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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5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5.AVE MARIA (C.Goun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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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6-05 ㅣ No.1197

축일;6월 5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St.Boniface

St. Bonifatius . 베네딕토회

673 ? -754년

 

보니파시오(673-754년) 성인은 673년경 영국에서 태어났다.

독일의 사도로 알려진 보니파시오는 독일 민족의 회개를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바친-원장으로 선출된 영광도 포기한-영국 베네딕도회의 수사이다.

 

로마 지향성,선교활동 등에 대한 앵글로 색슨 수도회의 이상을 흡수하고 717년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사양하고 719년 선교 사목에 대한 그레고리오 2세의 인가를 로마에서 직접 받았습니다. 그 뒤 유럽 대륙 게르만 민족에 대한 선교를 시작하여 689년 피핀 2세에 의해 정복되어 프랑크 왕국령이 된 프리시아 선교를, 721년 헤세 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해 많은 오류에 빠져있는 독일교회를 재편성하여 독일 민족의 회개를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이어 뒤링지아와 마인츠 교회의 정비에 노력하여 740년 이지역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교회 회의를, 742년 쇠퇴일로에 있는 프랑크 교회를 개혁하고 로마와의 관계를 긴밀하기 위해 프랑크 교회 공의회를 개회(742-747년)하였습니다.

744년 그는 가장 유명한 수도회를 풀다에 설립하였는데 이곳은 독일 종교및 정신적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마인츠의 주교로 축성되고 나서 독일의 모든 교회를 재편성 할 허락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는 훌륭한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는 754년 프리시아 선교 여행에서 53명의 일행과 함께 이교도에 의해 학살되었으며 그 뒤 풀다는 순례의 중심지로 부각 되었습니다.

 

 

그의 선교 활동의 특색은 독일 교회를 로마와 긴밀히 연결시키고 철저하게 교황에 의탁,여기서 권한을 위임받고 보호와 인도를 요청하였다는데 있습니다.

독일 교회가 다시 로마에 충성하도록 하고, 이방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그는 두 가지 원칙을 따랐다.

첫째 원칙은 로마의 교황과 일치를 이루고 있는 주교에 대한 성직자들의 순명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고,

둘째 원칙은 베네딕토 수도회의 형식을 따른 기도의 집을 많이 세우는 것이었다.

수많은 앵글로색슨계의 수사와 수녀들이 그를 따라 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는 베네딕토회 수녀들을 활동적인 교육 사업에 끌어들였다.

 

이러한 정통성과 충성이 얼마나 필요했는지는 그가 교황 그레고리오 2세의 요청에 따라 719년에 첫 전교 여행을 하면서 본 상황에서 입증되었다.

그곳은 이교도적 생활 방식이 지배적이었다. 그가 그곳에서 본 그리스도교는 완전히 이교로 타락한 것이었으며 오류와 뒤섞인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주로 성직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데다가 정신이 해이했기 때문이며, 때로는 그들이 주교에게 순명하고 있

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이것이 보니파시오가 722년에 처음으로 로마에 돌아와서 보고한 그곳의 상황이었다. 교황은 그에게 독일 교회를 개혁하도록 지시했다.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는 그 지역의 주교가 되어야 했다. 교황은 교회와 세속 지도자들에게도 충고의 편지를 보냈다.

보니파시오는 후에 자신의 사명이 칼 마르텔의 안전 통행권 없이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성공할 수 없는것 이었다고 인정했다.

 

여러 공의회를 주관하였고, 많은 법을 공포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바바리아, 튀링겐, 프랑크 지방에 많은 교회를 세우고 재건하였으며, 프랑크 왕국에서 그는 주교의 선거에 평신도가 개입하고 성직자가 세속화되고 교황의 통제력이 결여되는 등 큰 어려움에 부딪혔다.프리지아에서 마지막 선교중에, 그와 그이 동료 53명은 개종자들의 견진을 준비시키고 있던 중에 살해되었다. 그의 유해는 풀다 수도원에 안치되어 있다.

 

보니파시오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는 그리스도교 율법을 잘 지켰다.

보니파시오에게 그것은 육체적 고통이나 죽음만이 아니라 교회의 개혁을 위한 고통스럽고 그를 당혹스럽게 하는 일이었다.

선교의 영광은 새로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데려오는 데 있다고 흔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다스리고 치유하는 것은 보다 덜 영광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보니파시오는 이교의 미신을 파괴하려는 시도에서 그리스도교에 글자 그대로 돌풍을 일으켰다.

미리 예고한 날 모여든 군중 앞에서 그는 구텔베르크 산에 있는 도나르의 신성한 참나무를 도끼로 찍었다. 거대한 나무는 네 조각으로 갈라지면서 무너졌다.

사람들은 신들이 보니파시오에게 저주를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신이 무력하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 나무의 판자들을 성당 짓는 데 사용했다.

그는 1874년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의 편지에서

(Ep. 78: MGH, Epistolae, 3, 352. 354)

 

그리스도의 양떼를 지키는 충실한 목자

 

교회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면서 이 현세 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유혹의 물결에 시달리는 큰 배와 같습니다. 이 배는 포기할 수 없고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꾸준히 조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 예로서 로마의 글레멘스와 고르넬리오와 다른 교황들, 카르타고의 치쁘리아노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 등과 같은 과거의 교부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외교인 황제들의 치하에서 그리스도의 배, 즉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정배인 교회를 가르치고 보호하며, 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피를 흘리기까지 인내하면서 교회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이분들의 모범과 이와 같은 다른 분들의 모범을 생각해 볼 때 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찹니다. "두려움과 무서움이 나를 덮치고, 내 죄의 어둠이 나를 뒤덮을 뻔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부들과 성서에서 이와 같은 선례를 찾을 수만 있었다면 교회의 행정 직책을 기꺼이 내놓았을 것입니다.그러나 사정이 이렇게 하는 것을 허락치 않고 또 진리는 진력날 수 있지만 패배당하거나 기만당할 수 없기에, 내 지친 영혼은 솔로몬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께로 피신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네 자신의 명철에 의지하지 말라. 무슨 일을 하든지 그분을 생각하라. 그러면 그가 네 앞길을 곧바로 열어 주시리라." 또 어디선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은 튼튼한 성루, 무죄한 사람에게 안전한 피신처가 되리라."

 

옳은 일을 행하는 데 굳건한 자세를 취하고 유혹을 막을 수 있도록 영혼을 준비시킵시다. 그러면 우리가 하느님의 힘으로 저항하면서 그분께 다음과 같이 말씀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주여, 당신은 대대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었나이다." 우리 힘만으로는 질 수 없는 이 짐은 주님께서 지어 주신 짐이기에 주님을 신뢰하고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신 분의 도움을 빌어 지도록 합시다. 고통과 고뇌의 날들이 우리에게 닥쳐온 이때, 주님의 날이 임할 때까지 굳건한 자세로 전투에 임합시다. 우리 선조들과 함께 영원한 유산을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거룩한 법을 수호하기 위해 하느님의 뜻이라면 죽음까지 불사합시다.

 

짖지 못하는 개가 되거나 말 못하는 양지기가 되지 맙시다. 늑대가 가까이 올 때 도망쳐 버리는 삯꾼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양 떼를 지키는 충실한 목자가 됩시다. 성 그레고리오께서 당신의 [사목 지침서]에서 제시 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온갖 뜻을 꾸준히 전파하도록 합시다.

 

 

 

 

 

 

 

8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 영국에는 신앙에 열의가 가득 찬 신자가 많았고, 특히 사제와 수도자들 중에는 자기 신앙에 노력할 뿐 아니라 멀리 외국에까지 건너가서 전교에 활약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는데, 이교 나라 독일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서 유명한 사람은 지금 말하려 하는 성 보니파시오 대주교이다.

 

그는 680년경에 아마도 영국 더본셔의 크레디톤에서 출생한 듯하다. 불과 7세 때에 엑스터 근교의 수도원 학교에 들어갔고, 14세 되던 해에는 윈체스터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윈베르토의 지도아래 공부했다. 이 수도원은 양친이 교육을 위해 일찍부터 그를 위탁한 곳으로서 종교면에는 물론, 보통 학문에 있어서도 좋은 스승이 많이 있었다.

 

그는 715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가 되자 당시 윈프리드라고 불리던 보니파시오는 교수생활과 설교자의 생활이 성공하자, 프리스 지방의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전교하기 위해 독일에 파견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장상들은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학문과 덕행에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해 남의 영혼을 구하려고 하는 그의 갈망이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정도로 명렬하다는 것을 간파한 수도원장은 주님의 뜻을 인정하고 드디어 강복을 주며 파견하기로 했다. 이렇게 겨유 제 소원을 채우게 된 윈프리드의 기쁨은 얼마나 크고 넘쳤겠는가!

 

그는 우선 북부 독일에 있는 프리스 지방에 도착했다. 이곳은 전에 아만도, 윈프리드, 빌리브로르트 등의 성인들이 복음을 전해 준 곳인데, 그 후 국왕에 대한 촉동이 일어나 그들 선교 선구자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예전과 같이 주민들은 거의 이교도들이고 그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증오심은 전보다 커져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윈프리드 역시 할 수 없이 일단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716년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되돌아간 전의 수도원에서는 누구나 다 기뻐하며 그를 맞아들였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그를 원장으로 추대하려고 했다. 윈프리드는 백방으로 노력해 간신히 이를 모면했다. 그것은 가능한 빠른 시일에 다시 독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교 여행의 준비가 다 끝나자, 이번에는 교황에게 축복과 파견 명령을 받기 위해 우선 로마로 갔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기꺼이 그를 맞이하고 또 그의 열정적인 싱앙심에 감동되어 새로이 ‘보니파시오’ 즉 ‘모든 성행을 하는 자’라는 이름을 지어 주셔서 이때부터 그는 보니파시오로 개명했다. 그리고 교황의 이런 호의에 감격한 그는 점점 전교 활동을 할 의지를 견고케하는 한편 교황에 대한 사랑과 충성을 다시금 깊게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교황에 대한 충성심이야말로 그가 전교에 대성공을 거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718년에 보니파시오는 교황으로부터 게르만족의 이방인들을 개종시키하는 명을 받고 재차 프리스에 가서 거기서 3년간 우트레히트의 주교로서 이미 연로하던 성 빌리브로르트를 도와 활동하고 후에는 독일의 헤쓰와 트린기아 지방으로 들어갔다. 그 부근에는 신자도 많지 않고 또한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교도처럼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보니파시오는 곳곳을 찾아 다니며 주님의 복음을 전하며 조금도 쉬는 적이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이교도 뿐 아니라 전에 신자였던 사람들도 다시 개종시켜 전교의 성적은 매우 좋았다.

 

얼마 안 되어 보니파시오는 교황에게 불려 재차 로마에 가서 교회의 사정을 자세히 보고했더니, 교황은 무척 기뻐하며 손수 그를 축성해 전 독일의 주교로 임명했다. 때는 722년에 해당한다.그후 그는 독일에 돌아와서 이전처럼 활동을 계속하고, 영국으로부터 다시 선교사들을 초대해 그들에게 사제를 양성시키고, 또한 새로 교구를 2,3개 더 증설해 이를 위탁할 주교를 교황의 허가를 얻어 정했다. 그러나 아직 수많은 이교도들은 여전히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즐거이 받아들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참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삼고 그 밑에는 제사를 지내며 귀신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보니파시오는 참나무를 쓰러뜨릴 결심을 하고 스스로 이를 감행했다. 이교도들은 즉각 천벌을 내려 보니파시오가 당장 죽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 뒤 그 나무로 소성당을 지었다. 그 후부터는 그처럼 완고하던 주민도 미신을 믿던 신앙에서 각성해 앞을 다투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개종한 민중의 신앙을 견고케 하고, 또한 그들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곳곳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건설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프르다에 있는 것이다. 그는 종종 그곳에 머물면서 더욱 더 사업을 행할 힘을 얻기 위해 기도와 묵상에 몰두했다.

 

그는 여행 비용과 순교지의 신자들에게 자선하기 위해 필요한 돈을 타 주인과 작별하는 자리에서 농담으로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될는지 모르는 일이라 내 자신이 순교해 백골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르는 거요”하고 말하자 아그라에는 이를 엄히 나무랐지만, 두 사람 모두 이 말이 실현되리라고는 전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보니파시오 일행은 긴 여행을 계속하면서 무사히 목적한 순교지인 소아시아에 도착해 성 바오로의 태생지 다르소에서 숙박했다. 그 곳은 박해가 가장 심한 지방으로서 보니파시오가 마을의 광장에 가 보니, 때마침 총독 심부리디오가 그리스도교 신자를 심문하고 참혹하게 고문을 하거나 혹은 사형에 처하는 것이었다. 보니파시오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친 순교자의 용감성에 감격한 나머지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저런 용기를 베푸신 하느님께는 찬미를 받을지어다!”라고 절규한 후 순교자들의 곁으로 달려가 그들을 묶은 쇠사슬에 입맞춤하고 한없는 위로와 격려를 보냈다.

 

총독은 이를 보자 즉시 체포하게 하고 “그대는 어디서 온 자이며 이름은 무엇인가?”하고 질문하니 보니파시오는 아무런 두려움없이 그리스도교 신자란 것을 명백히 하자 즉각 철봉으로 매를 맞고 갖은 형벌을 당하고 나서 드디어 참살 당해 영광의 순교자 반열에 들게 되었다.

 

숙소에서는 같이 따라온 사람들이 아무리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모두 찾으러 나갔으나 의외로 광장에서 그의 참혹한 시체를 발견하고 매우 놀라면서도 사람들에게 그의 순교의 전말을 듣고, 그렇다면 다른 거룩한 순교자의 유골을 구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고 보니파시오의 유해를 모시고 로마로 돌아왔다.

 

아그라에는 딴 세상 사람이 된 보니파시오의 모습에 출발 때의 그가 한 말을 기억하면서 매우 큰 심적 타격을 받았으나, 한편으로 그 용감한 순교자의 상황을 듣고서는 매우 기뻐하며 모두 예를 갖추어 그의 유해를 로마 부근의 자기 수유지에 안장하고, 후에 그 무덤 위에 한 성당을 건립케 하고 정성을 기울여 그의 명복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자신도 보니파시오 못지 않게 주님의 뜻에 맞는 자가 되기 위해 재산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고 여생을 자선과 고행으로 지내며 통회의 정을 항상 품고 있었다고 한다.

 

 

 

 

 

♬5.AVE MARIA (C.Gounod)성요한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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