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한국의 103위 순교자(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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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jenya] 쪽지 캡슐

2000-10-09 ㅣ No.2103

 

83. 장주기 요셉, 회장(張周基, 1802∼1866) 군문효수

 

장주기 요셉은 경기도 수원땅의 어느 부유한 외교인 집안에 태어났다. 한문에 유식했던 그는 열심한 자기 형수로부터 천주교 도리를 배워 영세 입교하게 되었는데, 그때 온 가족이 모두 입교하였고,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그는 학식이 있고 슬기로왔으며 신심이 두터웠기 때문에, 모방신부는 입국하자마자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20년 동안이나 회장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거듭된 박해로 네 번씩이나 산속으로 피신해야 했으며, 살아남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며 신앙을 굳세게 지켜나갔다. 1845년경에 그는 친척들의 성화와 박해를 이기지 못해 제천땅 배론 골짜기에 살았다. 1856년 장 베르뇌 주교가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게 되자 자기 깁을 신학교로 서슴지 않고 제공하였으며, 앞장서서 신학생의 뒷바라지까지 하였고, 신학교 관리직까지 맡아 하였다. 그들 부부는 합심하여 농사를 지어 신학교에 바쳤고, 자신들은 청빈과 봉사로 11년 간이나 신학교 살림을 잘 이끌어 갔다. 1866년3월1일, 갑자기 포졸들이 배론 골짜기에 들이닥쳐 신부들과 함께 그 역시 체포되었으나, 장회장의 공을 잘 알고 있는 신 뿌르띠에 신부가 관헌에게 돈을 주며 그를 석방시켜 달라고 하여, 하는 수 없이 그는 배론 신학교로 돌아왔다. 그후 5일이 지나 식량을 장만하려고 노루골에 사는 한 신자집에 갔다가 다시 포졸들이 그를 덮쳐서 제천 관장에게로 데려갔다 제천 관장은 장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 품신하였다. 서울에서는 "그 사람이 정말 서양인 신부들의 집주인이면 서울로 올려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배교하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대답을 보냈다. 관장이 그에게 질문을 하자, 그는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서양인 신부의 집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라고 서슴없이 말하였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도 않은 채 짚으로 만든 가마를 타고 역적모의를 한 죄수에게 씌우는 홍포를 쓴채 서울로 향하였는데 지나가는 길목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죽으러 가는 그의 얼굴에 사색이 감돌기는커녕 기쁨이 넘쳐 흘러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라 하며 수근거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6년3월24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날을 기다렸다. 그때 나라에서는 왕비가 해산할 달이었으므로 서울에서 죄인의 피를 뿌린다는 것은 불길하다 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 갈매에서 처형하라는 분부가 내려졌다. 이에 그는 1866년2월8일에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되니,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84. 황석두 루까, 회장(黃錫斗, 1812∼1866) 군문효수

 

황석두 혹은 황재건이라고도 하는 루까는 충청도 연풍의 어느 양반집안의 삼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가문을 화려하게 번영케 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열심히 글공부를 시켰고,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도 역시 아버지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20세가 되던 해 과거를 보기 위해 경성을 향하셨는데, 그가 묵은 어느 주막에서 천주교 신자를 만나 성교의 도리를 듣고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천주교 교리책을 여러 권 얻어 가지고 집을 떠난 지 3일만에 부친에게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부친은 아들이 되돌아 온 이유를 알자 분노가 치밀어 아들을 마구 때리고 급기야는 작두를 마당 가운데에 놓고 아들의 목을 작두에 걸게 하였다. 그러나 황루까가 태연히 목을 내밀자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친의 책망과 모진 매질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그는 2년 이상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벙어리처럼 살았다. 그러던 중 어느날, 루까가 아버지 앞에 나아가 천주교 교리책을 한번 읽어보시라고 설득하니 이때부터 온 집안이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를 서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비신자들까지도 루까의 신심과 열성, 그리고 이에 못지 않는 그의 훌륭한 예의범절에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그때 고 페레올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자, 루까는 성교회를 위해서 자기 일생을 바칠 것을 주님께 서약하였고, 고주교는 처와 별거한다는 조건하에 루까를 사제품에 올리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교황청에서 당시 조선 땅에는 여자 수도회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후 권 페롱신부의 한문 선생겸 전교회장 일을 맡아 수행하던 황루까는 또 장주교를 돕게 되었다. 그는 주교와 함께 "회죄직지"를 위해 원고를 썼고 안주교를 도와 번역 출판과 그 교정에 힘썼다. 그러던 어느날 포졸들이 안주교를 잡으려고 몰려오자, 안주교는 루까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권하였다. 그러자 루까는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오늘까지 주교님을 모셔온 제가 피신을 하다니 될 말입니까? 그래, 주교님은 혼자 천당 가시려는 심사이신가요?"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주교와 신부들과 함께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윽고 그는 1866년3월23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안주교와 다른 두 신부들과 함께 보령 갈매 못으로 끌려가서 참수치명하니, 때는 1866년3월30일이요, 나이는 54세였다.

 

 

 

85. 손자선 토마, 농업(孫   ,1843∼1866) 교수

 

손자선 토마는 덕산군 홍주면 신리 마을 거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3대째 천주교를 믿는 열심한 신앙가정에서 태어났으니, 형과 아버지는 1868년에 순교하였고, 그의 당숙, 손니고라오도 순교하였던 것이다. 본래 부지런하면서도 성품이 침착한 그는 나무랄데 없이 신심이 두텁고 명성이 높았으며 자기 부인과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한번도 거르는 일이 없을 만큼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전교 했고, 순교자료를 모아 성직자들에게 전하였으며, 그의 집에서 모든 공소예절을 하였던 것이다. 1866년, 드디어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포졸들이 손토마가 살고 있는 거더리 마을에 들어와 신자 집을 샅샅이 뒤져 많은 물건을 앗아가고는, "손씨 집안에서 누구이든 사람을 보내 몰수된 물건을 찾아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고 용감한 손토마가 자진하여 덕산관가에 나아가 찾아온 사유를 밝혔다, 이때 원님이 그에게 천주교인지 묻게되자, 그는 자기가 천주교 신자임을 밝혀, 즉석에서 체포되었는데 관가에서 갖은 고문으로 그의 의지를 꺾으려고 애썼으나 모두 허사였고 곤장을 치다못해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는 토마의 입에 여러 가지 쓰레기를 쏟아 부으면서 그때마다 "야, 좋지"라고 놀려대었다. 손토마가 "좋습니다"라고 응수하자 "그래 무엇이 좋단 말이냐?"라고 되물었다. 이때 손토마는 "나는 오늘까지 며칠을 두고 세수를 못했는데 여러분들이 내 얼굴을 씻어 주고 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를 흘리게 한 죄인에게는 이같은 좋은 일이 없으며 또한 목이 몹시 탔었는데 쓸개와 식초대신 이런 것들을 내 입에 넣어주니 나는 마치 내가 범한 죄들을 마셔버리는 듯하여 무척 즐겁소"하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그후 덕산 원님은 손토마를 해미로 압송하였는데 해미에서는 더 심한 형벌이 가해졌다. 두 무릎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 양쪽에서 들자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졌다. 이 참혹한 형벌에도 태연히 버티는 그의 모습이 더욱 가증스러워 더 고생을 시키기 위해서 공주로 압송하였다. 공주에서 원님은 특수한 수단을 생각하여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는 증표로서 이빨로 손 살점은 물어뜯어 보여라"고 하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 이빨로 손등을 물어뜯어 피가 흐르게 하였다. 관헌은 배교한다는 고백을 받기 위해 세 번씩이나 곤장을 쳤으나 변함이 없어 결국 감옥에서 목을 졸라 죽였으니 때는 1866년이요,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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