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한국의 103위 순교자(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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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JENYA] 쪽지 캡슐

2000-09-30 ㅣ No.2074

 

 59. 박종원 아우구스띠노, 회장(朴宗源, 1792-1840), 참수

 

박종원 아우구스띠노는 서우에 살던 중인계급의 신자집에서 태어났는데 '이선'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친절하였으며, 학문에도 뛰어났고 박학하였음으로 주변의 칭찬을 들으며 자랐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극빈한 가운데서 살았으나 자신의 처지를 불평없이 참아 받았고, 어머니께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교회의 계명도 충실히 지켜나갔다고 한다. 나이가 들자, 그는 순교자의 딸인 고순이 바르바라를 아내로 맞이하여 열심한 신앙생활로 모범 가정을 이루는 한편, 그의 박애심과 교리 지식을 활용하여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데 전심하였다. 그는 가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 주 예수께서 나를 사랑셨으니 불쌍한 죄인인 나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죽으셨으니, 나도 그분을 위하여 괴로움을 받고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면서 순교하려는 뜻을 마음에 새겼던 것이다. 또 그는 신자들 중에서 무슨 악습이나 부당한 일이나 중대한 과실을 발견하면 상냥한 말로 그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노력하였는데, 감동할 만큼 사랑으로 권고했기 때문에 그의 충고에 거역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그의 온화함이 널리 알려져 신자들은 웃으며 "대관절 아우구스띠노가 성을 내는 것을 언제 보게 될까?"하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덕과 재능은 즉기 앵베르 주교에게 알려졌다. 따라서 주교는 그를 서울의 회장직에 임명하였는데, 그는 이 위험한 직책을 열성적으로 수행하여 그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이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포청에서는 그를 제1대상자로 지목했음으로 그는 자기 집을 떠나 친구의 집에 피신하였으나, 회장의 직분을 다하려는 마음에서 밤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시자들을 찾아보고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붇돋아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8개월을 지내던 중, 마침내 10월 26일에 아내와 함께 체포되었다. 형조판서는 부부를 함께 심문하며, 여섯 차례나 계속하여 잔인하게 고문하여 그들의 팔 다리를 못쓰게 하였던 것이다. 10일 후에 형조에 끌려간 그는 다리에 매를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갔으나 그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의 죄목은 "천당과 지옥을 마치 확실한 사실같이 말하고, 제자는 헛된 예식이라 하여 저버렸으며, 천주를 충심으로 믿고 공경하여 차라리 죽을지언정 마음을 돌리지 않은 죄"였던 것이다. 그는 1840년  1월 31일, 서울에 있는 당고개에서 참수를 당하여 순교하니, 그이 나이는 48세였다.

 

 

 

 

60. 홍병주 베드로, 회장(洪秉周 1798-1840), 참수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는 형제지간이고, 매우 유명한 가문의 자손들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홍낙민 루가는 그들의 조부이고, 1840년 전주에서 참수당한 홍자영 쁘로다시오는 그들의 삼촌이다. 그리고 아버지 홍빈영은 1801년의 지긋지긋한 난을 치르고 나서 충청도 내포평야에 있는 서산고을 여사울이란 곳에 살고 있었다. 이 형제가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유산은 신앙과 견실한 학식 뿐이었는데, 이들은 그것을 잘 이용하여 후일 천주교의 명성을 크게 높였던 것이다. 그들의 학덕과 모범적인 신자생활을 익히 알던 전교 신부들은 그들 형제를 지방의 회장으로 임명하니, 그들은 남을 가르치는 일과 약한 자를 격려하는 일과 병자를 간호하는 일 그리고 자선 사업에서 자신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장 신부와 샤스땅 신부도 교회의 여러 가지 중대한 일을 처리하게 했고, 또 그들은 기대에 맞게 잘 처리하여 교회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시작되어 성직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면 목숨을 잃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 형제는 선교사들을 용감하게 집에 모시고 접대하였으니, 이미 그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준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한편, 조정의 앞잡이 노릇하던 김여상은 체포자 명단에 그들의 이름도 올려놓고 있다가 그해 9월에 홍 베드로와 바울로를 붙잡았다. 포장은 그들이 공범이라 하여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더 모질게 고문을 하였다. 그러나 형제는 똑같이 순교자의 자손답게 하느님을 증거하고 다른 신자들을 고발하는 것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포장은 이들 형제의 배교를 단념하고 형조로 이송하였는데, 당시 형조판서 홍명주는 이들의 친척이었다. 그는 이들 형제 때문에 자신에게 모슨 해가 미칠까 두려워한 나머지 부하들에게 모든 수단을 다 써서 그들을 배교시키되 사형언도는 내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에 그 부하들은 상관에게 잘 보일 생각으로 그들을 배교시키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쓸데 없는 일이었으니, 이 형제는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입장이 되자, 마침내 그들에 대한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형인 홍베드로는 박종원 아우구스티노와 같이 참수되었고, 동생인 홍바울로는 그 이튿날에 형을 따라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는데, 그 당시 법에는 형제를 같은 날 죽이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따로따로 형을 집행하였던 것이다. 이때 형은 43세의 나이로 1840년 1월 31일에 순교하였으며, 동생은 39세의 나이로 그 이튿날에 참수 당하여 영광스런 월계관을 함께 받은 것이다.

 

 

 

 

61. 손소벽 막달레나, 부인(孫小碧, 1802-1840), 참수

 

손소벽 막달레나는 1839년 12월 29일에 순교한 최창흡 베드로의 아내요, 최영이 바르바라의 어머니이며, 조신철 까롤로의 장모이다. 그녀는 신앙 때문에 먼 곳으로 귀양간 어느 열심한 신자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그녀는 오랫동안 신자가 없는 지방에서 살았고, 또 견디기 힘든 박해를 당했으므로 감히 교우들과 상종하지 못하다가, 늦게서야 성교회의 참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17세 때에 당시 유명한 교우이던 최창흡 베드로에게 시집을 갔다. 그후 막달레나는 자녀 11명을 낳았으나, 대부분이 어려서 죽고 딸 둘밖에 남지 않았는데, 맏딸 바르바라와 두 살짜리 작은 딸만 남은 것이다. 막달레나 가족은 콜레라가 창궐하던 1821년경에 세례를 받았고, 선교사들이 입국한 뒤부터는 더욱 신앙생활에 열심하여 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기해년 7월에 박해가 극에 달하여 많은 교우들이 체포될 때, 그녀는 포교의 손을 피하기 위하여 여러 친척들과 같이 숨어 있었으나, 결국 그녀는 남편과 딸과 함께 잡혔다. 그런데 사위인 조까롤로가 중국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그녀의 집에서 압수되었기 때문에 포장은 7회에 걸쳐 엄한 심문과 형벌을 가하였다. 포장은 태장 260대를 때리고, 여러 번 주리를 틀어보았으나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또 다시 포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 몫숨은 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제게 주신 천주의 것이니 그분만이 아무때라도 그것을 도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주재하시는 천주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면 죽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이때 막달레나는 두 살짜리 젖먹이 막내딸을 옥에까지 데리고 갔었는데 그 가엾은 어린 것이 공기도 햇볕도 또 먹을 것까지 없어 어머니된 마음이 언짢고 용기가 꺾일지 몰라 그를 품에서 읍내에 있는 친척집에 보냈다고 한다. 막달레나는 형조로 이송되어 또다시 심문과 고문이 시작되었으나, 그 전과 같이 변함없는 용기를 보여 바로 그날 사형이 언도되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남편이 순교한지 1개월 정도 후인 1840년 1월 31일에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하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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