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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4일 성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2.AME DU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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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6-03 ㅣ No.1195

 

 

축일 : 6월4일

성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

Saint Francis Caracciolo

St. Franciscus Caracciolo, C

Founder of the Minor Clerks Regular

1608년 증거자 이탈리아

 

 

이탈리아 아브루찌의 셀라 산따 마리아에서 1563년 10월 13일 나폴리 왕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아세니오란 이름으로 영세 받았다.

어려서부터 덕행이 높고 기도를 좋아하며 특히 동정 성 마리아를 존경하는 마음이 두터웠다.

그러나 점점 성장함에 따라 오락도 즐기고 그 중에도 사냥을 제일 좋아하며 대부분 놀면서 시간을 허비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하느님께서는 그를 당신께로 이끄시려고 하셨는지, 22세 때 무서운 나병에 걸려 거의 생명을 잃을 뻔했으나 기적적으로 완쾌된 일이 있다. 그것은 그가 만일 전과 같이 치유된다면 성직자로서 하느님께 몸을 바치겠다고 열심히 기도하고, 사적인 서원을 한 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도 약속을 지켜 자신의 재산 전부를 빈민에게 희사하고  나폴리에서 신학 공부에 착수했다. 그리고 공부가 끝나자 사제가 되었으며 죄수들을 돌보는 회인 비안키 델라 쥬스띠찌아에 가입, 박애 사업에 헌신하여 죄수나 사형수에 대해 특별히 깊은 동정을 베풀었다.

 

그 당시 나폴리에 요한 아우구스티노 아도르라는 귀족이 있었다. 프란치스코보다 12세나 위였던 그는 청년 시대에는 세속 생활을 즐기며 지냈으나, 어느 날 여행의 길을 떠나 도미니코회의 성 벨드란도를 만났던 바, 훗날 당신은 어느 수도원을 세울 것이라는 예언의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과연 아도르노는 후에 이탈리아에 돌아오자마자 세속을 끊고 신품 성사 받을 준비를 하고 나서 사제가 된 후, 일생을 기도와 다른 이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봉헌하려는 마음이 간절해 그 계획을 다른 한 사제에게도 말하고 서로 같이 동료들을 모르고자 노력하며 프란치스코의 친척에게도 가입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친척과 같은 이름을 가졌던 관계로 아도르노의 편지가 프란치스코에게로 잘못 배달되었다. 그는 거기에 하느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먼저의 두 사제와 함께 셋이서 우선 인기척 없는 수도원을 찾아가서 자신들의 사명에 대한 준비를 하기로 하고, 기도와 단신재와 침묵을 지키는 동시에 새 수도원의 규율을 기초했다.

이 수도원에서의 특별한 기도, 고행과 성체의 끊임없는 조배를 중요시 할 예정이었다

 

 

1588년에는 그와 요한 아우구스띠네 아도르노 신부 그리고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병원의 환자들과 죄수들을 위하여 일하고 사목하는

작은 율수 성직회(Minor Clerks Regular)를 창설하고, 식스토 5세 교황의 승인을 받고, 첫번째 장상으로는 아도르노 신부가 선임되었다.

 

이때 아세니오는 프란치스꼬로 개명하였다. 1년 후에는 최초의 형제들이 서원을 발했다. 그들은 나폴리에 최초의 수도원이 완성되자 초대원장은 프란치스코와 더불어 스페인에도 수도원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입국했으나, 국왕은 이를 허가해 주지 않았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4년이 지나면 반드시 허가가 내릴것이고 그때까지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인내해야 한다고 예언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단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행의 수도원은 다행이도 극히 순조롭게 발전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 수도회는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던 중에 1591년 아도르노원장이 서거하자 프란치스코가 전 회원의 일치의 추천에 의해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겸손한 그의 희망으로서는 원장직을 3년만 맡아보고 그 후 사임하려고 했으나 모든 사람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세 번이나 원장에 피선되어 수도원의 주요한 창립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최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 언행은 마치 형제들의 최하의 지위에 있는 이와 같이 겸양했다.

 

그의 예언대로 4년이 지나자 그 수도원은 스페인 마드리드와 발라돌리드 그리고 알칼라에 수도원을 세울 수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정돈될 때까지 스페인에 머물다가 귀국했는데, 그 후에도 세번이나 스페인에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이유는 그곳 스페인의 수사들에게 매우 좋지 않은 평판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밀히 조사한 결과 전부가 그 수도원을 손상시키려는 간계라는 것이 판명되어 모함자는 관헌에 엄중히 처벌되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국왕을 알현해, “우리는 이미 무엇이나 모두 용서했으니 폐하께서도 아무쪼록 그에게 관대한 조처가 있기를 원합니다”하고 간청했다. 이와 같이 원수에게 조금도 원망함이 없이 용서해 주는 넓은 도량에 국왕도 매우 탄복하여 즉시 상대를 용서해 주었다. 그는 그 후로도 악담하는 이들에게 원수로 대하는 대신 은혜로써 갚으며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었으므로 그들은 고마운 정에 눈물을 흘리며 모두 진심으로 그를 따르게 되었다.

 

프린치스코는 3,4년간 스페인에 머무르면서 최초의 수련자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그는 총원장이었지만 자신이 임명한 각 수도원의 원장에게 잘 복종했다. 한 예를 들자면, 어느 날 그가 예수 성상 앞에서 무심코 소리를 내어 기도하고 있을 때 원장이 와서 “지금은 침묵시간입니다.”하고 주의를 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즉시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였다. 잠깐 일이 있어서 떠났던 원장이 다시 돌아와서 일어나라는 말을 할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1604년에 그는 또다시 스페인으로 갔다. 이미 원장직도 타인에게 양도한 그는 산따 마리아 마뇨레의 원장 겸 수련장이 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기도했다. 그리고 그의 기도를 허락하시어 하느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신 적도 종종 있었다.

 

1608년 그는 새 수도원 설립을 위해 아뇨네에 파견되어가던 도중 6월 1일 갑자기 중병에 걸려 그 달 3일 병자 성사를 받고 다음날 하늘로 올라갔다.

그의 마지막 말씀은 “자, 천국으로 갑시다!”라는 한 마디였다. 그의 나이 겨우 44년 7개월. 그러나 그 많은 공로로 인해 천국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되었다.

그의 일생은 환시와 예언의 은혜가 충만했고 1807년에 시성되었다.

 

 

 

 

 

 

♬2.AME DU CHRIST (Tradition Latin) 성요한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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