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덕동성당 게시판

하느님, 그분은 알려지지 않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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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순 [won3d] 쪽지 캡슐

2001-01-04 ㅣ No.3296

하느님, 그분은 알려지지 않으신 분

 

우리 세대는 지금 큰 불행으로 신음하고 있다. 즉 하느님 밖에서 살고, 하느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행동한다. 여러 가지 심각한 현실에 휩쓸려 혼자만 살려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현대인은 하느님을 잃어 버렸고, 또 하느님을 얻을 필요조차 이제는 느끼지 않는다.

 

니체는 벌써 한 세기 전에 이를 긍정하는 말을 하였다. <신은 죽었다!>고……. 오늘날에 와서 싸르트르는 <신은 존재하지 않고 또 어디까지나 그런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렇다.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이들의 말이 옳지 않다고 부인하겠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우리 자신이 이를 긍정하는 행동을 취하는 때가 가끔 있다. 그 예로서 우리는 하루 종일, 한 주일 동안, 또는 오랜 시일에 걸쳐 우리에게 생을 주시고 생각하게 하시며 행동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잠시라도 생각하고 지낸 일이 있는가? 거의 그분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 무슨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 행동이 너무 독자적이어서 하느님을 잊기가 일쑤고 또 이런 일들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되는지 나중에는 하느님이 없어도 <이제는 별 지장없이 다 된다.>는 인상을 주고 만다.

 

혹 때때로 하느님께 기도를 했다면 무슨 위험이 들이닥쳤다든가, 무슨 문제로 들볶이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하느님을 극히 편리한 어떤 기계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고, 하느님을 주모경이나 몇 번 하면 돈푼이라도 자동적으로 주시는 분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만 스스로가 아주 그리스도교적이라고 자부하는 우리 생활이란 결국 다음 몇가지 <외적 실천>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닌가?

 

- 하루 동안 어느 시간에만 습관적으로 별 생각없이 외우는 몇몇 기도문이나, 하느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알아들었을 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이 가만히 있는 것.

 

- 미사에는 마지못해 참여하고 그나마도 지루하게 여기며, 미사 시간 동안 하느님 생각은 않고 제 생각만 하는 것.

 

- 죄를 지은 다음, 아니면 그 전에라도 별 뉘우치는 마음이 없어도 고백성사만 받으면 은총 지위가 수월하게 회복되는 하나의 방편으로 생각하지는 않는가?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린 것과 또 죄의 용서함을 얻는데는 주께 범죄한 것을 통회하는 마음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잊고 있으며, 착한 마음을 보이면 하느님은 언제나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 주시리라는 것을 잊고 있다.

 

그렇지만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존재를 거의 잊고, 그런가 하면 지금 하고 있는 생활이 어리석게도 그리스도교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자위하고 있다. G. 그린은 <우리는 무신론자들처럼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느님은 냉대(冷待) 때문에 죽을 지경이다. 문마다 다 두드리시는 그분께 누가 문을 열어 드릴까? 들어가 계실 자리는 이미 빼앗겼다. 누구한테? 우리 자신한테다.>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들이 그분을 믿지 않을 때라도 항상 계신다.>(G. 그린)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이란 무의미한 어휘나 사상가들이 생각해낸 무슨 추상적인 이념(理念)이 아니다. 하느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초월하시고, 또 현존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 존재가 유지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조금도 생각지 않고 세상 일에 휩쓸려 길가를 헤매며 방황하고 있지만 결국 그들을 있게 하는 이는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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