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한국의 103위 순교자(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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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jenya] 쪽지 캡슐

2000-10-01 ㅣ No.2079

 

 

62. 이경이 아가타, 부인(李瓊伊, 1813-1840), 참수

 

이경이 아가타는 원래 천주교를 믿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고, 장성한 후에는 궁녀를 감독하던 내시에게 속아서 출가하였으므로, 앵베르 주교로부터 그 결혼은 교회법상 무효라는 선언을 받았다. 이리하여 남편과 헤어졌지만, 친정 어머니가 너무 가난하였으므로, 한영이 막달레나와 그녀의 딸인 권진이 아가타의 집에 몸붙여 살았던 것이다. 이아가타는 항상 같은 처지이던 그들과 함께 항상 기도하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기해박해가 극에 달했던 1839년 6월 7일, 어떤 배교자가 밀고를 하여 잡혔는데, 포장은 그들의 성명을 물은 다음 같이 잡힌 한 막달레나만 옥에 가두고, 권아가타와 이아가타는 이웃집에 남겨주고 지키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들을 감옥에 가두지 않는 이유가 밝혀졌는데, 배교자 김여상이 찾아가서 권아가타를 감언이설로 꾀어 함께 도망치려 한 때문이었다. 포졸들은 이러한 사실을 막기 위하여 이아가타를 풀어주었다. 한편, 조정에서도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고 난 다음, 관원을 파면시키고 여러 포졸들을 귀양보내고, 그들을 다시 체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아가타와 권아가타는 서울의 어느 초라한 신자 집에 숨어 있었는데, 함께 탈출했던 여종이 먼저 잡혀서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어 다시 붙잡히게 되어 포도청에 압송되었다. 포청으로 압송된 이아가타는 무서운 형벌을 받았지만 불굴의 인내심으로 형벌을 극복하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형조로 옮겨져서도 새로운 시문과 고문을 당하였지만, 순교의 의지를 더더욱 굳혔을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고,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27세를 일기로 순교한 것이다.

 

 

 

63. 이인덕 마리아, 부인(李仁德, 1818-1840), 참수

 

이인덕 마리아는 1839년 12월 29일에 순교한 이영덕 막달레나의 동생으로 할머니 조바르바라에게서 천주교의 진리를 배워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입교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그녀의 부친이 너무나 완고하고 또 천주교를 적대시하였기 때문에, 부친이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후 이 사실을 안 부친은 더욱 엄해졌고, 더욱이 언니 이막달레나의 혼인 문제로 심각한 상태에 이르자,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집을 뛰쳐 나와 어느 신자 집에 숨어살게 된 것이다. 처음에 이 소식을 들은 주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였으나, 양반집 부인과 처녀들이 도망을 쳤다가 집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그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고, 회장들에게 부탁하여 그들을 보살펴 주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조그마한 집 한칸을 얻어 거기서 살게 되었으나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놓고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므로 곤궁과 고통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수계생활에만 전념하였던 것이다. 또 그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한결 같은 마음과 원의로 주교가 체포되면 함께 자수키로 하였으나, 자수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기해년 7월 어느날,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붙잡았기 때문이다. 포청에 잡혀온 이마리아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무척 고생하였음은 물론이고, 잔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된 후 또다시 그녀의 항구심을 꺾어보려고 새로운 고문을 가했으나 모두가 쓸데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교우요, 죽는 날까지 교우로 있겠습니다." 이리하여 그녀는 형조판서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언니인 이막달레나가 사형선고를 받고 순교한 1개월 후인 1월 31일, 당고개에서 참수치명하니, 언니와 함께 동정과 순교의 두 가지 영광을 얻었던 것이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2세였다.

 

 

 

64. 권진이 아가타, 부인(權珍伊, 1820-1840), 참수

 

권진이 아가타는 당대에 문장과 명필로 뛰어났던 학자이며 몰락 양반인 권진사와 한영이 막달레나의 딸로 태어났다. 권진사는 중년에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외교인 아내인 한영이에게도 가르쳐 입교시켰으나, 그 당시 조선에는 성직자가 없었으므로 임종 때 가서야 영세를 받고, 가족들도 함께 세례를 받게 했던 것이다. 어머니 한영이 막달레나는 과부가 된 후 가진 것이 없어 무척이나 고생을 하였으나, 남편의 간곡한 유언에 따라 수절함과 동시에 정성을 다하여 권아가타를 양육하였다. 그러나 권 아가타는 차차 성숙하면서 미모가 빼어났고, 굳은 신앙심을 가진 아름다운 규수로 꼽혔기에 교우들 중에서 많은 칭찬을 받았다. 권아가타는 13세에 결혼을 하였는데 모든 예절을 갖추어 식은 올렸지만, 남편의 친척인 정하상 바울로 집에 기거하면서 집안 살림을 맡아 보게 되었다. 유방제 신부가 조선에 왔을 때, 아가타는 그의 처소에 살림꾼으로 들어갔는데, 아가타는 타고난 미모와 민첩한 지혜와 여러 가지 재주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영리하고 온화한 여자였으므로 신부는 그를 매우 귀여워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가타가 동정을 지킬 의향이 있음을 말하자, 혼인식만 하고 동거하기 전임으로 혼인을 무효화시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주선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위험에로 들어가는 첫걸음이 되어 한동안은 좋지 않은 소문으로 사람들의 걸림돌이 되었다. 이때 모방 나 신부가 입국하여 모든 소문을 없앴음으로 아가타는 모방 신부의 어버이다운 권고와 충고를 듣고 용기를 내어 새출발을 하였다. 아가타는 신청 어머니에게로 돌아가 신자의 본분을 지키는데 전심하였고, 보속과 열렬한 기도로 과거의 자기 행동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졌던 이들을 오히려 덕의 길로 권요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기워같고 하느님께 그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하여 아가타는 순교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어머니와 함게 이러한 속조와 신심 생활을 하던 중 어떤 배교자의 밀고로 포졸들이 아가타를 잡으려고 몰려들었다. 1839년 7월 17일 밤, 어머니와 이아가타 그리고 권아가타가 붙잡혔는데, 관원은 어머니만 옥에 가두고 두 아가타는 사관청에 두고 옥졸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때 배교자 김여상이 아가타를 꾀면서 그와 함께 도망치자고 하였으나, 아가타는 멸시하는 말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다시 포교들이 아가타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마음이 움직여 그녀의 탈출을 도와 주었다. 그리하여 아가타는 며칠 후 이아가타와 함께 도망하였다. 결국 이 사건이 탄로되자 포장이 파직되고 군졸 하나는 사형을 당했으며, 둘은 귀양을 갔다. 이윽고, 권아가타는 재차 체포되어 온갖 형벌을 받을 수 없이 받았지만, 그녀의 신앙은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그후 형조로 옮겨져 3차에 걸쳐 심문과 고문을 당하였지만, 최초의 마음을 꾸준히 지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도를 봉행하는 것이 뼈속까지 베었고, 귀신을 공경하는 것이 본성이 되어 여자 중에 놀랄만한 요술쟁이라는 죄목으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녀는 1840년 1월 31일, 먼저 순교한 어머니의 뒤를 따라 당고개에서 피를 흘리게 되었으니 그녀의 나이는 21세였다.

 

 

 

65. 홍영주 바울로, 회장(洪永周, 1801-1840), 참수

 

==>> 60. 홍병주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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