다. 5판삼승 1세트에 3판2승 15점 게임으로, 저녁식사 후 「노래방 값」 내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게임수가 시간적으로 보아 너무 많은 듯 하다고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다수결의 원리로 밀어붙여졌습니다.

 

   그 시합은 관중과 응원단은 없었으나 1988년 서울 올림픽 경기 대회때 축구 본부 의전담당관을 경험했던 목자의 입장에서 보나 2002 월드컵 경기 때 대한민국이 8강 4강에 진입할 당시의 박진감과 스릴 넘치는 대혈투였습니다. 1970년대의 서부 명화 O.K. 목장의 혈투(O.K. Corral) 였다고나 할까요?

 

   심판도 관중도 응원단도 없는 가운데 땅거미가 지기(At dusk) 시작하는 가운데 매 게임마다 2~3점차 내지는 듀스까지 가야하는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었고 3세트에서는 2:1의 백병전이 끝난 후에는 코트 옆에 차를 대놓고 조명 등을 켜야 바로 앞의 공이 보일 정도였으나 빨리 끝내겠다는 양팀의 일념으로 밀어붙여 4차게임 15:14점인 가운데 김 안토니오(홍보회장)의 머리로 살짝 헤딩한 행운의 복 덕분에 16:14로 목자 소속팀이 이기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하지만 공이 안토니오 형제의 머리 접촉 여부가 논란거리가 되었지만 그 때에는 심판도 부심으로 어린양들도 있었으나 김형제의 천주교 신자로서(영세 받은지 1년도 안됐지만) 양심을 걸고, 고백성사하는 심정으로 말하겠는데 분명히 공을 머리로 살짝 밀어 넘겼다는 주장을 펴자 패자팀에서 이를 수용하면서 대단원의 막은 땅거미와 함께 「See You Again in Seoul」을 마음 속에 새기면서 밤8시가 훨씬 넘어서야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형제들을 반갑게 맞이한 저녁식탁의 메뉴는 그 유명한 풍천장어였습니다. 고창 갯벌에 실장어를 풀어놓고 최소한 6개월간 자연방사 시켰다가 잡는다는 영양의 보고(Treasure house)이자 형제들의 정력제라는 풍천장어(Eels)!

 

   그 풍천장어를 갓은 양념을 발라 또는 소금구이로 참나무 숯불에 구워 자매님들이 자신들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가장(家長)들인 형제들을 위하여 정성껏 구워 내놓으니 시장한 판에 육군(향육)에 해군지원병(소라, 골벵이, 조개 등)에 정력 잠수함인 장어까지 식탁에 등장하니 '식사전 기도'는 목자가 힘차게 했지만 '식사후 기도'를 했는지 여부는 상상에 맡기는 게 좋을 것으로 사료되네요.

 

   저녁식사를 육 · 어 · 소(肉 · 魚 · 燒) 3대(大) 메뉴로 마친 후, 노래방이냐, 정겨운 담소냐 두갈래길에서 서성이다가 피곤으로 꿈속에서 예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대부분의 자매님들의 형편을 감안하고 시골에와 이렇게 도란도란 얘기 꽃을 피우는 기회가 언제 있겠느냐며 담소론이 한참동안 우세하더니 (논의 도중 목자는 성가 61번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는 없네'와 팝송 Wonder Land By Night를 독창) TV 주말연속극 '이순신'이 끝나자 11시가 넘어 분위기가 서서히 변하더니 노래방에는 안가더라도 해수욕장 바닷바람을 씌러 가는게 어떻겠느냐는 중재안이 나오자 이에 모두 동조(단꿈 꾸는 1부부 2자매 등 4명만 제외) 목자와 12명의 교우들은 다시 구시포 해수욕장으로 향했습니다. 지방경제 활성화를 위하여 고창 경찰은 음주측정도 안한다나? 뭐 그러면서…일부 교우가 차를 몰았지요.

 

밤 11시 반!

   맥주(Draft beer)와 마주하기에 앞서 식전행사로 레지오 마리애(LM) 은총의 모후 Pr. 부군단장이자 예비역 육군 중령인 이 스테파노 형제의 총사격 솜씨에 힘입어 미국산 술1병을 상품으로 거머쥔 후 족구 패자팀 선수들의 주관 아래 해변가 갯벌에 돗자리를 펴고 빙 둘러앉은 13인의 형제 자매들에게 노란색깔의 글래스(Glass)들이 안겨져 1부 순서인 「도란도란 얘기」가 진행되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1부 순서에서 2부 순서(노래방)로 진행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맥주컵을 앞에 놓고 공자왈을 읊고 있는 목자를 깨운 패자팀 (예비자)형제는 호프집 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소리와 노래방 기계를 가리키며 목자로 하여금 '메들리'로 분위기 잡은 다음 12인의 특공대원에게 (오라는) 신호를 보내라는 엄명이 떨어지는게 아니겠어요?

 

   목자에게 호프집 점령을 명한 예비자가 오는 9월에는 한 형제가 된다는 생각에 호프집 여주인의 안내에 따라 호프집 홀을 가볍게 점령(?)한 후 교우들의 저마다 가무솜씨를 뽐낸 후 숙소에 돌아오니 이튿날(7월 24일 일요일) 오전 1시였습니다.

 

   교우들은 각자 몸을 정갈히 한 후 저마다 체질에 맞는 잠자리를 선택해 잠을 청하니 일부 교우들은 기적소리를 내며 은하철도 999를 열심히 달려 저~멀리 은하계를 지나 하늘나라에서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을 향하는 모습은 기적소리로 인한 안면방해죄(?)를 적용하기엔 약간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체류 3일째인 마지막날(7월 24일)!

   먼동이 트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여름 7월 하순의 정열과 열정이 가시지 않은 고창군 상하면의 공기는 약간 안개낀 듯 한 정경에 향긋한 풀내음이 3쾌(상쾌, 통쾌, 유쾌)하였습니다.

 

   「먼동이 트이듯 나타나고, 달과 같이 아름답고, 해와 같이 빛나며, 고창군 상하면 석남리에 진을 친 천주교 서울대교구 창4동 성당 현대구역 교우들!」

   그 교우들이 일어나기 전인 아침 6시 20분. 목자는 옷을 차려 입고 구시포 해수욕장을 향하여 서서히 조깅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약 2km 거리를 주변을 두리변 거리며 조깅을 시작하니 젖소 사육장이 보였고 양떼 대신 젖소를 지키는 흑황색 개 두 마리가 눈을 부라리고 목자를 향해 목청껏 짖어 대는 게 아니겠어요?

 

   목자는 우리 안의 젖소들을 지키는 개 두 마리에게 너희들은 주인 잘 만나 단육(향육) 신세 되지 않고 양떼 대신 우리에 갖힌 순박한 젖소지키며 행복을 누리고 있으니 맡은바 업무에 충실하라는 무선 메시지를 보냈지요.

 

   그런 생각 가운데 목자는 어느덧 구시포 바닷가에 도착하였고 인근에는 한전 발전 시험 센타(Power Testing Center)가 있으매 이를 보고 부안(핵 발전소 설치 반대 시위 극심 지역)과 영광(원자력 발전소 소재 지역) 사이 샌드위치(Sandwich) 지역에 있는 PTC의 존재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닷가 선착장에서 무심코 들은 갈매기의 울음소리는 어린애의 젖달라는 울음소리와 어린양의 울음소리와 같은 울음소리를 듣는 듯 착각을 느끼면서 숙소로 달려와 보니 어느덧 7시 반이 다 되었습니다.

 

   주일의 숙소의 아침은 평온했습니다.

   황회장 모친과 그 며느리인 최요안나 자매님만 양떼의 아침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양들은 마치 서울 자기네 집에서의 휴일 아침인 양 은하철도 999 꿈속 여행중이었습니다.

 

   목자가 다시 집 밖으로 나와 동네를 둘러보고 있노라니 (사실은 아침 식사에 갈치 조림에 쓸 애호박 1개를 구하기 위해서) 1970~1980년대 우리의 농업·농촌의 기계화 선봉장으로 또한 유일하고도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경운기가 이곳저곳에서 엔진 소리를 내며 농부들의 운전 방향에 따라 삶의 일터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어제밤의 열기가 식어 생긴 안개가 논밭에 얕게 깔려 있는 가운데 농작업을 위해 논,밭으로 떠나는 농민들의 목에 걸친 수건과 경운기 엔진 소리는 1970년도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정녕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하고 외치며 삶의 현장, 생산 현장에서 의욕을 펼쳤던 우리 부모 형제들의 모습을 아스라이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한 장면이었습니다.

 

   아침 8시가 다 되어서야 「양들의 침묵」은 깨졌고 전날밤 숙취를 해소하려는 양 저마다 냉수(녹차)를 찾기 시작하는 가운데 양들 앞에 아침식사 상이 놓여지기 시작하면서 휴일의 하루는 서서히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침식사를 마친 어린양들은 TV 앞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주말 프로그램을 응시하기 시작했고 목자는 그 광경을 보고 갑자기 선생님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습니다.

 

   목자는 어린양들을 거실 한가운데 모아놓고 종이 1장과 볼펜(연필)을 한자루씩 나누어 주면서 어제 갯벌과 구시포 해수욕장을 다녀온 일들에 대하여 약 30분간(8시 50분~9시 20분) 일기를 써서 목자에게 내도록 일렀습니다.

 

   갑자기 일기를 쓰게 된 어린양들은 처음엔 목자를 보는 눈망울들이 부드럽지도 다정하지도 않았고 조금은 골치 아프다는 눈치이더니 이내 안쓰면 안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던지 서서히 생각을 정리하고 의문나는 사항은 물어보고 하더니 이내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고 시작한지 20분이 경과하자 마치 시험보다 시험지에서 모르는 문제, 생각을 정리한 문제들을 풀 듯 써내려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초등학교 2학년생 2명, 4학년생 2명, 6학년생 4명과 일기쓰기를 면제해 준 황혜정(비비나) '법무' (더 어렸을 적에 항상 막무가내로 행동해 법도를 안지킨다고 해서 '무법'을 거꾸로 이름하여 목자가 붙인 별명)까지 모두 9명의 어린양들이 학교명, 학년, 이름(본명)을 썼는지 다시 확인 후 목자에게 제출하였습니다. (중2년생 양은 어미양 부탁으로 면제)

 

   목자는 일기쓰기가 끝난 어린양들을 다시 마당으로 모이게 했습니다. 2박 3일간 먹고 버린 소/맥, 음료수병 등을 분류하고 페트병은 밟아 찌그러뜨려 부피를 줄인 후 따로 분리하여 모으도록 하는 등으로 3일간 정들었던 농촌주택 주변 환경을 깨끗이 정리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이어서 목자는 성인양들로부터 마지막 일정인 오늘의 계획에 대한 의견 수렴에 들어갔습니다.

 

   목자 소견으로는 오전 10시경 숙소를 나서서 선운사, 미당 서정주 문학관, 인촌 김성수 선생 생가, 고인돌 유적지를 거쳐 이곳 특산품인 복분자 제품, 새우젓 등 젓갈을 산 후에 상경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일요일이라 차막힌다, 그런 거 옛날에 다 관람했다, 늦게 출발하면 차막혀 10분이 1시간 늦어진다는 등 의견들이 나와 결국은 각자 알아서 가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져 차를 가져오지 않은 전 현직 목자를 제외한 7대의 차 운전기사(?) 재량에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문화 마인드가 너무 미흡한 양들이라니!

 

   이제 남은 건 2박 3일간 수고해주신 황요한 형제님 어머님과의 기념촬영이었습니다. 황교우회장 엄친께서 기거하시는 대문과 울타리를 배경삼아 구역 현수막을 앞세우고 28명의 양들과, 엄친과 더불어 기념사진 촬영을 마친 후 3일동안 희생 · 봉사하신 황회장님 「아! 어머니」께 작별인사를 드리고 붙별 더위와 가마솥 가운데에 노출돼 있는 서울시 도봉구 창4동 815번지 현대 2·3·5차 아파트 단지에 위치한 각자의 삶의 보금자리로 차수(車首)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2박 3일간의 고색이 창연한 고창에서의 여정은 그렇게 해서 대단원의 막이 내려졌음을 전합니다.

 

심기일전(心起一轉)!

   이번 여행에 참여한 28명의 양들이 보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보다 알찬 신앙생활을 해나갈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동참하지 못한 교우들께는 위로의 마음을 전하며

 

   7월의 성인이신 성(聖/Saint)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님께는 님께서 남기신 편지의 한 구절을 음미하는 시간을 갖으며 감사기도 드리고

 

( 믿음으로 솟아오르는 산이 되십시오

  사랑으로 흐르는 강이 되십시오

  겸손으로 부서지는 흙이 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뿐인 모국을

  가장 아름답게 하십시오 )

 

   고창이 나은 한국 대표 시인 중의 한 분이신 미당 서정주 선생의 기념관을 탐방하지 못한 교우들에게는 선생의 시 한편 「국화 옆에서」 중 일부를 소개해 드리고

 

(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

 

   농민주일(7월 18일~7월 24일)과 김안나 원장수녀님의 영명축일(7월 26일)을 맞아 농촌봉사 활동도 못하고 교중미사 후 축하 청사에도 함께 하지 못한 무례를 용서하여 주실 것을 정중히 청하고

 

   2박 3일간 저희 28명의 양들 뒷바라지로 희생, 봉사하신 황회장 자당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2박 3일간의 엉터리 피정(?) (예수님과 '피'가 나게 '정'을 통하는 기도행사)을 마치게 되었음을 김주영(루가) 신부님을 비롯한 창4동 성당 모든 교우들께 보고드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이시다" (I am the true vine, and My Father is the vine dresser)라는 말씀(요한 15, 1)을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고창 기행보고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우 여러분! 사랑해~요!

 

2005. 7. 27.

                                                                                  고창 하늘 아래 뜬

                                                                                  해 · 달 · 별 그리고

                                                                                  믿음 · 소망 · 사랑을 담아

 

                                                                이 신 백 (요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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